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08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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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2-26 ㅣ No.190

      연중 제 8 주일 (나해)

 

            호세아 2,16ㄴ.17ㄴ.21-22 2고린토 3,1ㄴ-6 마르코 2,18-22

       2000. 2. 27.

주제 :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신자 여러분 한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 봄이 다가온 듯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직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도 드는 시기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 본당 설정 6 주년 기념과 더불어서 봄맞이 척사대회를 성황리에 마쳤읍니다. 오후 늦게까지 참여해주신 여러분들과 시상을 위해 끝까지 참고 기다려주셨던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이 있다면, 참석해주신 여러분들이 보여주려고 애썼던 모습들에 비해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참석인원이 부족했다는 점이었읍니다. 사람은 목적을 세우고 살아가는데, 한번 세운 작은 계획과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수는 없고 다음의 기회에는 좀 더 다른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오늘은 연중 8번째 주일입니다.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한가지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유행하는 노래의 가사에서 워낙 많이 사용하기에 그 의미가 약해질 때도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 용기를 주며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게 하는 말은 바로 ’사랑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랑이 말로만 울리는 것보다는 행동이 함께 따라야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읍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기억하게 되면, ’함께 몸 붙여 사는 것, 나만을 생각해 주는 것, 가까운 기억 속에 머무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조건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나름대로 생각하게 합니다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 나를 사랑한다고 밤낮 읊어대던 마음이 변한 것인가?’라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흔히 첫 사랑은 라일락에 비교하여 말합니다. 향기는 너무 강해서 취할 듯하지만, 그 향기를 풍기는 잎을 따서 맛을 보면 향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쓴맛을 풍기는 것이 라일락입니다.  그러나 그 향기가 워낙 강하기에 우리는 그 향기에 쉽게 끌리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와 같은 사랑을 우리는 오늘 첫 독서 호세아 예언서에서 발견할 수 있읍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혼인, 약혼’에 비교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소리를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수 차례 듣고 삽니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아무나 느낄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엄청난 곤경에 빠졌다가 거기서 탈출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나 제대로 간직하는 체험입니다. 애석하게도 사람은 그 기억을 쉽게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혼인은 하느님이 맺어주시는 것이기에 인간이 함부로 떼어놓거나 갈라설 수 없다는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선언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둘 사이에서 결실을 맺기 바라는 축복을 보내는 교회의 기도입니다. 그 혼인의 정신을 약혼의 표현으로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하고 있읍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이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는 사랑을 우리에게 약속하시는데, 이 세상을 조금 밖에 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한계를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맘대로 하고자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시며 서글퍼하실 하느님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여차하면 예수님에게서 비판의 소리를 듣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비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그들이 비판의 소리를 듣는 이유는 좋은 기준을 자신들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남에게 먼저 적용하려고 애썼던 탓이고 자신들이 잘하는 일들에 뿌듯함을 가지고 자랑하려고 애썼던 탓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려고 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응답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구관이 명관, 묵은 것이 새것보다 더 좋다’는 말을 우리는 가끔씩 사용합니다.  그런 말을 요즘의 정치인들이 듣는다면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쓸 때는 의미를 잘 파악해야하는데, 욕심을 앞세운 사람들은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의 의도를 파악하지는 않고 겉으로 표현된 말만을 가지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응답하신 이야기도 시대와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일, 말하는 사람 자신도 그 의무에서 벗어나지 말았으면 한다는 뜻으로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읍니다. 다만 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변하는 것이고, 그 사랑에 대해서 감동하는 우리의 자세가 변하는 것뿐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며 하느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요?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고 삽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느님을 자기 눈에 보여주면 그분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살수는 없읍니다. 한가지 예로, 우리는 이곳 고양시의 덕양구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삽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일에도 이런 기준이 적용되는데,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적용되는 기준은 어떠하겠습니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읍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보는 것’만으로 모든 일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그가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말도 되지 않는 소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말을 바꾸어 쓰곤 합니다. ’백견(百見)이 불여일신(不如一信)’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길을 기억하며, 이번 한 주간이 그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해야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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