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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파리외방전교회(MEP)와 한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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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93

파리외방전교회 설립 350주년 기념 기고


파리외방전교회(MEP)*와 한국 교회 (1)

 

 

한국 교회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위상은 각별하다. 이승훈 베드로와 동료들이 이땅에 신앙 공동체를 탄생시킨 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목자 없는 박해지로 건너와 조선 교회 신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1954년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한국 현대교회사를 몸소 겪어온 두봉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의 한국 선교 역사를 정리한 글을 2회에 나누어 싣는다.

 

 

스스로 신앙을 찾아 나선 사람들**

 

천주 신앙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용감한 사람들! 세례를 받자 스스로 공동체를 세우고 이내 사제를 찾아 나선 사람들! 조선 교회 탄생의 놀랍고도 경이로운 역사는 바오로 사도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복음을 믿으려면 먼저 그것을 들어야 하고, 선교사가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선 들을 수 없다고 설파했다.

 

약 250여 년 전, 프랑스 대혁명과 엇비슷한 시기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은 중국의 절대적 영향권에 놓여있었다. 중국은 지리학, 천문학 등 학문에 조예가 깊은 유럽인들을 황실로 초대했다. 이 전문가들은 종교에 정통한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조선 정부는 모든 문호를 완전히 닫고 있었으나,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새로운 이념을 갈망하고 나라에 충성하려는 열망에 가득 차 한문서적들을 돌려보았다. 이중 상당수는 두 세기 전 마태오 리치 신부와 그 동료인 예수회 선교사들이 저술한 천주교 서적(한역 서학서)들이었다. 이들은 훌륭한 정치적 이념들을 품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논할 계제가 아니었기에 우선 사상을 키워야겠다고 판단했다.

 

가령 홍유한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천주교 서적을 여러 권 읽고 단번에 매료되었다! 그는 혼자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고 심지어 자기 방식대로 일주일에 한 차례 ‘주님의 날’을 기렸으며,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자선을 실천했다. 첫 조선인 사제로 70년 뒤에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그를 두고 “천주교를 실천한 최초의 조선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주 정확한 말은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섞여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더 정확히 말해 하느님의 짓궂은 미소처럼 이 최초의 천주교인들은 아무런 흔적없이 사라졌다!

 

 

들불처럼 번져 나간 신앙 공동체

 

한편 이벽은 홍유한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그는 서적에서 읽은 천주교에 매료되어 이를 더 알고 싶어 했다. 그러려면 중국 북경으로 가 서양의 ‘현자들’을 만나야 했다. 또 반드시 해마다 섣달(음력 12월) 말 왕이 중국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조천[朝天]을 하고) 이듬해 책력을 받아오기 위해 파견하는 사절단(동지사)에 속해야 했다. 이벽은 자신이 임명될 수가 없자,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가게 된 동년배의 벗을 떠올렸다. 친구의 이름은 이승훈으로 당시 27세였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그가 지닌 서적들을 보여주며 북경에서 다른 서적들을 구해 오라고 부탁한다. 또한 세례를 받도록 권고한다.

 

이승훈은 잠시 망설인 끝에 그 청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북경에서 세 명의 예수회 회원을 만난다. 한 사람은 포르투갈인 알메이다 신부이고 다른 두 사람은 프랑스인 그라몽 신부와 방타봉 신부였다. 이승훈은 조선어로, 신부들은 중국어로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한문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필담으로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이승훈은 그들에게 세례를 청했고, 그라몽 신부가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아, 그런데 기초 교리를 받을 시간이 3주밖에 없었다! 마침내 프랑스 신부들이 이승훈에게 기초 교리 시험을 치르게 했고, 결과는 흡족했다. 신부들은 그의 부친에게 허락을 청했고, 이승훈은 1784년 1월 말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조선 교회의 초석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천문학, 수학, 지리학, 서학 서적들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이벽은 매우 기뻐했다. 그와 벗들은 천주교 연구에 전심전력했고, 그해 초겨울 이 베드로는 이벽을 포함해 공부에서 앞선 3명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얼마 뒤 다른 한 무리가, 이어 또 다른 무리가 세례를 받았다. 또 첫 번째로 세례 받은 이들이 준비되었다고 판단된 예비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들을 이끌어 오늘날 기초 공동체라 불리는 것을 세웠다. 다수의 기도서가 포함된 매우 중요한 천주교 서적들이 매우 빠르게 조선어로 번역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이들 새 신자들은 선교사 정신으로 하층민들을 위해 전통적 어법으로 천주교의 메시지를 담았고, 우의적 내용을 담은 역사서를 만들었다! 선교사 없이 신앙 공동체들이 곳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들에게는 사제가 필요했다

