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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가짜 뉴스 그리고 평화를 위한 언론: 평화를 위한 가톨릭 언론의 역할과 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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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돋보기 - 가짜 뉴스 그리고 평화를 위한 언론] 평화를 위한 가톨릭 언론의 역할과 사명
평화를 향한 미디어 윤리
현대 사회는 미디어를 통해 매개되는 사회이다. 현실은 늘 미디어의 해석을 통해 존재한다. ‘현실’이나 ‘사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전해 주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써 놓고 다시 봐도 이 말은 참 충격적이다. 미디어가 제대로 알려 주었다면 나 또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고, 미디어가 엉터리로 알려 주었다면 엉터리로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해 ‘ㄱ’이라는 사람이 이러이러한 말을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ㄱ’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단다. 문제는, 미디어가 현실을 제대로 알려 주었는지 엉터리로 알려 주었는지 확인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세상을 보여 주는 미디어의 창(窓)에 빨간 색지가 붙었는지 노란 색지가 붙었는지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세상, 곧 내가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아니 내 머릿속에 든 세상에 대한 내 인상은 참에 가까운 것인지 오류에 가까운 것인지 혼란스럽다. 미디어가 늘 정확하고 균형 있게, 언제나 올바로 사실을 전해 준다면 ‘미디어를 통해 매개되는’ 현대 사회는 축복 받은 사회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미디어는 우리 머릿속에 세상에 대한 다양한 그림을 새겨 넣는다. 그 대상은 광범위하다. 어떤 인물에 대한 인상에서부터 어떤 국가나 사회 조직과 제도, 나아가 어떤 계층 또는 문화나 종교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필수적인 요소에 대한 강력한 첫 이미지와 선입견은 대체로 미디어로 말미암아 형성된 경우가 많다.
한편, 미디어로 채색된 색을 실제의 색으로 오해하게 된 많은 사람이, 사실이 아닌 ‘유사 사실’에 기초해 논쟁을 벌인다. 불확실한 전제와 사실이 아닌 논거에서 출발한 논쟁이 건전한 대화나 의견의 교환일 수 없다. 여기서 불화와 오해, 그리고 반목, 곧 평화에 반대되는 수많은 현상이 잉태된다.
그래서 미디어는 그 어떤 제도보다 강력한 윤리적 토대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객관적인 시각과 신뢰할 수 있는 원천을 기반으로, 무엇보다 공익과 평화를 추구하는 최상의 윤리적 감각이 요구되는 분야가 바로 미디어다. 이러한 윤리적 각성이 결여된 미디어는 그 자체로 혼돈과 불화의 원인이다.
평화, 홍보 주일 담화문의 주제어
평화를 지향하는 가톨릭교회는 미디어의 참모습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의견을 표명해 왔다. 무엇보다도 ‘평화’와 관련된 교회 내 언론 기관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역설해 왔다. 대표적인 메시지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1987년에 발표한 제21차 홍보 주일 담화문이다.
미디어와 관련해 교회가 발표한 수많은 메시지 가운데, 해마다 홍보 주일을 맞이하여 발표하는 교황님의 ‘홍보 주일 담화문’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하다.
먼저, 홍보 주일 담화문은 해마다 발표되기 때문에 신앙생활과 미디어와 관련된 민감하고도 시의 적절한 주제를 다룰 수 있다.
나아가 다른 교회 문헌에 비해 분량이 그다지 길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다. 사실 미디어와 관련해서 교회가 발표한 수많은 문헌과 메시지는 교회 내에서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 언론학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쉽게 발견하기 힘든 보물과도 같은 통찰이 담긴 문헌이라 할 수 있다.
2018년 홍보 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발표한 문헌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시의 적절하게도 2018년 제52차 홍보 주일 담화문은 ‘가짜 뉴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해 주고 있으며, 가짜 뉴스의 실체와 폐해에 대한 지적을 통해 평화를 지향해야 할 언론의 사명을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제52차 홍보 주일 담화 ‘가짜 뉴스와 평화를 위한 언론’
담화문은 먼저 인간이 가진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그 자체로 인간의 특별한 지위와 역량을 표현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간과 세상, 그리고 구원에 관한 교회의 낙관주의는 인간이 보여 주는 많은 능력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그릇되게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또한 인간이며, 이는 카인과 아벨, 바벨탑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진실을 교묘히 왜곡하는 수단, 곧 자만심과 이기심에 빠진 왜곡된 인간 본성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악용되는 것이다.
왜곡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현대 사회에서 특이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가짜 뉴스이다. 문헌에 따르면, 가짜 뉴스는 독자를 기만하고 조종하며 특정의 목적을 부당한 방식으로 관철시키고자 마련된 술책이다.
