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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하느님의 모상과 부드러운 다스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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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하느님의 모상과 부드러운 다스림
창세 1장은 우주 창조부터 인간 창조에 이르기까지 거대사의 품격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전한다. 이번 호에서는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시각을 제시하는 거대사의 서문격인 창세 1장을 종합해 보자.
원초적 축복
창세 1장에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표현이 일곱 번 등장한다. 사제계 저자는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마다 당신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감탄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행위 중에 잠시 멈춰 바라보신다. 당신에게서 비롯하였으나 당신과 구별되는 피조 세계를 바라보고 음미하신다. 하느님께서 느끼신 놀라움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은 좋으시다’고 노래할 때 사용한 표현으로 그려진다. ‘주님은 좋으시다(선하시다)’는 표현은 시편 100,5; 106,1; 136,1; 1역대 16,34에 나타난다. 하느님의 창조에는 바라보는 동작이 수반된다. 이 바라봄에서 자신과 구별되는 타자와의 관계에 여백이 생긴다. 그리고 타자에게서 느껴지는 신뢰와 경탄이 그 여백을 채운다. ‘보시니 좋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피조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원초적 축복이다.
인간의 소명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좋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일부러 생략한 것은 아닐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는 복수의 어법과 관련 있지 않을까? 라삐 전통은, 인간이 본래 불완전하게 창조되어 하느님과 함께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하기에 ‘만들자’라는 복수 용법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만들자’의 주체는 하느님과 인간이며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하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보시니 좋았다’는 말씀의 생략은 인간의 책임과 소명에 대한 하느님의 염려를 반영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모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진술에 이어, ‘땅을 지배하고 뭇 생명들을 다스리라’(창세 1,28 참조)는 말씀이 인간에게 과제로 던져진다. 하느님의 모상과 인간의 다스림은 문맥상 깊은 관련을 지닌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보편적 다스림에 인간이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인간이 뭇 생명을 다스리는 방식은 초식(草食)으로 제한된다(창세 1,29 참조).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타자의 생명을 죽이지 않고 다스린다는 점에서 부드러운 지배를 의미한다(폴 보셩). 이는 인간이 뭇 생명을 만나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 안에 이 세상을 부드럽게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숨어 있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다스림
하느님께서는 영과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영이 태초의 물 위에 감도는 모습은(창세 1,2 참조), 유다인들의 성경 주석에서 어미 새가 새끼 위를 빙빙 도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듯 하느님의 영이 만물을 보듬는다. 보듬음은 생명의 원리요 생명을 기르는 방식이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서 마르둑이 반역적인 신들과 전쟁을 하고, 죽은 신의 시체에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폭력적 창조 과정과 전혀 다르다. 혼돈과 공허에 질서를 부여하고 무질서에서 질서와 생명을 이끌어 내는 원리는 전쟁이나 폭력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주에 조용히 울려 퍼지고, 조용한 울림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에 균형과 질서를 부여한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더불어 어둠과 빛이 갈마드는 하루가 탄생한다. 어둠은 하루에 통합되고 빛과 더불어 일상을 만드는 한 축이 되어 서로 다른 것들이 공존하며 다양성을 빚어 낸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다스림은 역사를 이끌어 가는 원리이기도 하다. 지혜 12,18은 가나안인들이 만행(지혜 12,3-5 참조)을 저지르는데도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아주 부드럽게 다스린다고(meta polles pheidous dioikeis) 말한다. 이 부드러운 다스림이야말로 하느님의 힘이다(지혜 12,18 참조). 하느님의 힘은 그분께서 만물을 소중히 여기시고(지혜 12,16 참조) 만물을 돌보시는 데에서(지혜 12,13 참조) 드러난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다스림은 말씀의 자기 조절 기능과 대화 방식으로 나타난다. 말씀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카오스적 힘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갖는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힘은 어둠과 밤의 존재를 용인하면서 창조주의 전능을 제한하고 조절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말씀에 의한 부드러운 다스림은 대화의 기본 구조를 지닌다. 대화는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를 참여시킨다. 반대로 폭력은 참여와 대화를 거부한다.
카인은 아벨을 죽일 때 아벨과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창세 4,8 참조). 카인이 아벨과 대화했다면 그를 죽일 수 있었을까?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카인과 끊임없이 대화하신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미리 경고하고 타이르시고, 카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는 카인에게 말을 건네며 그의 생명을 지켜 주신다. 이처럼 말씀에 의한 다스림은 부드럽다. 말씀이 사라질 때 폭력과 죽임이 판을 친다. 유다 서간(10-11절 참조)은 카인의 길을 따라 걸은 이들을 ‘지각이 없는 짐승(hos ta aloga zoa)’에 비유한다. 짐승은 소통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대화가 없는 인간은 짐승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안식
하느님께서는 하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참조). 이 쉼이 하던 일을 다 이루게 한다. 창조의 완성과 하느님의 쉼이 상응한다. 쉼이 없다면 창조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쉼(sabat)은 중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하던 일을 멈춰 당신의 창조 능력에 방점을 찍으셨다. 안식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창조 행위를 조절하고 스스로 한계를 긋는 행위이다. 안식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채우려는 의도를 포기하게 하고, 피조물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업적을 바탕으로 뭔가를 하고자(la asot) 쉬셨다(창세 2,3 참조). 뭔가의 주체와 대상은 무엇인가? 아마도 하느님의 안식은 인간에게 소명과 자율성이 주어지는 탁월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마르 2,27 참조)이 이 수수께끼 같은 본문의 해답이 아니겠는가?
고등학교 시절, 치열하게 문학을 추구한 친구의 시 제목이 떠오른다. “11월의 태양이 어미 닭의 체온으로 있을 때.”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생명이 땅에 떨어져 뒹구는 11월의 모습은 처연하다. 강함과 약함이, 생명과 죽음이 갈마드는 심연에서 새끼를 보듬으려는 어미 닭의 부드러운 날갯짓. 거기서 우리는 심연 위를 감도는 하느님의 영의 이미지를 보고(창세 1,2 참조), 멸망의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애절한 마음을 읽는다(마태 23,37-38; 루카 13,34-35 참조). 이처럼 부드러운 배려가 하느님의 모습이고, 그것은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뭇 생명을 만나는 방식이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대방동 성당 보좌를 역임한 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9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백운철 스테파노] 0 1,48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