 

고위 관리들 사이에 위험분자들이 몰래 모임을 갖고 공공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밀담이 돌았다. 그러다 대낮에 신자들이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모여 있는 동안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김 토마스의 집은 서울의 한복판, 지금의 명동대성당 자리에 있었다. 포졸들은 밖에서 소리를 듣고 있다가 불법 노름을 하는 상인 일당인 줄 알고 현장을 덮쳤다! 이 사건으로 무성한 소문이 나돌았다. 공동체는 흩어지고 김 토마스는 유배되었다. 이승훈 베드로는 이 소식을 이듬해 연행사절로 떠나는 친구를 통해 그라몽 신부에게 알렸다. 그 친구 역시 많은 서적을 갖고 돌아왔으나 국경에서 그만 당국자들에게 빼앗겼다. 이미 천주교인들이 달갑지 않은 존재로 취급받고 박해가 시작된 때였다.

 

상황은 비관적으로 변했다. 그런데 경이 중의 경이는 신자가 더욱 늘어났다는 점이다. 초기의 열정은 한번 일었다 사그라지는 짚불이나 엘리트의 전유물로 치부될 수도 있었으나, 최초의 천주교인들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 고루 분포해 있었고 수백 명에서 이내 천명, 이천 명으로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당장 사용할 주님의 도구가 충분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사제가 필요했다.

 

이 베드로는 교회에서 사제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잘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생각으로, 용감한 이 베드로와 그의 주변인들은 사제를 선출하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 중 몇 명이 ‘사제들’로 선출되었고, 그중 한 명이 ‘주교’로 뽑혔다. 그러나 얼마 뒤 이 방식의 타당성에 의구심이 일어 토론 끝에 북경 주교에게 판단을 의뢰하기로 결정했다. 접촉은 일 년에 한 차례, 그것도 붙잡히지 않을 경우에만 가능했기에 답변을 받기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도착한 답변은 사제 선출(가성직제도)의 타당성에 부정적이었으나, 북경 주교가 사제 파견을 허락한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이었다. 얼마나 기뻤겠는가!

 

조선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태동한 지 10년 만인 1794년, 젊은 중국인 사제 주문모 야고보가 조선에 밀입국했다. 그는 숨어 지내면서도 밤마다 이동을 계속하여 신자들을 격려하며 성사를 주었고 복음을 전파했다. 그가 도착할 당시 4천 명이던 신자 수도 1만 명을 넘었다! 하지만 신자들이 붙잡혀 고문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주 신부는 자수한다. 1801년 처형당할 때까지 그는 6년 4개월 정도 선교활동을 펼쳤다. 신자들은 북경 주교에게 다른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간청한다. 그리하여 또 다른 선교사가 파견되나 조선으로 오는 도중 사망한다! 이제 북경에서 보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신자들은 교황에게 편지를 썼다. 첫 번째 편지는 중간에서 빼앗겼고 작성자는 처형당했다. 두 번째 편지도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교황 비오 7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퐁텐느블로 성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세 번째 편지가 교황 레오 12세에게 전달되었고 레오 12세는 조선에 선교사들을 파견해 줄 것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요청한다.

 

 

‘무자비한 곳’으로 간 정신 나간 이들

 

조선에 선교사들을 파견하라고? 뤼 뒤 박(Rue du Bac,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건물이 있는 거리 이름)의 지도자들은 미온적 반응을 보였다. ‘지도자들’이란 본부에서 선교지들과 프랑스 교회 사이를 중재하고, 회원을 모집하고 양성하며 재원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회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모두 38명뿐인 회원들은 이미 아시아 각지로 흩어져 있었다! 그러니 새로운 ‘선교지’에 인력과 재원을 보내라는 요청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게다가 그곳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밀입국한 이들에게 무자비하다고 악명 높은 곳 아니던가? 그들은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1828년 회원들에게 회람을 돌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지원자들에게 선택권을 주겠다고 알렸다.

