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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희년의 창조론적 의미와 그리스도론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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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51

희년의 창조론적 의미와 그리스도론적 이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4년 11월 10일 교서 [제삼천년기]를 반포하였다.1) 이 교서에서 교황은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면서, 그 신학적인 의미(9-16항)를 설명하고 합당한 희년 준비를 위한 지침(17-55항)을 제시하였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창조 신학”2)에 바탕을 둔 구약의 희년과 “구약의 희년 전통 전체의 충만”3)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그리고 2000년 대희년의 의미다.

 

 

1. 희년의 구약성서적 근거

 

구약성서에 ‘희년’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학자들은 희년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요벨’(jobel)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데, ‘요벨’은 ‘양의 뿔’을 뜻한다.4) 희년이라는 말은 화해의 날을 알리기 위해 불었던 이 악기에서 유래된 듯하다. 

 

희년의 원천을 구약성서에서 찾으려 할 때 일반적으로 레위기 25장과 27,16-25이 거론된다. 이에 따르면 매 일곱 번째 해는 주님께 속한(레위 25,4) 해로서, 안식년이다(레위 25,1-8.11). 레위 25,8-12에 따르면 일곱 번째 안식년, 곧 50년이 되는 해에는 희년이 선포되어야 한다. 49년과 지난 희년을 합치면 50년이 된다. 희년은 모든 백성에게 해방을 의미한다. 레위기 25,10은 빚의 탕감과 매입한 땅의 환원을 요구한다. 

 

레위기 25장의 짜임새를 보면, 법의 무게는 소유지에 대한 권한에 실려 있다. 근본 규정(23a)에 따르면 ‘땅’은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매각할 수 없다. “사실상 모든 창조와 특히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드높은 주권’(dominium altum)은 오로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이 공통된 확신이었습니다.”5) 이렇게 땅의 환원과 노예 해방 그리고 빚의 탕감이라는 희년의 규정들 밑바탕에는 유다교의 종교적 인식, 곧 창조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 25-35절에는 일시적으로 타인에게 “넘겨주었던” 땅에 대한 해약 규정이 따라온다. 이자 금지령(35-38절)에 이어 39-55절에는 채무 노예 해방에 대한 규정이 언급된다. 노예의 해방(40절)은 ‘환향’을 전제로 한다. 그에 비해 출애 21,2에 따르면 모든 종은 매 일곱째 되는 해에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희년 규정이 실행되었는지는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6) “희년의 규정들은 대부분 이상으로서, 현실적 사실보다는 희망으로 머물렀습니다.”7)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희년의 의미다. 희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빚의 탕감과 인간 권리의 회복 그리고 노예 해방을 의미한다. 곧 희년의 핵심은 “자유롭게 되어야 할 모든 주민의 전적인 ‘해방’”8)에 있다. 인류 공동체의 차원에서 희년은 “평등성의 회복”과 “사회 정의의 회복”을 의미한다.9)

 

 

2. [제삼천년기]에 대한 신학적 고찰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성서에 나타난 ‘희년’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제삼천년기]는 희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10) 

 

[제삼천년기]는 9-16항에서 희년의 의미와 내용을 설명하면서 희년의 핵심적인 의미를 '시간의 충만'에서 찾는다(9-10항). 그리고 ‘시간의 충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으로 시간은 하느님께서 육화 안에서 인류의 역사 속으로 내려오셨다는 바로 그 사실로써 충만에 이르렀습니다”(9항). 하느님 아들의 육화가 영원과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곧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창조 때에 시작된 인간적 시간”(9항)이 충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간의 충만’이란 영원을 의미한다. “‘시간의 충만’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시간의 끝에 도달하여 하느님의 영원 안에서 시간의 충만을 찾고자 그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9항). 

