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사순 3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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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3-25 ㅣ No.194

사순 제 3 주일 (나해)

 

          출애굽기 20,1-17     1고린토 1,22-25     요한 2,13-25

 

     2000. 3. 26.

 

주제 :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겨울이 가고 봄이 된 듯 했는데, 다시 꽃샘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이런 자연의 변화는 우리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비록 우리의 귀에 와 닿는 소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연의 변화를 통해서 들려오고 들어야하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분명 우리가 져야 할 몫이 될 것입니다.  그 소리를 제대로 잘 듣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건강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의 균형이 깨지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의 부조화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전혀 다른 결실을 맺는 삶이 시작되는 것은 출발선에서 이루어지는 아주 작은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주님의 날입니다. 고양동의 신자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하신 분, 하느님을 가리켜 욕심을 많이 가진 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장된 표현입니다.  인사 다음에 드리는 첫 마디의 말을 이렇게 하기는 해도 하느님이 욕심 많은 분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당신만을 생각하고 마음을 모을 것을 요구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 2 주일에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입고 계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여주실 영광이 놀라운 것이고, 그 영광을 사람의 눈으로 함부로 표현할 수 없듯이 그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삶의 법칙들, 우리가 성심 성의껏 지키고 함께 하기를 바라는 법칙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법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구속이요 제약입니다.  법(法)이라는 한자(漢字)의 의미는 물이 흘러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기에 아무런 구속이나 제약이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할수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법에 대한 감정은 그저 우리의 행동을 부자연스럽게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첫 번째 독서 출애굽기의 말씀은 모세를 통해서 내려주신 ’십계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열 가지의 계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하느님의 말씀, 십계명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10가지의 계명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행하기를 바라는 긍정의 명령’이 2개, ’행동하면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기에 하지 말라는 부정의 명령’은 8가지에 9개가 있습니다.  부정의 명령이 많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 삶의 자세가 성숙하지 않은 탓이라는 소리입니다.  ’실천하라’는 부탁은 아주 자세하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오히려 피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만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자율권을 주는 것이므로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분노하는 모습을 전하는 것은 성서에 몇 번 나오지 않는 특수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성전, 사람으로 사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인 성전을 소홀히 대하는 자세에 대한 분노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돈을 하느님의 성전에 봉헌할 수 있는 거룩한 돈으로 바꾸어주면서 폭리를 취하는 환전상들의 비리,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거룩한 성전 구내에서 취급돼서는 안될 비둘기들을 다루는 왜곡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하여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볼 줄 모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들에게 대들지 말라고 협박합니다. 자신들의 삶을 위협할 수 있는 권리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그것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말(本末)이 바뀐 행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할 수 없을 마지막 ’아킬레스 건’을 건드립니다. 너희들 가운데 이미 형편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린 성전을 허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새로운 성전을 만들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렇게 할 엄두를 내지 못한 유다인들은 또 한번의 큰 소리로 그들의 대답을 대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부였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현명하게 삽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고 맘에 들면 상대방을 자신의 뜻에 맞는 대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꾸기 쉬운 것은 ’자신의 마음’일텐데, 그것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 나 말고 상대방이 바뀌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복음을 통하여 어리석게 보는 일들을 이제 그만하고 새로운 정신을 가지라고 하심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그 사물을 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말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항상 그렇게 돼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정으로 원하실 삶의 방법은 말을 앞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방법, 당장은 빛나지 않고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진정한 실천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또한 여러분의 기억 속에 실천보다 말을 많이 하고 사는 사람으로 인식될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말과 더불어서 행동에도 성실할 수 있기를 말입니다.  

 

오늘 사순 3 주일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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