 

그런데 여기 자원한 ‘정신 나간 이들’이 있었다! 첫 번째 사람은 막 방콕의 보좌주교로 임명된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를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한국 교회사와 파리외방전교회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무일푼에 아무 짐도 없이 브뤼기에르 주교는 길을 나섰다. 그는 배로, 이어 도보로 중국 대륙을 횡단했다. 이때를 회상하며 쓴 그의 여행기는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 헌신적인 동료들과 거짓 형제들, 해적들, 배고픔, 목마름, 병환 등 없는 것이 없었다. 이 여정은 무려 3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북경 주교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당시 북경 주교는 포르투갈 사람으로 그 역시 두려움에 숨어 살고 있었다! ‘길을 미리 닦아놓고자’ 북경 주교는 중국인 사제를 조선에 보냈는데, 그들이 보기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계획은 완전히 미친 짓처럼 보였다. 서양인이 국경을 겨우 넘어 들어간다 해도 조선에서 발각되지 않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기에 그의 존재가 새로운 박해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가 여정을 중단하도록 설득하려 갖은 수단을 썼다. 객관적으로는 그들이 옳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무릅쓰고 여정을 계속했다. 교황이 그에게 조선을 맡겼고 조선 신자들과 국경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여정에서 그는 심신의 기력을 소진하여 쓰러졌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영면하고 말았다.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의 조선 교회 사목

 

다른 동료 두 명도 자원하고 나섰다. 바로 피에르 모방 신부와 자크 샤스탕 신부였다. 그들은 따로 출발하였으나 행선지는 같았다. 모방신부가 먼저 조선 국경에 가까이 갔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를 치렀으며 그를 대신해 조선인들과 약속한 장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었지만, 모방 신부는 조선 신자들의 안내를 받아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국경도시의 하수구멍을 통해 입국에 성공했다. 때는 1836년으로 주 신부가 순교한 지 35년 되던 해였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듬해 샤스탕 신부도, 이어 로랑 앵베르 신부도 입국했다. 앵베르 신부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다.

 

조선에서 이들의 삶은 참으로 고되었다. 앵베르 주교가 남긴 글을 살펴보자. “저는 피곤에 지쳐있고 늘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매일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3시에 하인들을 불러 함께 기도를 드립니다. 3시 반부터 성무를 시작하는데, 예비신자들이 있으면 영세를 주는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견진을 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미사성제와 영성체, 감사기도로 이어집니다. 성사를 받은 15~20명의 신자들은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낮 동안에도 대략 그 정도가 오는데, 한 사람씩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한 뒤 이튿날 아침에야 떠납니다. 저는 신자들이 모인 집에 이틀씩만 머물고, 날이 밝기 전에 다른 집으로 옮겨갑니다.

 

저는 배고픔으로 많은 고생을 겪고 있습니다. 일어나서 정오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식사도 영양가는 거의 없고 양도 적습니다. 게다가 춥고 메마른 계절에는 그마저 쉽지 않습니다. 식사 후 잠시 쉬었다가 큰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밤이 되도록 고해성사를 줍니다. 밤 9시에 잠자리에 드는데, 타타르산 양모 매트가 깔린 맨바닥에 자리를 펴고 눕습니다. 조선에는 침대도 매트리스도 없습니다. 저는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부지런하고 매우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극점에, 일의 정점에 닿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너무도 고된 삶을 살기에 목숨을 위협하는 칼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 같은 모습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존재를 조선에 영원히 아로 새기게 했다. 모방 신부는 입국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3명의 젊은 조선인을 중국으로 보내 성직을 준비하게 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특수성이 무엇보다 현지인 사제단 양성에 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3명의 선교사가 있다는 사실을 조선 당국이 알면서 대대적인 박해(기해박해)가 일어났고, 선교사들은 자수하여 참수당했다.

 

한편 3명의 조선인 신학생들은 중국과 마카오에서 사제양성 교육을 받았는데, 홍콩과 인접한 바로 그곳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대표부’가 있었다. 대표부장은 조정자 구실을 맡고 있었고, 대표부 건물은 안내 장소였다. 3명의 조선인들은 대표부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과 함께 살았고, 그중 1명이 병사하여 2명이 남았다. 그들은 나중에 조선의 사제로 서품을 받을 때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이 아닌 교구 사제가 되었다.

