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14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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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7-03 ㅣ No.130

연 중  제  14  주 일 ( 가 해 )

        즈가리야 9,9-10  로마 8,9.11-13  마태 11,25-30

     1999. 7. 4.

 

주제 : 똑똑한 사람들의 어리석음

 

육군 대령 같은 대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육군 병장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의 계급이 통하는 군대사회였더라면 누가 명령하고 누가 따라야 하는지 그것은 따로 질문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두 사람은 같은 사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인생의 경륜이 많은 대령 같은 대위는 더 힘든 일을 맡게 되었고, 나이도 적고 경륜도 적은 병장은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드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게 부당하게(?) 대우받는 세상은 분명 깨져야 할 세상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무더운 계절 7월 들어서 맞는 첫 번째 주일, 연중 14주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을 현명하게 살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반대로 현명한 사람들의 삶에는 걸맞지 않는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참으로 세상을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고민과 걱정을 남들만큼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현명하게 살려고 한다면, 많은 것을 집에 쌓아놓고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제대로 관리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살겠지만, 어리석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세상의 것에 별다른 관심을 갖고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보다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또 없을 것입니다. 삶의 길이에 조금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리석게 산다고 해서 기쁨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책임지고, 사회를 책임지고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무척이나 대단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자세가 필요하긴 하지만, 이런 자세를 인정해주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참으로 현명한 어른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향하여 오늘 예수님은 푸념하시듯, 어린이들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푸념을 들으면서, 예수님과 하느님의 판단기준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모르긴 해도 예수님의 판단기준에 세상에서 통용되는 기준은 없는가봅니다.  그렇기에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현명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아니 내가 현명하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현명하고 똑똑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싶어합니다. 사람이기에 갖는 당연한 욕심인데도, 오늘의 복음 말씀과 비교해서 생각하다보면, 뭔가 켕기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또 한 가지 세상을 달리 보기에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것이 ’멍에’이고, 사람의 등을 내리눌러 걸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짐인데, 당신의 것을 메고 지면 ’안식을 얻을 것이고 가볍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이드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의 지식에서 지나치게 현명하기 때문이고, 세상의 차원을 달리 보았을 때 누릴 수 있는 참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존재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데에 너무나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평화를 누리고 싶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대신에 평화를 실천해야한다는 말씀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더 달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 참 평화를 이루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무기와 군마(軍馬)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오늘 1독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현명하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사는 우리는 성서의 이 말씀에 대하여 찬성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산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행복은 남들과의 경쟁을 통해서 더 긴장하고 살아야만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참된 평화는 아닙니다.

 

세상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생활은 인간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합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희생을 하나씩 둘씩 줄여가야만 언젠가는 세상이 완성될 것이고, 더 이상 변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었을 때, 세상 완성의 판단자이신 분의 뜻에도 흡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관리를 맡기신 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안에서 평화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삶의 자유도 누릴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몸으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은 이 세상을 적당하게 살면 모양과 형태를 바꿔서 이 세상에 다시 놓고 떠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만, 그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보이는 몸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신앙에서는 그 다른 것을 가리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고, 영혼이야말로 세상을 우리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뜻을 완벽하게 수용할 줄 아는 불가사의한 실체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현명하게 살면 우리가 맺을 삶의 결실이나 명성은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짧은 효과를 보자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육체는 땅 속에 들어간지 20년이나 모양과 형태를 달리하지만, 눈에 보이는 않는 영혼은 그 모습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세상과 하느님의 나라에서 똑같이 현명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전례를 통하여 우리가 알아듣고 다짐하기를 바라는 교회의 요구사항입니다.

 

사회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같은 사항이 그대로 적용되는 참된 현명함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오늘우리는 참된 현명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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