 

교서는 이렇게 9항에서 하느님과 인류의 역사를 영원과 시간으로 대비시키고, 그리스도의 육화를 영원과 시간이 만나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론적으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성과 인성이 만난다. 바로 이러한 기본 이해에서 10항의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주님”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사실을 교회는 부활 성야 전례 때 초 축복에서 고백한다.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시작이요, 마침이요,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대도 세기도 주님의 것이오니, 영광과 통치권을 영원 무궁히 주님께서 차지하시나이다.” 시간이 완성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시간론이 이어진다. “육화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은 스스로 영원한 분이신 하느님의 차원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마지막 날들’(히브 1,2), ‘마지막 시간’(1요한 2,18)이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지속될 교회의 시간이 시작됩니다”(10항). 

 

교서가 희년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 이해로서의 시간 이해를 그리스도론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해서 은총의 해가 실현되었다는 설명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희년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할 때, 100년, 50년, 25년마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희년을 마치 시간의 길흉으로 오해할 소지도 해소될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서 ‘은총의 시간’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시간’, ‘때’가 바로 ‘은총의 시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희년 이해를 위해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시간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적 시간이 충만해진 것인가(9-10항 참조), 아니면 ‘때’가 차서(충만해져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인가? 희년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결과의 차이는 지대하다. 우리가 여기서 이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제삼천년기]도 이러한 희년의 개념 차이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9-11항에서 교서는 시간의 충만과 은총의 해를 차츰 더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명한다. 9항에서는 단지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해 시간이 충만에 이르렀다고 언급되고, 10항에서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주님이시라고 설명되는가 하면, 11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년의 주체로 이해됨으로써 희년 이해의 그리스도 중심론이 절정에 이른다. ‘때’가 되어서 희년이 돌아온 것이 아니다. “희년은 단지 때마다 돌아오는 주년의 반복이 아닙니다”(11항).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희년 이해와는 달리 교서는 14-15항에서 희년을 때마다 돌아오는 주년으로 이해하는 인상을 준다. 물론 교서는 14항에서 교회의 희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교회에 있어서 희년은 정확히 이 ‘주님의 은총의 해’이며, 죄와 그에 따르는 벌을 사해 주는 용서의 해, 상반된 집단 사이의 화해의 해, 다양한 회개와 성사적, 성사 외적 참회의 해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희년은 100년, 50년 그리고 25년을 주기로 육화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특별한 해다. 이런 의미에서 교서는 특별한 날을 경축하는 ‘기념일’을 개인 차원에서의 희년으로 설명한다(15항).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 탄생 후 2000년은 … 특별한 대희년이 됩니다.”라고 교서는 설명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시간의 척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 대희년은 여느 다른 희년과는 다르며 그보다 의미가 더욱 큽니다. 교회는 시간의 척도, 곧 시, 일, 연, 세기의 척도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시간의 척도가 각기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구원 활동 안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누구나 깨닫도록 도우면서 모든 개인과 함께 나아갑니다”(16항). 

 