 

 

방인 사제들의 탄생과 희생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많은 희생을 겪었으나 외국에서는 그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소문조차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청은 명의주교가 생존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장 페레올을 조선의 보좌주교로 임명했다. 페레올 주교는 중국에서 2명의 조선인 신학생들에게 부제품을 주었고, 그중 한 명인 김대건 안드레아에게 조선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김 안드레아는 서울로 가는 배 한 척을 샀고, 험한 바다에서 항해해 본 적이 없는 소수의 선원을 모집했으며, 작은 나침반 하나만 들고 중국을 향해 황해를 건넜다. 이들은 거친 폭풍을 겪고 마침내 성공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인근에서 안드레아는 첫 조선인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안토니오 다블뤼 신부와 함께 다시 출항했고, 또다시 폭풍을 만났으나 잘 극복했다. 하지만 이듬해 주교로부터 중국인 어부들을 통해 중국과 접선하는 일을 맡은 김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된다. 신문과 소송 끝에 사형이 언도되어 25세의나이에,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1개월 만에 처형된다!

 

두 번째 조선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도 조선에 입국하여 병사하기까지 수십여 년 동안 경이적으로 성무를 펼쳤다. 천주교는 계속해서 금지되고 20여 년 동안 박해받으며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따금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몇몇이 밀입국했으나 다수가 병사했다. 위생상태가 아주 안 좋고 치료받을 방도도 없기 때문이었다. 신자들과 사제들 모두 숨어 지냈고 관헌도 그들을 눈감아 주었다. 예전에 앵베르 주교가 몰래 자리를 옮겨 다닌 것처럼, 다블뤼 신부는 성직을 준비하는 청년들과 함께 다녔다. 이윽고 비밀리에 신학교가 준비되어 2명의 선교사가 신학생 양성을 맡게 된다.

 

그즈음 가장 끔찍한 박해가 오려 하고 있었다. 바로 1866년 병인박해다. 당시 국제적 상황과 국내 정세, 대원군의 수중에 넘어간 권력 등을 보면 종교의 자유를 기대할 수 있었으련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사실 권력층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남녀 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평등을 설파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패륜과 같았다.

 

오늘날 당연시되는 인간의 권리와 신앙의 자유를 설파한다는 것 자체가 공공질서를 전복하는 행위였다. 게다가 주위에서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무력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바야흐로 아편 전쟁의 시기이자 일련의 ‘불평등 조약’들이 체결된 이때에 대국인 중국조차 굴욕을 당했다. ‘서양 종교’라 규정된 천주교가 정복자가 되어 곳곳에 첩자들을 심고 있었다. 따라서 권력층은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희생자 수가 1만 명을 헤아렸다! 베르뇌 주교와(그사이 주교로 수품된) 다블뤼 주교,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위앵, 오메트르,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처형당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리델, 칼레, 페롱 신부는 중국으로 도주했다. 당시 신학생들 중 사제로 서품받은 이들이 없었기에 선교사가 재입국에 성공하기까지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00년 박해에 종지부를 찍다

 

한편 프랑스는, 1839년 선교사 3명의 처형과 1866년 선교사 9명의 처형에 항의하며 조선에 군함을 보내어 해명을 요구하고 위협을 가했다.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는 도성을 약탈하고 외규장각 문서들을 탈취했다. 이 문서들은 지금도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한국은 계속해서 큰 목소리로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조선 신자들과 그들의 사제들은 혼돈에 빠졌고 희생당했다. 생존자 가운데 하나인 펠릭스 리델 신부는 잠시 중국으로 도망했다가 조선으로 돌아가려 했다. 입국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통역관으로 프랑스 전함을 타면 조선 신자들과 접촉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함대를 지휘하던 로즈 제독이 결국 승선을 허락했다. 리델 신부는 제독에게 조선 신자들의 딱한 처지를 전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겨줄 것을 부탁했으나 답변은 신랄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관심을 쏟는 이유는 그대들이 선교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기 때문이오. 그대들이 비누 장사치들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바로 이 리델 신부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77년 재입국에 성공한다. 넉 달 뒤 그는 체포되어 넉 달 동안 옥살이를 했고, 이전의 신부들과는 달리 처형 대신 추방당했다! 선교사가 목숨을 부지한 것은 처음이었다! 시대가 그만큼 변한 것이다. 고종은 외국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기로 결정했고, 일본, 미국, 이탈리아,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했다. 1886년 한불조약은 종교의 자유 조항이 포함된 유일한 조약이었다. 이렇게 박해의 시대는 끝이 났다.

