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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22: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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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16 ㅣ No.718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22)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②


사춘기 거치며 유다교 신앙 버리고 학교 자퇴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고향인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 서부에 위치함).


생애 안에 담긴 강력한 메시지

성녀 에디트 슈타인에게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생애 안에서 중요한 메시지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은 지 7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녀의 생애에 대해 쓴 책만 200여 종이 넘습니다. 성녀가 죽고 나서 그분의 생애에 대해 매년 평균 세 종류의 책이 출판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녀의 사상만큼이나 그 사상이 잉태된 생애가 중요하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녀는 일생에 걸쳐 약 30권의 책을 쓴 학자였습니다. 매력적이면서도 거대한 미지의 영역이라고 할 만한 분입니다.

이러한 성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바탕이 되는 생애를 살펴보는 게 순서이지 싶습니다. 성녀의 생애는 크게 다음의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 1891~1902년: 유년기, ②1903~1921년: 철학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시기, ③ 1922~1933년: 가톨릭으로의 회심, ④ 1933~1942년: 가르멜 수녀로 살았던 시기.


브레슬라우의 유다인 가정 출생

에디트 슈타인은 1891년 10월 12일 브레슬라우라는 도시에서 지그프리드 슈타인과 아우구스테 슈타인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성녀의 부모인 지그프리드와 아우구스테는 1871년에 결혼해서 1881년까지 글라이비츠에 살았습니다. 거기서 지그프리드는 목재 사업을 했습니다. 부부는 그곳에서 7남매를 낳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루블리니츠로 이사했으며 성녀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목재와 석탄 사업을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부부는 이곳에서 다시 4남매를 낳았습니다.

1890년 지그프리드 부부는 사업을 확장하고 아이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브레슬라우로 이사하게 됩니다. 브레슬라우는 현재 폴란드 서부에 위치한 대도시로, 에디트가 살던 시절에는 독일 동부의 실레지아 주에 속했습니다. 독일이 2차 대전에 패망한 다음, 이 지역이 폴란드에 속하게 됐지만, 브레슬라우는 본래 1742년 평화조약을 통해 프로이센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독일의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입니다.

에디트 가족이 이사해 살던 시절, 이 도시는 산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곳이었습니다. 1891년 바로 이곳에서 12남매 중에 막내딸인 에디트 슈타인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유다인의 대표적인 축제 가운데 하나인 ‘욤 키푸르(Yom Kippur)’와 겹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녀의 어머니는 의미 깊은 날에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해서 에디트를 남달리 사랑했습니다.


홀어머니 아래 받은 유다식 교육

에디트 슈타인은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유다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에디트는 12남매(그 가운데 넷은 어려서 일찍 죽었습니다) 중에 막내였습니다. 그런 성녀에게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은 성녀 자신을 비롯해 성녀의 가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녀의 아버지는 성녀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이로 인해 어머니는 홀로 많은 자녀를 키우며 남편의 사업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성녀의 어머니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낯선 일에 뛰어들어 많은 수고를 하며 사업상 남편이 졌던 빚을 갚으며 동시에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녀의 어머니는 강인한 의지로 이 모든 난관을 잘 헤쳐나갔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굳센 모습은 어린 에디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훗날 에디트가 학자로서 여성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동기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고민

어린 시절 에디트는 지적 욕구가 상당히 강했습니다. 쉽게 말해, 에디트는 어린 시절부터 아주 총명했고 학교 공부도 아주 잘 따라갔습니다. 또한 그런 지적 능력은 단순히 학업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는 감수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에디트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지나쳐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반추해서 해답을 추구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에디트는 14살 때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면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삶에 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 많이 조숙한 아이였던 셈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인생에 대한 깊은 철학적 물음을 최소 이삼십 대는 되어야 묻기 시작하는데, 에디트는 사춘기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선 어느 날 갑자기 잘 따라가던 학교 공부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인생에 참된 의미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던 에디트에게 학교 공부는 무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디트는 어린 시절부터 믿고 실천해오던 유다교 신앙도 이때 버렸습니다.

결국 막내딸이 걱정된 어머니는 에디트를 함부르크에 사는 큰 언니 엘제의 집으로 보냈으며, 에디트는 이곳에서 다양한 체험과 더불어 깊은 실존적인 물음을 곱씹으며 인생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하기에 이릅니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6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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