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16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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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7-17 ㅣ No.133

연 중  제  16  주 일 ( 가 해 )

          지혜 12,13.16-19 로마 8,26-27  마태 13,24-30

      1999. 7. 18.

주제 : 나 자신의 참된 삶을 위하여

 

무더운 여름 한 주간 잘 지셨습니까?  

한 주간을 지내고 우리는 다시 하느님의 앞에서 새로운 한 주간 필요한 힘을 주시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돌아보면서 힘을 청할 때는 우리의 활동으로 다른 사람이 힘을 얻을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우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귀중한 사람이 되고, 나 혼자만 사랑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은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그 불가능한 일의 성취를 위해서 노력하면, 그만큼 우리의 삶은 힘겨울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그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복음의 말씀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씨앗을 뿌리는 일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뿌린 씨와 거기에서 맺는 열매의 양에 따라서 힘을 얻고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만, 오늘은 내 삶에 간섭하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에는 '밭에 난 강아지 풀'이라고 돼 있는 '가라지'는  밀과 겉모양이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구황(救荒)식물로 이용하는 면에서는 좋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파종할 때에는 원하지 않던 이 식물이 양식이 될 밀과 함께 자라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해야할 지 우리는 잘 압니다.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풀만을 선택적으로 없애버릴 수 있는 제초제가 없던 시대에는 그 풀에 대한 올바른 응징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이런 풀에 대한 대처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남기시는 말씀은 다급하게 일을 처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움직이고, 내가 힘을 들여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훗날 내게 남겨준 영향이 아무리 좋은 것이 된다고 하는 보장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밀과 가라지가 현실적인 의미에서 서로 어울릴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그런 마음을 더 간절히 갖는지, 그리고 그렇게 갖는 자세가 과연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가리켜 하느님보다 힘이 약한 존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의 사물에 대하여 그 어떤 것도 우리 맘대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느님은 그 자연만물을 지어내신 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때에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갖는 생각은 어떠합니까?

 

밭에 뿌려진 씨앗, 밀. 그가 가진 숙명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 옆에 훼방할 목적으로 뿌려진 씨, 가라지.  그가 가진 숙명은 자신의 생명을 키우는 일도 되지만 다른 유용한 식물이 올바로 자라는데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밀의 역할을 할 사람으로 시작하는지, 아니면 가라지의 역할을 할 사람으로 시작하는지 그것은 순전히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지 둘은 모두 같은 날에 베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길은 다릅니다. 영원한 불 속으로 갈 것이냐, 다른 생명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는 길로 갈 것이냐의 차이는 출발점부터 달라집니다.  아무도 우리의 미래를 간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훗날 우리가 삶을 뒤돌아보면서 나의 잘못된 결과를 후회하며 '왜 다른 사람들은 나의 삶에 무관심했을까?'하고 아무리 외쳐봐도 돌아올 대답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실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사람인데, 그가 가야 할 길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첫 독서 지혜서는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하느님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주님은 다만 사람들이 당신의 권능을 믿지 않을 때에만 당신의 힘을 드러내시고, 권능을 알고도 주님과 감히 맞서려는 자들을 응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삶을 통하여 두려운 하느님의 힘을 만나기를 청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향하여 참고 인내하시는 것은 아직 우리가 스스로 삶을 뒤돌아보고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판단하시기에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연중 16주일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도 아니고,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도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참아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 주시는 분이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자 애쓰는 분이라고 강조하기에 우리가 할 일은 성서를 통하여 수 차례 울려 퍼지는 그 선언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받아들이려면 고요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고요한 마음,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침착한 마음,  정의에 크게 어긋난 일이 아니라면 참된 변화를 위하여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다시 받아들이며 좀 더 여유 있는 마음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내 안에 먼저 평화를 갖추고 내 안에 사랑의 마음을 갖추어야만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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