 

100년 사이 조선에 밀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32명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남다른 자기희생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조선은 가장 위험한 나라이자 그만큼 선망의 나라로 여겨졌다. 적어도 본부에서 동료 선교사의 순교를 알리고 함께 모여 감사의 송가인 ‘테데움(Te Deum)’을 부르던 시대에는 그랬다. 눈사태와도 같은 박해의 시기를 보낸 뒤 어떻게 조선 교회가 재건될 수 있었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 파리외방전교회의 원어 명칭은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약자로는 MEP라 표기한다.

** 이글의 소제목은 원문과 별도로 편집자가 내용이해를 돕고자 붙였다.

 

* 두봉 레나도(Rene Dupont) - 전 안동교구장 주교.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에 이바지하였으며, 1990년에 은퇴하여 지금은 경북 의성군 도원리에 살고 있다.

* 연숙진 아녜스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료실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6월호]

 

 

파리외방전교회 설립 350주년 기념 기고


파리외방전교회(MEP)와 한국 교회 (2)

 

 

100년에 걸친 박해시대가 지나 한국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국권 상실과 국토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역사는 교회에도 큰 시련과 과제를 안겨주었다. 바야흐로 ‘땀의 순교’가 교회의 새로운 사명이 된 것이다. 그 끊임없는 순교의 역사를 6월호에 이어 소개한다.

 

 

종교의 자유 명문화, 그러나 현실은

 

1886년 한불조약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는 요술지팡이가 아니었다. 조선 내에서 한 번도 공표되지 않았고 지방에서는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십여 년 동안 천주교인들은 빈번히 탄압의 희생물이 되었고, 박해를 두려워하며 산속 가장 외진 곳에 은신해 지냈다. 그 사이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조선의 문호개방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이웃은 일본이었다. 이십여 년 전부터 일본은 스스로 근대 세계에 문화를 개방하고 조선을 호시탐탐 노렸다. 일본이 섬나라이지만 조선은 아시아 대륙의 한반도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륙에 한 발 들여놓는 것이 바로 일본 정부의 꿈이었다. 일본인들은 천천히, 그러나 체계적으로 조선에 정착하여 1905년에 총감부를 설치했고 1910년에는 국토를 병합했다. 그들은 조선인들을 만주로 내몰았고 조선에 남아있는 조선인들을 조직적으로 ‘일본화시켰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은 세계지도에서 지워져 있었다. 한국 교회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종교의 자유가 비교적 확실해졌을 때 조선의 천주교 신자는 2만여 명이었고 이들은 눈에 띄지 않으려고 흩어져 지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은 12명으로, 그들 중 마리 블랑(한국명 백규삼) 주교가 교구장이었고 조선인 사제는 아직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이 바로 박해 이후 살아남은 ‘패잔병들’이었다. 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은 자기희생을 다했고 매우 침착하게 매진하였으며 원대한 계획을 품었다! 바로 그해 그들은 인쇄소를 열었다. 이는 신자들과 조선인 모두를 위한 것이었고 놀라울 정도로 혜택을 가져다준 대혁신이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현존하는 명동대성당의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성당건축 공사는 6년이 걸렸고 당시 사진을 보면 주변의 모든 가옥이 초가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88년 그들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을 조선에 불러들였다. 이 또한 여성은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줄로 여기던 유교 국가에서는 혁명이었다. 마침내 조선 교회는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바로 이 시기에 프로테스탄트 교파들도 대거 조선으로 들어왔다. 미국에서 온 그들은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보란 듯이 도시마다 자리를 잡고 병원과 학교, 대학교 등을 세웠고 실제 많은 성공을 거뒀다.

 

 

일제시대의 한국 교회 성장기

 

종교의 자유가 도래한 지 10여 년 뒤인 1900년에 천주교 신자는 4만 2천 명이었고,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은 39명, 조선인 사제는 11명이었다! 아직 조선에 신학교가 없었기에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 바로 신학생들을 말레이시아의 페낭 ‘대신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실 3세기 훨씬 이전에, 더 정확하게 말하면 1665년에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인 사제 양성을 목적으로 그곳에 대신학교를 설립했다.

