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사순 5 주일-나해-2000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4-08 ㅣ No.197

사순 제 5 주일 (나해)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 5,7-9      요한 12,20-33

 

    2000. 4. 9.

 

주제 : 하느님의 정신을 사는 사람들이 보일 행동

 

세상에서 그 중 힘든 일의 하나는 다른 사람이 제시하는 삶의 기준대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 기준이 아무리 옳고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의 독자성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그렇게 산다는 것은 주체성 없는 삶으로 바라보기 충분한 삶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비판의 하나로 &#39;종교는 민중의 아편&#39;이라는 소리가 팽배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신앙이 그리고 종교가 현실 생활에 대한 개혁이나 변화를 위한 비판은 미뤄둔 채 그저 현실에서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을 그대로 참으라고, 그렇게 하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축복을 준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서 말입니다. </`>

 

오늘은 사순 5 번째 주일입닭다. 사순 시기를 잘 보낸다는 것은 이래저래 힘드는가 봅니다. 사순 시기나 연중시기나 실제 생활이 달력에서는 별 차이 없는데, 왜 그리도 하기 힘든 일을 자꾸 하라고 하는지, 가뜩이나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 현실 변화의 요소를 찾아보라고 하는지 답답하게 여기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것의 하나가 기쁜 부활시기를 맞이하기에 앞서 해야 한다는 걸림돌 &#39;판공성사&#39;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모두 자신이 바라보기 나름입니다. 행복하게 바라보고 희망을 갖고 현실을 대한다면  현실이 남달리 어렵다고 해도 무너진 하늘 사이로 맑은 창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힘들게 생각하고 멀리 보는 일 대신에 자꾸만 자신의 발 아래만을 내려다본다면 그가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는 모두 겁을 먹게 하는 요소로 보입니다.  이 두 가지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현실은 아무런 차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생각의 차이뿐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생각 역시도 다른 사람이 알아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결국 우리 개개인의 문제라고 과감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 새로운 법을 전합니다. 법이라고 하는 말이 아무리 좋은 뜻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부담스럽다는 생각에는 우리 모두 일치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뜨려버린 묵은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법칙을 세워줄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느님이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자녀들의 삶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입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39;아흔 살이 되신 어른이 환갑이 지난 아들에게 길을 건널 때에는 차 조심하라고 충고한다&#39;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길이 60년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인생의 깊은 맛을 안다고 자부하는 어른들은 세상을 달리 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서를 통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의 마음도 그와 유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서부터 가나안 정착까지, 왕정의 시작에서부터 국가의 운명이 흔들리는 시기를 거쳐오면서 사람들은 많은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 혼란은 하느님이 주셨던 법칙, 십계명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현실을 바라보는 삶의 자세가 잘못된 것이었기에 불안이 겹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삶의 올바른 기준을 다시 세워주기 위해서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 마음에 새겨질 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학창시절 한때는 짝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에게서는 전혀 그 감정을 느껴볼 수 없었던 것도 훗날 안 일이었습니다.  그 감정에 한번 푹 빠지니 공부는 도대체 손에 잡히지 않고 모든 생각이 온통 한곳으로만 집중되는 것이었습니다. 밥을 먹어도 공부를 해도, 나가서 테니스를 한다고 뛰어다녀도 내가 도대체 뭘 하는지 생각이 집중되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이 오래가지 않았기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나중에 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집중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우리 삶의 모습은 훨씬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합니다.

 

묵은 법을 대체할 새 법, 마음에 새겨주실 새 법을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마음은 슬프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사순 시기를 올바로 지내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간절하기에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마음을 갖춰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서 우리 삶에 적용하고 우리 몸을 돌리는 양분이 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을 통해서 &#39;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려고 애쓰는 일보다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 올바로 실천하라&#39;는 소리를 하십니다. 자신보다 뛰어난 분을 따른다는 것은 이래저래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기억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삶의 한 부분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고통을 그대로 견디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적용되는 소리이겠습니다만,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면 사람은 성장합니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모습을 그대로 주장하고 싶다면 변화와 발전은 포기해야 합니다. 땅 속에 들어간 밀알이 열매를 맺는 새로운 모습으로 자랄 수 있으려면 먼저 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바라는 생명이나 결실을 얻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을 통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무조건 우리가 희생하고 단식하고 남에게서 억울한 고통을 당해도 그저 이리저리 터지는 것을 바라시겠습니까?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어떤 모양으로 끝을 맺을 지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재주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신 하느님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알려주러 오신 분이지지만, 그분은 기도하셨고, 겸손한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어떤 삶을 통하여 이 세상에 행복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되겠다고 다짐하시겠습니까?



54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