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ㅣ사회윤리
[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루아흐, 다바르, 자연 |
---|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루아흐, 다바르, 자연
루아흐와 다바르
하느님께서 세상과 소통하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루아흐’와 ‘다바르’(말씀)가 그것이다. 루아흐는 참으로 신묘하다. 공기가 크게 움직이면 바람이 되고, 공기가 인간 안에 들어오면 숨이 되고, 공기가 인간의 내면과 교감하면 정서적으로 체험된다. 나아가 하느님의 루아흐는 공기를 비유 삼아 이루어진 유비적 표현이면서도 대기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루아흐가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이어 주는 소통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야훼(Yahweh)’ 라는 하느님의 이름과도 연관된다. 야훼라는 이름의 어원은 be동사인 하야(hayah)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탈출 3,14에 근거해서 야훼는 ‘있는 분’을 의미하거나 ‘있게 하시는 분’, 곧 창조주를 의미한다. 그러나 야훼라는 이름의 최초 의미는 ‘바람이 불다’를 의미하는 동사의 어근 h-w-y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라는 이름은 ‘바람을 일으키는 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탈출 19,16-18에서처럼 야훼의 신현(神現)이 폭풍과 같은 기상 현상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이름의 어원이 바람과 관련 있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탈출 15,10 참조). 루아흐가 일종의 의성어로 바람을 가리킨다고 할 때, 루아흐는 인간의 통제를 넘어 하느님만 관장하실 수 있는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한편 하느님의 루아흐는 인간의 내면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전기 예언서에서 하느님의 루아흐가 사울에게 들이닥치자(삼손의 경우 판관 14,6.19; 15,14 참조) 그는 황홀경에 빠져 딴사람으로 바뀌고 예언을 한다(1사무 10,6.10 참조). 당시에 예언자들은 황홀경에 빠져 수금과 손북, 피리와 비파를 연주하며 예언하였다(1사무 10,5 참조). 고대 가나안 종교에서 발견되는 이런 현상은 ‘신내림’이라는 무속 체험과 유사하다. 그러나 후기 예언서에서는 황홀경 현상을 나쁘게 평가하고, 이를 거짓 바람 또는 헛것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나타난다(예레 5,13; 이사 41,29 참조).
그러면 하느님의 루아흐를 체험했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사 59,21은 주님의 영(루아흐)과 주님의 말씀을 연계시킨다(에제 2,2; 3,24; 11,5 참조). 물론 황홀경 체험에도 예언이 있긴 하다. 그러기에 식별 기준은 말씀의 내용과 그 실현 가능성(신명 18,22; 이사 55,11 참조)이 된다. 후기 예언서는 영의 능력을 사회적 공정과 정의 실현(미카 3,8; 이사 11,1.4.6 참조), 그리고 윤리적 판단과 심판에 연결시킨다(이사 4,4; 33,11 참조). 인간이 하느님의 영을 체험하면,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에제 36,27 참조). 이렇게 영과 말씀은 서로 필요로 하고 서로 보완한다.
창조적 소통 수단인 다바르
루아흐가 하느님, 인간, 자연을 소통하는 상징적 실재였듯, 다바르도 하느님께서 세상과 소통하는 상징 수단이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말씀으로 소통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우상들과 완전히 다른 분이시다(시편 115,5; 135,16; 예레 10,5; 참조 1열왕 18,26-29).
하느님께서 말씀을 건네시는 대상은 인간과 자연이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하늘(창세 1,22; 시편 50,4; 이사 1,2; 45,8; 하까 1,11), 뱀(창세 3,14)과 큰 비(욥 37,6)와 번개(욥 38,35)에게 말씀하시고 하늘의 별들을 이름으로 낱낱이 불러 주신다(이사 40,26; 시편 147,4 참조). 또 하느님께서는 땅에게 명령하시어 싹과 과일나무를 돋게 하신다(창세 1,11 참조).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한 하늘이 이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며(시편 19,2 참조) 만물이 하느님을 찬미한다(시편 66,1-4; 96,1.11-12; 97,1; 98,4-9 참조). 하느님과 소통하는 피조물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소통한다(시편 19,4-5 참조).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창조가 우연이거나 임의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씀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 역사를 섭리로 이끌어간다(시편 147,15-19 참조). 사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역사는 하느님의 말씀이 심긴 모판이다. 말씀이 예언자의 입에 담겨(예레 1,9; 15,16; 신명 18,18 참조) 육의 형체로 드러나고, 자연은 말씀을 품어 맺은 결실로 나타난다. 인간과 세상은 말씀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속해 있다. 그러기에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무진장 묻혀 있는 밭이라 할 수 있다.
루아흐, 말씀, 자연 그리고 생태신학
루아흐와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소통하며 섭리로 이끄시는 두 가지 방식이다. 루아흐는 무엇보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이다. 바람을 일으키고 생명을 일으키며 예언자를 일으키는 힘이다. 말씀은 이 힘에 방향을 부여하고 목표를 제시한다. 말씀은 세상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 주는 이정표이다.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힘을 받아 살아가는 피조물들에게 삶의 방식을 알려 주는 생명의 지도이다. 그래서 말씀이 없는 루아흐는 맹목적 힘이거나 헛것이 된다.
반대로 루아흐 없는 말씀은 피가 말라 버린 박제요 영혼 없는 형체가 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루아흐 안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지혜서가 말하듯이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고(지혜 12,1 참조), 피조물은 말씀에 끊임없이 응답하며 존재하고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한다. 성경에 따른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생태신학의 몇 가지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우주는 온통 하느님의 루아흐로 가득한 신성한 존재이다. 하느님의 불멸의 영이 함께하기에 세상은 신성하고 경이로운 존재이다. 근대의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세상을 비신성화하고 단순한 물질적 대상으로 격하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루아흐를 간직한 우주는 그 자체가 축제이고 찬미이며 신비이다.
둘째, 과학적 자연주의는 세상의 시작과 마침을 말할 수 없다. 우주의 목표를 설정하기도 어렵다. 이 모든 것은 인간 밖에서 오는 말씀으로만 밝혀질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이다.
셋째, 하느님, 인간, 세상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이어 주는 고리는 바로 루아흐요 말씀이다. 우리는 루아흐의 순환성과 말씀의 지향성에서 세상과의 관계를 고찰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라는 보금자리는 하느님의 루아흐와 말씀으로 양육되는 생명의 연속된 그물망이다. 이 생명의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의 루아흐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고 실천해야 한다.
넷째, 루아흐의 능력을 과신하여 미망에 빠지고 말씀의 종말론적 실현을 열망한 나머지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는 무모한 열광주의가 그리스도교 안에 늘 있어 왔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는 무분별한 신비주의와 종말론적 조급증을 식별하게 해 주는 지혜의 보고이다. 그리스도교 안에 자생하는 소종파(예컨대 신천지 교회) 현상에 대해, 균형 잡힌 생태신학은 강력한 백신 역할을 할 수 있다.
자연은 루아흐 안에서 말씀의 실현을 향해 나아간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생명의 네트워크에 속한 인간은 자연에서 얻은 지혜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며 현실화하는 창조 과정에 참여한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대방동 성당 보좌를 역임한 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9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백운철 스테파노] 0 1,19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