 

1890년부터 1933년까지 구스타브 뮈텔 주교가 조선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뮈텔(한국명 민덕효) 주교는 대가의 손길로 조선 교회를 잘 이끌었다. 그는 지침들을 내리고, 서울에 신학교를 세웠으며, 손수 총 64명 조선인 사제들의 서품식을 집전했다. 그는 공소들을 세우고 모든 공동체를 방문했으며, 오랫동안 비에모(한국명 우일모)신부가 작성해 온 월간 회보를 통해 세상과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또한 그는 도움을 구하고자 유럽으로 여행을 가서 독일 생토틸리엔(St. Ottilien)에 있는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1909년 조선에 들어왔다. 1911년에는 두 번째 교구인 대구교구를 설립하여 같은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인 플로리앙 드망즈(한국명 안세화) 주교에게 맡겼다. 1914년에서 1918년 사이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선교는 잠시 휴지기를 겪는데, 수많은 동료들이 동원령을 받았고, 그들 중 3명이 전사했다. 전쟁 이후 뮈텔 주교는 (지금은 북한에 속한) 원산을 베네딕도회 회원들에게 이양했고, 춘천은 (대부분이 아일랜드 출신인) 성 골롬반 신부들에게 넘겼다. 또 (지금은 북한 수도인) 평양을 (미국인) 메리놀 신부들에게 맡겼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자 공용어가 된 일본어를 배우지 않고, 일본 당국에 대해 엄정한 중립을 고수했다. 그 같은 중립성 때문에 뮈텔 주교는 나중에 혹독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가령, 그는 빌렘 신부에게 옥중에 있는 어느 천주교 신자에게 고해성사를 주러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신자는 바로 안중근 토마스로, 일본 총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은 상태였다. 뮈텔 주교는 또한 신학생들이 대규모의 반일 시위에 참가하는 것도 금지했다.

 

1933년 아드리앙 라리보(한국명 원형근, 이하 괄호 안은 한국명) 주교가 뮈텔 주교의 후임이 되었고, 1938년 제르맹 무세(문제만) 주교가 드망즈 주교의 후임이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대개척자들의 시대였다. 카미유 부이용(임가미), 쥘 베르몽(목세영), 피에르 시잘레(지사원), 으젠느 코스트(고의선), 으젠느 드뇌(전학준), 카미유 두세(정가미), 피에르 기낭(진보안), 조셉 조제(양수춘), 조셉 모리마르(모리말), 레옹 피숑(송세흥), 빅토르 프와넬(박도행), 아쉴 로베르(김보록), 피에르 비에모(우일모) 등. 이들은 지금도 신자들의 기억 속에 조선의 위대한 사도들로 남아있다! 피숑 신부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이 얼마나 존경스럽게 말씀을 하시는지! 부이용 신부의 담당 지역 출신의 사제 18명과 수녀 41명이 그들의 ‘아버지’에 대해, 또 연로한 한국인 사제들이 기낭 신부에 대해 얼마나 존경스럽게 이야기를 하는지! 우리도 마찬가지로 베르몽 신부를 추억하면 감회가 새롭다. 델랑드(남대영) 신부는 예수 성심 시녀회를, 생제(성제덕) 신부는 서울 성가 소비녀회를 설립하였다. 현재 두 수녀회의 회원 수는 각각 500명을 훨씬 넘는다!

 

 

해방된 나라, 갈라진 교회

 

이어 1942년에는 라리보 주교가 일본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의 자리를 조선인 노기남 바오로 주교에게 넘겼다. 일본인들은 격분하여 대구교구의 무세 주교를 사임시켰고 그 자리에 일본인을 앉혔다.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이 독일과 이탈리아 편에 서서 전쟁에 가담했다는 점을 말해두어야겠다. 김 추기경과 같은 또래의 조선 젊은이들은 일본군에 징집당했다. 전쟁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종결되었다.

