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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교회: 캄보디아 교회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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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4 ㅣ No.140

[세계 교회 동향] 캄보디아 교회 : 캄보디아 교회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전세계에서 국기에 건축물이 들어있는 국가는 캄보디아가 유일하다. 지금은 비록 세계적으로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지만 대표적인 문화유적인 ‘앙코르와트’의 형상을 국기 한 가운데에 넣음으로써, 9-12세기경 인도차이나 전역을 지배하며 전성기를 누렸던 ‘크메르’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캄보디아’라는 국명은 영어 표기일 뿐, 이곳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을 예전 전성기였던 ‘크메르 왕국’에서 연유하는 ‘크메르인’이라고 부르며, 언어도 ‘크메르어’라고 한다. 면적은 남한의 약 1.8배이며,  한반도 전체 면적보다 약간 작다.

 

나라 전체가 거의 평지로, 내전에 휩싸이기 전까지는 세계적인 곡창지대였다. 그러나 현재는 전쟁과 내전의 후유증(많은 지뢰와 저수시설의 미비 등)으로 전체 농토 가운데 불과 18% 정도만 사용 가능한 안타까운 실정이다. 소승불교가 국교인 이곳은 전체 인구의 95%가 불교 신자이고, 나머지 종교는 5%에 불과한 소수 종교일 뿐이다.

 

 

캄보디아화가 아닌 베트남화

 

이곳의 가톨릭교회 역사는 한국보다 더 오래되었다. 1555년에 포르투갈 도미니코회 소속의 가스파르 다 크루스(Gaspar  da  Cruz)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처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7, 18세기에 걸친 인접국 태국과 베트남의 계속된 침공으로 종교 역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캄보디아는 두 나라의 계속된 침공에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보호받기를 원했고, 그 결과 1863년부터 1953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었다. 이를 통해 가톨릭교회 역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캄보디아보다 베트남을 먼저 식민지화했던 프랑스는 많은 베트남 신자들이 캄보디아로 이주하는 것에 찬성했으며, 교회 안의 전례, 언어 등 모든 것이 ‘캄보디아화’가 아닌 ‘베트남화’되었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인들의 눈에 가톨릭은 낯선 종교로 비칠 수밖에 없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현재 몇 곳을 제외하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 대부분이 베트남계이다. 비록 법적 책임자는 캄보디아인을 세우고 있다 하더라도 공동체 내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그들의 발언권은 아주 적다. - 약 2만 명의 가톨릭 신자 가운데 70% 정도가 베트남계 신자들이고, 캄보디아계 신자는 5-6천 명에 불과하다. - 그래서 교회 안에서 베트남계와 캄보디아계의 화합을 이루어가는 것이 사목자들이 항상 주의해야 할 점이다.

 

 

크메르 루즈의 박해와 베트남 통치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교회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크메르 루즈’의 공산치하에서 말살되다시피 했다. 방인 주교와 신부, 수녀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그때 얻은 병으로 죽었고, 서양식으로 지은 성당은 모두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 이 기간에 종교박해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미쳐 불교 승려 2만여 명이 몰살당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회교 사원은 돼지우리로 사용되었는데 그 덕에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곧이어 이후 10년간(1979-1989년)은 베트남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기간에 캄보디아인과 베트남인들은 서로 앙숙이 되어갔다. 이때는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도 금지되었다. 1990년에야 비로소 선교사들이 재입국할 수 있게 되었고, 전례의 ‘캄보디아화’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구성원들은 현재까지도 역시 외국계(거의 대부분이 베트남계)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제 갓 싹을 틔운 캄보디아 교회

 

캄보디아 교회에는 한 개의 교구(프놈펜)와 두 개의 사목대리구(바탐방, 꼼뽕짬)로 나누어져 있는데, 캄보디아에 파견된 전체 50여 명의 선교사제들 가운데 세 개 교구에 약 10명 정도씩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고, 나머지 20명 정도는 수도 프놈펜에서 엔지오(N.G.O.) 활동을 하고 있다.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엔지오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교육, 의료 등 기초생활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아주 열악한 여건 속에서 지내는 빈민들이 많은 까닭이다.

 

2001년 3월부터 이곳에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한 한국외방선교회 소속의 신부 5명 가운데 2명 역시 엔지오 활동(교육받지 못한 청소년들의 생업을 돕는 기술교육 분야)에 매진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직자, 수도자들 가운데 방인 신부는 6명(2001년 6월 10일 4명의 방인 신학생들이 사제품을 받았다.), 방인 수녀는 3명뿐이고 몇 명의 신학생이 있을 뿐이니, 캄보디아 교회는 이제 갓 싹을 틔운, 그래서 세계의 다른 교회들로부터 여러 방면에서 많은 보살핌이 필요한 아주 어린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토착화를 위한 노력

 

캄보디아 교회는 나름대로 교회 토착화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전례 용어, 전례 내용과 형식 등 모든 분야에 ‘크메르어’를 사용하고 ‘크메르 불교문화’와 접속하고자 힘을 쏟고 있으며, 성당 건축 양식도 서양식보다는 크메르 양식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가 국교인 이 나라에서 개종을 쉽게 할 경우 냉담 역시 쉽게 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신자 수 증가에 급급하지 않고 예비신자 교육기간을 3년으로 길게 하여 본인들이 깊게 숙고한 뒤에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곳의 적지 않은 개신교 사목자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경향이 커서 적지 않은 종교와 문화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하여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점을 잘 모르는 이곳 사람들에게 모두 같은 ‘예수교’로, 자신들의 문화에 부정적인 종교로 보이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예수 믿으면 부모가 돌아가셔도 울면 안되고, 제사도 지낼 수 없다면서요?”가 이곳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 쉽게 듣는 질문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이런 여러 가지 악조건들과 많은 것이 부족해서 도움이 절실한 교회이지만, 캄보디아 교회는 아직까지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이다. 그러기에 외적인 규모와 신자 수는 적을지언정 ‘교회 구성원들의 순박함과 서로 나누는 모습들이 충만한 교회’이며, 빈자들을 위한 사회적 활동이 많은 교회이고, 그런 나눔들이 이곳의 어려운 사회의 구성원들을 향해 더욱 확장되어야 할 교회이다.

 

또한 교회의 미래를 위해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지원(학비 지원, 기숙사 운영 등)에도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실제로 많은 곳의 교회 공동체들이 유아원, 유치원, 학교 등을 운영하며 지역의 빈민들의 어려움에 동참하고 있으며, 필자가 사목하고 있는 두 곳에도 각각 빈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와 ‘무료 기숙사’가 한국 교우들의 꾸준한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른 선교지와 달리 특이한 점도 있다. 인도차이나 지역의 국가들 가운데 그나마 종교의 자유가 제일 많이 보장된 곳이기에 각 나라의 많은 선교단체들이 이곳에 파견되어 일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그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기에, 이곳 교구 책임자들은 각 교구의 사목방향 등을 고려해서 지원 단체들을 골라서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점은 이곳 교구 책임자들에게는 어려운 여건에서 일하면서도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이 아닐까.

 

* 박서필 사도 요한 - 한국외방선교회 신부. 대만, 뉴질랜드에서 사목하였으며, 현재 한국외방선교회 캄보디아 지부장이자 스떵뜨렝과 라타나끼리 본당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2월호, 박서필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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