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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18: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 욕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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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09 ㅣ No.707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18)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 욕구란 무엇인가


욕구, 하느님 향한 참된 사랑의 힘 마비시켜



이기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애착하는 마음

십자가 성 요한의 가르침에는 특히 욕구(欲求)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道)를 닦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인가 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작품 곳곳에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성인이 말하는 욕구는 본래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어느 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욕구란 의지의 입인데, 즐거움의 조각으로 잔뜩 막아놓지 않는 한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여러 작품에서 성인이 말하는 욕구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인은 이 표현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는 능력을 빗나가게 만들고 그가 하느님과 합일하는 것을 방해하는 무질서한 애정의 성향들, 애착, 집착, 원의, 불완전한 습관 등을 가리키고자 했습니다. 즉 성인은 ‘욕구’란 말을 통해 “보편적인 습관처럼 말을 많이 하는 버릇,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집착으로서 사람이나 옷, 책과 방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쓸데없는 잡담, 무엇을 맛보거나 듣거나 이와 유사한 것들로부터 조금이나마 만족을 느끼려는 집착”(「가르멜의 산길」 1권 11장 4항) 같은 것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욕구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구석구석에 피어 있는 곰팡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먹고 자고 일하고 휴식을 취하고 사람을 만나며 공부하는 모든 것 안에 깊이 배어 있는 이기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애착하는 마음입니다.


참된 사랑의 힘을 마비시키는 욕구

성인은 그런 잘못된 욕구가 우리 영혼에 얼마나 나쁜 해를 입히는지 지적했습니다. 우선 욕구는 인간이 간직한 사랑의 힘을 마비시킵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가 유래한 기원이자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이신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대체시켜 우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인은 욕구를 잘 다스리지 못해 일어나는 해악을 ‘새와 줄’, ‘빨판상어와 배’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아무리 가는 줄이라 하더라도 새가 그런 줄에 묶여 있으면 절대 창공을 향해 날 수 없으며, 배의 밑창에 빨판상어가 붙어있으면 배는 절대 항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들어 우리들의 욕구 역시 영성 생활에서 그렇다고 지적했습니다.

성인은 욕구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욕구가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욕구는 우리를 욕구 자체의 노예가 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이 계신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들어 올리지 못하게 방해함으로써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존재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고자 한다면, 욕구하는 것들 중에 그 무엇도, 심지어 하느님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취향마저도 정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취향과 사고방식, 주관적인 경험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는 순간, 그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 안에 담아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자신에 대한 헛된 집착을 내려놓으라

이렇듯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인간의 이기적인 경향은 오히려 그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성인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를 수 있도록 그를 준비시켜주는 철저한 이탈(離脫)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성인은 하느님을 찾아 나선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무질서한 집착(執着)의 굴레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굴레를 벗어버릴 수 있을까? 우선, 내가 집착하고 있는 바로 그 집착의 대상이 실은 그다지 집착할 만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제대로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집착할 만큼 좋은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집착하는 대상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그 무엇도 항구한 게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사라져 갑니다. 한마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에 집착하면서 그 대상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준다고 착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높은 명예나 지위에 집착하고 있다면, 내가 그 지위에 오르는 순간, 나와 그 지위를 동일시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허명(虛名)에 불과할 뿐, 내가 실제로 그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 역시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집착하는 명예, 부, 권력, 사람, 물건 등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이면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 모든 집착의 끝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한낱 허무로 돌아갈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에게 집착하며 자신을 드높이고 그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것에 집착하는 동안, 실은 점점 더 야위어 갈 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헛된 애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는 주님 안에서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할 용기가 있습니까? 자신에 대한 헛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자신에 대해 죽을 때, 비로소 여러분에게는 참 생명을 향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9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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