 

조선은 잿더미 위에서 되살아났으나 양분되고 만다. 러시아인들은 북한을, 미국인들은 남한을 재구성할 심산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행동했고, 그 결과 북한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남한에는 자유주의 체제가 세워졌다! 예상했던 대로 이어 1950년에는 일이 벌어졌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이다. 남한의 영토가 채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연합군이 남한을 도왔고 공산군을 밀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북한 영토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이때 중국이 북한을 도왔고 그러다 결국 지금의 국경선이 만들어졌다! 1953년 휴전협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사망자가 났고 나라는 무참히 깎이고 둘로 갈라져 지금에 이른다.

 

북한과 남한 사이의 상황은 여전히 긴장 상태다. 북한의 핵실험 때문에 긴장이 심해졌다. 정부관계자들을 제외하면 우편이나 전화, 전자우편, 텔레비전 등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교류가 없다. 이는 양자 간의 시스템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전선 동쪽에 ‘안내를 받는’ 방문이 허용되면서 남한 사람들은 휴전선 이북 ‘금강산’의 빼어난 자태를 직접 보며 감탄할 수 있게 되었다. 휴전선 서쪽에도 남북 공동 산업단지(개성공단)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예도 있다. 이따금 적십자사가 50년이 넘게(!) 서로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 상봉을 일회적으로나마 도모하고 있다.

 

그 가운데 교회의 위치는 어떠했는가? 북한에는 박해시대처럼 극소수의 신자들이 남아있으나 단 한 명의 사제도, 단 한 명의 수녀도 없다. 평양에 성당이 하나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용도일 뿐이다. 남한의 신자들은 인도적 지원을 북한에 보내는 데에 앞장 서고 있다. 이런 계획의 일환으로 몇 해 전부터 상당수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인도적인 구호단체를 인솔하고자 북경을 우회하여 차례로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한민족은 수많은 고통을 겪어왔다. 북녘에 사는 이들은 여전히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그 고통을 함께해 왔다. 1948년 대부분의 신부들이 라리보 주교를 중심으로 대전에 다시 모였다. 하지만 그들 중 12명은 한국전쟁 초기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피에르 비에모(한국명 우일모), 안토니오 공베르(공안국), 줄리앙 공베르(공안세), 조셉 카다르(강달순), 조셉 뷜토(오필도), 장 마리 폴리(싱응영), 필립 페랭(백문필), 조셉 몰리마르(모리말), 장 콜랭(고일랑), 로베르 리샤르(이동현), 피에르 르뢰(노신부), 마리우스 코르데스(공신부) 신부 등이다. 셀레스탱 코요스(구인덕) 신부는 기적적으로 생환하여 그때를 증언하고자 “나의 북한 포로기”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밀가루로도 교회를 키우신 하느님

 

전쟁이 끝나자 한국의 요청으로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더욱 많은 선교사 신부를 한국에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그러니까 나와 우리 동창들이 마르세유를 출항하여 두 달 반의 여정 끝에 도착한 한국은 황폐화되고 누더기가 된, 그야말로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우리는 지부장인 무세 주교와 경리담당자인 시잘레 신부의 환영을 받고 몇 달 후 우리의 교육을 맡게 될 선배신부에게 보내졌다. 당시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다. 우리는 이따금 이웃 본당에서 미사를 봉행했다. 그 시기에는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는데, 우리는 그곳이 생동감 넘치는 공동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따금 우리는 프랑스 부대나 벨기에 부대의 군종사제를 도와주곤 했다. 연합군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미제 통조림을 잔뜩 받아가지고 돌아오곤 했다.

 