9-11항에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간’이 ‘충만’에 이르렀다고, 곧 인간적 시간 내지 인류 역사가 기쁨과 환희의 시간으로 변했다고 이해되는 반면, 14-16항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발생한 ‘시간’의 100, 50, 25주년이 희년으로 이해된다. 왜 주기가 이렇게 중요해지는가? 한편으로는 희년은 때마다 돌아오는 주년의 반복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11항), 다른 한편으로는 희년은 때마다 돌아오는 주년의 반복으로 설명하는가?(15-16항) 어디에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있는가? 그 원인을 이해할 때 우리는 2000년 대희년이 단순한 ‘기념 행사’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은 교서가 희년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희년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할 때, 위에서 언급한 강점도 있지만, 한계도 있다. [제삼천년기]는 인간의 시간이 하느님 아들의 육화로 충만에 이르렀고,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만 인간의 시간은 기쁨의 시간으로 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신학에 따르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따라 좌우된다. 시간이 완성에 이르는 것, 기쁨으로 변하는 것도 오직 그분의 인격에 의해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류 역사라는 인간적 시간에서 떠나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신 후”의 시간, 곧 ‘교회의 시간’ 내에서 희년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함으로써 가능하다. 구약 시대의 희년이 “자유롭게 되어야 할 모든 주민들의 전적인 해방”(12항)과 “모든 이스라엘 자녀들 사이에 평등성을 회복시키는 것”(13항)을 의미했다면, 교회의 시간 안에서 희년은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그리고 부활의 기념을 의미한다(14항). 다시 말해서 구약 희년의 핵심이 인간의 전적인 해방, 곧 ‘구원’에 있다면, 교회 희년의 초점은 그 구원을 가능하게 하신 구원자,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리고 2000년 대희년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것이다. 이렇게 희년을 그리스도론적으로만 이해할 때 2000년 대희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의미만 부각된다. 대희년이 여느 다른 희년과 다르고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단지 새로운 천년기라는 ‘시간의 척도’ 때문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다양한 기념일들을 거행한다. 그 중에서도 후대 사람들에게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들이 탄생, 사망한 후 100년 또는 200년이 되는 해를 특별히 기념하면서 그 인물의 업적과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좋은 관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0년 대희년을 이러한 관점에서만 이해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지 2000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기 때문에 주님의 은총, 곧 조건 없는 용서와 전적인 해방이 특별히 주어지는 것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2000년 대희년이 인류 역사에 생존했던 어떤 한 인물의 탄생이 아니라,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탄생을 특별히 기념하는 것이라면, 대희년의 구원론적 의미가 부각되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대희년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탄생을 해마다 전례적으로 기념하는 ‘성탄 대축일’의 확대인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희년과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의 관계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장에서 희년과 구원의 신학적 관계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3. 희년과 구원

 

희년은 잘못으로 인한 빚 때문에 삶의 터전인 ‘땅’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권리와 자유까지 잃고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에게 그 권리와 자유 그리고 삶의 터전을 되돌려 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규정이다. 다시 말해서 교서가 정확하게 설명하듯이, 희년은 “자유롭게 되어야 할 모든 주민들의 전적인 해방”이다.11) 희년은 “재산을 잃고 인격적 자유마저 상실한” 사람들에게 바로 그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주는 ‘평등성 회복’이기도 하다.12) 한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터전과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그 터전과 권리를 되돌려 주는 것은 문자 그대로 ‘구원’이요 ‘해방’이며, 따라서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이 희년의 근거는 교서가 13항에서 언급하듯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하느님께 속한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창조 신학이다. 

 

물론 희년의 규정들이 대부분 실현되지 않고 “현실적 사실보다는 희망으로” 머물렀지만, 이 희망은 예언자들에게서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가능한 ‘구원의 희망’으로 나타난다.13) 그리고 바빌론 유배 이후의 예언서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머지않아 해방시키실 것이라는 기대를 보여 준다. 죄에 대한 심판이 가까워졌고, 새로운 구원의 때가 임박했다는 것이다.14) 묵시 문학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의 구원이 이 세상과 역사에서는 가능하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이 ‘시대’(Aon)는 종말을 고하고 현세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이 두드러진다.15) 이러한 종말과 구원에 대한 기대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다. 그리고 이 복음은 구원의 복음이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병자의 치유와 죄의 용서를 통해서 보여 주신다. 그분은 당시 사회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소외되었던 사람들, 곧 세리, 창녀, 죄인들의 '죄'(빚, 짐)를 조건 없이 용서하여 주신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되찾아 주신다. 바로 이 용서가 그들에게는 해방이요 구원이며, 따라서 기쁨이다. 그리고 조건 없는 용서이기에 ‘은총’이다.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인격 둘레에서 해방과 자유를 직접 체험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세주 그리스도이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구약으로부터(예언자들) 예고된(약속된) 메시아시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는데, 이 확신에 도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모습이다. 여기서 죄는 단순히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전인적인 의미이다. 자신이 저지른 다양한 형태의 잘못과 운명적인 불행 때문에 한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잃어 버려 병든 사람들에게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제자들은 고대하던 메시아를 보았던 것이다. 죄의 용서는 곧 병의 치유요(마르 2,1-12 병행), 존엄한 인간성의 회복이며(루가 15,11-32), 빚의 탕감이다(마태 18,23-35). 예수님은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알리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제자들은 그분에게서 세상 종말에 이스라엘을 죄의 질곡에서 해방시키러 오실 구세주, 메시아를 보았음이 분명하다. 특히 죄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 기본권을 잃은 사람들의 죄(빚)를 조건 없이 탕감해 주시는 모습에서 루가 복음 사가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약속된 ‘주님의 은총의 해’가 실현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가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전하는 첫머리에 예수님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주님의 영이 나에게 내리셨으니, 과연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도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로다.”16) 마르코와 마태오가 예수님의 본질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메시아로 묘사하는 데 비해(마르 1,15; 마태 4,17 참조), 루가는 예수님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약속된, ‘은총의 해’를 선포하시는 메시아로 증언한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은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 이 신학적 인식 뒤에는 인간적 노력이 모두 실패한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 하느님께서 세상 종말에 당신의 메시아를 보내시어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하실 것이며, 그 종말이 임박했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곧 구원 또는 해방을 미래로 유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장 큰 가르침은 그 구원이, 용서와 해방이 미래의 어느 날에 그리고 어떤 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늘”17) 바로 여기서, 그것도 인간 상호간의 용서로써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믿는 이들에게는 복음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최대의 스캔들이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다고 여겼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는 하느님 모독이었다(마르 2,7; 마태 9,3; 루가 5,21; 7,49). 죄의 조건 없는 용서 - 이것은 죄인들에게 해방이요 구원이며 은총이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종교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이것 때문에 예수님을 하느님 모독 죄로 처형했고, 예수님을 믿고 따른 제자들은 그분을 메시아라고 확신했고, 그분에게서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구원’이 실현되었다고 보았다. 신학 용어로는 이것을 “종말론적 선취”18)라고 한다. 