특이하게도, 가짜 뉴스의 본성은 진짜 뉴스를 흉내 내는 데 있다. 가짜 뉴스는 사회적 편견, 불안이나 분노, 좌절 등 인간의 직접적인 감정에 호소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짜 뉴스는 사뭇 세련된 표현과 정교한 심리 기제를 활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짜 뉴스는 “인간 존재에게서 쉽게 불타오르는 채울 수 없는 탐욕을 공략”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가짜 뉴스는 특정의 상황에서 더욱 맹렬히 퍼져 나간다. 그 상황이란 다른 출처의 정보와 건전한 의견의 대립이 부재한 상황, 고립된 소통 상황이다. 그 결과 “타인을 불신하게 만들고, 타인을 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마침내 타인을 악으로 여기게 하고 분쟁을 조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곧 “교만과 증오의 확산”이며 “자신을 위장하고 물어뜯으려는 뱀의 술책”이 현대의 미디어 환경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짜 뉴스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보호할 수 있을까? 여기서 담화문은 진리를 통한 정화를 말한다. 여기서의 진리는 개념적인 실재라기보다는 참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곧 진리이신 예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서 비롯된 ‘신뢰와 참됨, 화합’을 통해 확장된 ‘타인과의 진실한 관계’로 무장하는 것이 가짜 뉴스에 대한 해독제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 기초한 신뢰와 참됨과 화합으로 무장한 사람은 분열을 조장하는 거짓 술책으로부터 어떤 이상 기운을 감지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담화문은 또한 가짜 뉴스를 분쇄하려는 언론인의 역할에 대해 말한다. 언론인은 타인에게 정보를 전하는 사람이며, 이는 곧 언론인이 타인의 삶에 관여함으로써 타인을 양성하는 데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언론인은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다.
사명감을 지닌 언론인은 경청하는 사람들이며, 성실하게 대화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올바른 과정을 통해 사실을 보도하며, 이해를 증진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다.
언론인의 사명은 또한 ‘원인을 규명하는 데에’ 있으며 이를 통해 비난과 언어폭력에 대한 대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 제52차 홍보 주일 담화문의 결론은, 진리를 통해 가짜 뉴스로부터 우리를 스스로 보호하고, 언론인의 사명감을 언론인 스스로 자각할 때 공동선과 신뢰와 친교가 가능하며, 이것의 귀결로서 우리는 ‘평화의 증진’을 이룰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언론인이 쥐고 있는 평화의 열쇠와 개인
이와 같이 살펴본 ‘미디어로 매개되는 현대 사회’와 제52차 홍보 주일 담화문의 내용을 통해 평화를 위한 가톨릭 언론인의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다. 과연, 평화 실현을 위해 가톨릭 언론인은 평화 행진이라도 벌여야 하는 걸까?
교회의 미디어관에 따르면, 평화 실현의 열쇠는 평화와 정보의 관계를 올바로 파악하는 데에 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제21차 홍보 주일 담화문 참조). 평화는 신뢰를 통해 가능하며, 신뢰는 대화를 통해 증진된다.
그렇다면 신뢰의 열매를 맺는 바람직한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여기서 교회는 정확한 정보가 서로에게 불균형 없이 충실히 전달된 상태에서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언론인은, 신뢰할만한 출처로부터 구성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참된 대화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평화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평화를 향한 징검다리는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놓이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언론인들은 평화를 향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론 기관이 행사할 수 있는 큰 힘 가운데 하나는 사건을 감지하여 어떤 관점을 기초로 그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이를 통해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전통적으로는 여론을 형성시키는 기관이 곧 언론 기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한가? 반쯤 유효하다. 전통적인 언론 기관의 힘이 반이나 깎여 나간 것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대변되는 그 힘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생생한 ‘사회 관계망 서비스’(이하 SNS) 때문이다. 이제 여론은 어떤 체계를 지닌 기관뿐만 아니라 SNS라는 굉장한 무기를 지닌 세상에서 누구라도 형성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SNS의 시대에는 모든 목격자가 곧 여론 형성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바로 이 사실로 말미암아 교회 언론 기관에 새로운 역할이 추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상상할 수 없던 지점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속도와 주제로부터 형성되는 여론, 다시 말해서 SNS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여론의 신뢰성과 정확성을 검증하는 일이다.
‘개인’의 편향된 시선과 부정확한 사실 이해가 순식간에 ‘대중’의 시선과 관점으로 돌변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형성된 대중의 불덩이 같은 공통의 의견이 한 사회의 건전한 관계 형성과 신뢰, 나아가 응당 존재할 수 있었던 평화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여론 형성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목격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시대에 ‘교회 언론 기관의 역할’을 묻는 것에는 교묘한 함정이 숨어 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개인의 머릿속에서, 사실은 그 자신이 곧 ‘교회의 언론 기관’이란 사실을 잠시 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교회 내 언론 기관’과 ‘이를 수용하는 개인들’의 분할 구도는 너무도 달라졌다. 개인의 목소리가 곧 여론이 될 수 있는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이제 신자 개인이 곧 작은 ‘교회 내 언론 기관’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이 곧 교회 언론 기관의 존재 이유가 흐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회의 공식 언론 기관에는 더욱 새로운 역할이 추가된 것이며, 소리를 낼 수 있는 개인에게도 신뢰할 수 있는 출처로부터 정확한 사실을 말해야 할 윤리적 책임이 부가된 것이다. 신자 개인이 곧 교회 언론의 중요한 창구이다. 신자 개인이 곧 가톨릭 언론인이다. 그 개인에게 부과된 평화를 위한 윤리적 책임을 잊지 말자.
* 성기헌 바오로 - 서울대교구 신부. 미국 위스콘신-메디슨대학교에서 종교와 미디어의 관계를 연구하여 신문방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인문사회의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성기헌 바오로] 0 1,85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