그 뒤 우리는 우선 대전교구의 선배신부들에게 보내졌고, 이어 대구교구로 보내졌다. 그들이 바로 아드리앵 라리보(한국명 원 아드리아노) 주교와 쥘 벨몽(목 율리오), 조셉 조제(양 요셉), 가스통 프와요(표 베다스토), 에밀 보드뱅(정 에밀리오), 오귀스트 파이에(방 아오구스티노), 피에르 생제(성 베드로), 에밀 프로망투(포 에밀리오), 루이 델랑드(남 루도비코), 그리고 루이 뤼카(류 루도비코) 신부이다. 이윽고 조선에 프랑스와 알레르(하 프란치스코), 셀레스탱 코요스(구 체레스티노) 신부가 입국했다. 한국인 사제에게도 보내졌다. 요청은 끝도 없었다. 물질적 원조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신앙 생활도 받아들이고 싶어했다. 사제들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미국에서 보내온 긴급 구호품을 배포하는 일이었다. 다량의 밀가루와 옥수수가루, 간간이 분유와 구제 의류들이 본당마다 트럭 가득 실려 왔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은 교회가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구호품을 잘 전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일제히 달려들어 손을 뻗는데 누가 가장 가난한 사람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우리는 농담 삼아 ‘밀가루 신자’라는 말을 했는데, 간혹 몇몇 신자들은 천주교보다는 밀가루에 더욱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주님은 갖가지 나뭇가지로도 불을 피우시는 분이 아니시던가. 마침내 한국교회는 물이 가득 오른 어린 나무로 자랐고, 우리도 서서히 제 힘으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천주교 신자는 어림하여 1960년대 18만 명(총인구 3천만 명 대비)에서 현재 4-5백만 명(총인구 5천만 명 대비)으로 늘었고, 이는 총인구의 0.6%에서 대략 1%로 늘어난 셈이다.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총인구의 대략 20%를 차지한다고 보면 남한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낯선 외국의 종교가 아니다. 외국인 사제들은 200명 정도 남아있고 한국인 사제들은 4천 명, 대신학교 학생은 1,400명, 남자 수도자는 1,500명, 여자 수도자는 1만 명이나 된다. 그 사이 나는 22년 동안 신생 교구인 안동교구의 수장을 맡아오다 한국인 주교에게 자리를 넘겼다. 지금은 군종교구를 포함하여 16개 교구를 한국인 주교들이 통솔하고 있고 추기경도 김 스테파노 추기경과 정 니콜라오 추기경 등 2명이 있다.

 

그 사이 남한은 경제발전에 과감하게 투신했고, 그에 따른 급작스런 변화와 요동을 모두 치렀다. 남한은 더 이상 저개발 국가가 아니다. 경제의 비약적 발전이 교회의 도약에 장애가 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 교회는 적절한 시기에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할 줄 알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내부 문제들이 없지 않으나 한국 교회는 (특히 사회복지와 구호 분야에서) 순기능을 다하고 있고, 그로써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이제 종교는 한국인들에게 삶의 일부가 되었다. 종교는 당연한 것이고 신자들은 열의와 자기희생으로 두각을 보이고 있다.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대략 170여 명의 파리외방전교회 동료들이 활동했고, 1953년 휴전 이후로도 40여 명이 활동했다. 지금 한국에 남아있는 동료들은 15명 정도이다. 우리는 원목사제나 영적 지도자나 동반자로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고, 파리외방전교회 부속 평신도 자원봉사자 여남은 명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선교의 불꽃을 다시 피우고 있다. 재외거주 한국인을 위한 사제들이나 프랑스 등에 외국유학 중인 한국인 사제들을 셈에서 제하더라도, 약 50개국에 대략 650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이 나가있다. 이들 중 신부가 백여 명이고 그 중 절반가량이 한국외방선교회 회원들이다. 수사들도 50여 명, 수녀들도 500명가량 되며, 그 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 선교사제들 중 세 명은 파리외방전교회 준회원인데, 앞으로 다른 이들도 뒤따르리라 본다.

 

이 글이 더 완전해지려면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이 이룩한 언어학적 위업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가령 1869년과 1880년에 펴낸 한불사전들과 1881년과 1965년에 펴낸 문법서들을 꼽을 수 있겠다. 또한 한국의 식생을 연구하고, 토지를 구입하고 건물들을 지었으며, 교육, 문화, 의료, 구호 분야에서 노고를 아끼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한국인들의 손에 무상으로 넘겨주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는 한국에서 살아온 하느님 백성의 역사이다. 한국 교회는 사제 없이 출발했고 여러 번 사제들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북한은 지금도 그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 교회에 봉사했다. 그들은 한국 교회와 고통을 함께해 왔다. 이들의 가장 큰 봉사는 아마도 희망을 품고 한국인 사제 양성에 늘 힘써왔다는 점일 것이다.

 

* 두봉 레나도(Rene Dupont) - 전 안동교구장 주교.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에 이바지하였으며, 1990년에 은퇴하여 지금은 경북 의성군 도원리에 살고 있다.

* 연숙진 아녜스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료실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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