 

루가 복음 사가가 예수님의 입을 통해 ‘은총의 해’, ‘희년’이 선포되었다고 증언할 때, 이 희년은 곧 죄의 용서, 구속에서 해방,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의미한다. 세리, 창녀, 죄인들은 예수라는 인격 둘레에서 이 ‘전적인 해방’을 직접 체험한다. 신약의 희년 역시 ‘빚 탕감’, ‘해방’, ‘자유’, ‘권리 회복’, ‘존엄성과 평등성 회복’을 의미한다. 곧 이런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가 곧 ‘희년’이다. 이렇게 구원과 희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구원은 … 나 스스로가 받아들여졌음을 체험하고 그리하여 다른 이들도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구원은 내가 그분에게 인정받고, 끝없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는 체험이다. 이러한 신앙 체험 없이 ‘주님께 평안한 해, 인류에게 은총의 해, 곧 희년’의 의미는 파악되지 않는다.”19)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이 구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분은 바로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의 관심과 제자들의 관심 사이의 자연스런 변화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 변화를 이해해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로서의 희년에서 그리스도 탄생의 기념으로서의 희년이라는 희년의 의미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관심은 죄의 용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최대 관심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권과 존엄성 그리고 평등성을 잃고 인간 대접은커녕 고통과 불행의 질곡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짐을 덜어 주고, 속박을 풀어 주어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존엄성을 되찾아 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구원”보다 더 위대한 것이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하시는 분은 누구이신가? 제자들의 관심은 스승의 가르침과 구원 행업에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으로 옮겨 간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그분의 본질로 옮겨 가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다. “예수님께서 어떠하셨는가?”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으로 제자들의 관심은 흐른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확신에 도달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 곧 죄의 조건 없는 용서와 은총으로 빚 탕감을 선포하셨는데, 제자들의 복음 선포 내용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 복음의 내용이 된다. 곧 제자들의 관심은 죄의 용서, 구원, 인간성 회복과 같은 예수님의 관심사보다 예수님 자신에게 집중된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 구원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고 실현된다는 그리스도론이 전개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탄생 후 2000년이 되는 해를 교회가 ‘대희년’으로 제정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론적인 희년 이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희년을 그리스도론적으로만 이해하면 2000년 대희년은 특별한 ‘탄생 기념일’로 의미가 축소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희년의 본래 의미가 선명하게 부각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의미는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였던 죄의 조건 없는 용서를 통한 인간의 구원이다.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를 희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의 관심사에서 희년의 의미를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희년이 단지 그리스도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희년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기념 행사로 끝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년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곧 은총으로 인간이 죄와 죄로 인한 속박과 병으로부터 해방되는 바로 그때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20) 

 

죄의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통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다. 희년의 내용인 자유와 해방, 이해와 용서, 자비와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 인간의 삶에서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 매 순간은 ‘은총의 시간’이요, ‘해방의 시간’이다. 용서가 이루어질 때,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은총이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해방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희년의 수직적인 면(신학적 차원)뿐 아니라, 수평적인 면(인간학적 차원)도 동시에 중시해야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이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인간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용서 없이 하느님의 용서를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진정한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 주신 것도 바로 당신 자신을 통한 죄의 용서와 자비다. 예수님께서 은총의 해를 선포하신 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예수님을 만나는 죄인들은 실제로 죄의 용서를 경험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며 명하신다.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말하며 선포하시오. 병든 이들은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은 일으키며 나병 환자들은 깨끗이 해 주고 귀신들은 쫓아내시오”(마태 10,7-8). 치유와 용서로써 해방되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은총의 시간이며 기쁨의 시간이다. 100년, 50년, 25년의 주기가 되어야 돌아오는 은총의 해가 아니다. 희년은 항상 매 순간 이루어질 수 있는 구원과 해방, 은총과 기쁨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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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바오로 2세 교서, [제삼천년기], 심상태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2) 위의 책, 13항 참조. 

3) 위의 책, 12항. 

4) A. Meinhold, “Jubeljahr I”, in : TRE(Theologische Realenzyklopadie) 17, 280. 

5) [제삼천년기], 13항. 

6) 위의 책, 13항; R. North, “Jobeljahr”, in:LTHK 5, 980. 

7) [제삼천년기], 13항. 

8) 위의 책, 12항. 

9) 위의 책, 13항. 

10) [제삼천년기]의 가르침에 대한 신학적 해설로서 다음 글을 추천할 만하다 : 심상태, [[제삼천년기]와 한국 교회의 ‘새 복음화’], 한국 그리스도 사상 연구소, 1998, 16-62면. 그 중에서도 우리는 특히 2000년 대희년의 의미에 대한 해설(25-36면)에 주목한다. 

11) [제삼천년기], 12항. 

12) 위의 책, 13항. 

13) M. Kehl, Eschatologie, Wurzburg, 1988, 109-110면 참조. 

14) 위의 책, 111면 참조. 

15) 위의 책, 120면 참조. 

16) 루가 4,18-19; 이 글에 나오는 성서 구절은 [200주년 신약성서]에서 인용했다. 

17) 신교선, [루가가 전하는 예수], 생활성서사, 1996, 92-94면 참조. 저자는 ‘희년의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오늘’의 의미에 대해서 설득력 있고 집약적으로 묘사한다. “‘오늘’이란 표현은 우선 예수 탄생에서 구현된다(2,11). 나아가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그 손아귀에서 풀려날 때(4,33-37), 나병 환자가 깨끗이 나을 때(5,12-16), 눈먼 이들과 가난한 이들, 불구자들과 절름발이들이 식탁에 초대받을 때(14,13-2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 때(5,1; 15,1-7.8-10),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15,11-24) 죄인들이 회개할 때 ‘오늘’이 구현된다”(92면 이하). “이 ‘오늘’이 현실로 체험되는 곳에서 희년이 구현된다”(93면). 

18) W. Pannenberg, “Stellungnahme zur Diskussion”, in : J. M. Robinson, J. B. Cobb, Theologie als Geschichte, Zurich 1967, 331-339. 

19) 신교선, 앞의 책, 93-94면. 

20) ‘죄’와 ‘병’ 그리고 ‘용서’와 ‘해방’이 실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우리가 삶에서 그런 것들을 어떻게 체험하는지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음을 밝혀 둔다.

 

[사목, 1999년 1월호, 이성우(수원 가톨릭 대학교 교수, 신부, 교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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