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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피조물의 불완전함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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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28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피조물의 불완전함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

 

 

신학교에 녹음이 우거지고 있다. 가슴을 설레게 한 봄의 연두색 향연도 막을 내리고, 짙어 가는 녹색의 물결이 낙산의 숲을 채우고 있다. 이렇게 성큼 여름이 다가왔지만 북핵 문제와 북한 동포의 비참한 실상은 우리 마음을 여전히 얼어붙게 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자연 재해도 녹색의 캔버스에 커다란 흠집을 남긴다.

 

이렇게 자연과 역사는 아름다움과 추함,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닌다. 조화와 행복, 모순과 갈등이 혼재하는 자연과 역사의 한복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로 자연도 하느님의 성사(聖事)이고 역사 또한 하느님의 성사다. 성경은 자연과 역사의 의미와 목표를 일러 주는 불후의 이정표다.

 

하느님께서는 창세 1장에서 ‘보시니 좋았다(tob)’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과연 좋음의 의미와 조건은 무엇일까?

 

 

창조와 구원

 

첫날, 어둠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된다. 하느님께서는 어둠을 좋게 보시지 않고 어둠의 한복판에 빛을 만드시고 빛에 대해서만 좋았다고 하셨다. 시편에도 창조를 암시하는 대목이 여럿 있다. 시편 74,13은 하느님께서 바다를 당신 힘으로 뒤흔드시고 물 위에서 용들의 머리를 부수었다고 표현하여 창조를 혼돈의 세력에 대항하는 신화적 전투로 묘사한다. 창조는 하느님의 최초의 구원 행위이다(시편 74,12-17 참조).

 

그러나 창세 1장은 하느님과 용의 전투 같은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였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혼돈과 심연에 질서를 부여하셨다. 혼돈과 무질서에서 질서 있는 세상, 코스모스(cosmos)가 출현하는 일련의 과정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장차 약속의 땅에 이르는 구원의 역사와 겹친다. 자연 질서의 출현과 역사적 구원의 과정이 바로 창조이다. 그러므로 태초의 혼돈과 싸워 얻은 창조의 기적은 구원의 기적이다(폴리쾨르). 창조와 구원의 단일성을 확인시켜 주는 말씀이 바로 “보시니 좋았다”(창세 1,4)이다.

 

 

창조와 유한성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에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첫날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셨다. 여기서 시간이 발생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시어 이를 하늘이라 부르셨고 뭍을 땅으로,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여기서 공간이 출현하였다.

 

시간은 변화를 일으킬 조건을 부여하고, 공간은 개체가 출현할 자리를 제공한다.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에서 사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조건이자 한계이다. 피조물은 시간의 화살을 타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유한성을 갖고, 몸을 가진다는 점에서 장소의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창세 1장의 저자는 피조물의 한계를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한계에 대한 긍정이 더욱 잘 드러나는 대상은 바로 혼돈의 흔적인 어둠이요 심연의 흔적인 바다이다. 어둠은 빛과 함께 밤과 낮의 주기적 시간에 통합되고, 심연은 하늘과 땅의 질서에 통합된다.

 

이처럼 창세 1장은 세상의 양면성을 통합한다. 밤과 낮이 질서 있게 교차하며 하루가 구성된다. 사제계 학파가 생각하는 창조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창세 1,31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았다’고 긍정하셨는데, 성경은 한 번도 자연이 완전하다고 암시한 적이 없다.

 

사실 자연 그 자체는 불완전하다. 자연에는 불완전한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심연이요 어둠이다. 좋다는 말은 미학적 아름다움이나 내적 효율성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의 기대에 부합하도록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창조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실현 사이에 여전히 간격이 있다.

 

‘보시니 좋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한처음의 완전함을 기리는 회상의 말이 아니다. 혼돈과 심연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긍정하고 강복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발생하는 피조물의 다양성과 복잡화의 구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현재 상황이 완전하지 않은데도 ‘좋았다’고 긍정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서 비롯한다. 하느님의 창조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창조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에 놓여 있는 피조물의 죄와 한계를 구원의 역사, 곧 지속적인 창조의 역사를 통하여 용서하고 치유하실 것이다.

 

 

창조적 구분과 통합

 

둘째 날,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창조하고 물을 위와 아래로 갈라놓으신 다음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확실히 성경은 창조 과정에 반드시 구분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밤과 낮, 남자와 여자 등 물리적·생물학적 구성 요건이 바로 구분이며 분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성경은 이 개별화에 필요한 구분이 갈등적·차별적 분열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한다. 일반적으로 분리는 갈등과 반목, 마침내 전쟁으로 치닫는 파괴적 과정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특히 남녀 차별, 계층 갈등, 인종 차별이 사회적 불안과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분은 개별성을 최대한 존중하되 개별적 주체가 전체의 화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 지체성의 구분이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 개념과도 같다(1코린 12,27 참조). 구분과 통합 또는 분리와 일치의 두 긴장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원하신 창조질서이다.

 

창조의 단일성과 창조의 다양성이 바로 창조의 신비다. 이런 의미로 하느님께서는 둘째 날 창조 후에 ‘보시니 좋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어 구분과 분리가 생명의 출현에 꼭 필요하지만, 그것이 자칫 분열과 갈등을 일으켜 마침내 전쟁으로 나아가는 폭력적 · 파괴적 행보를 밟지 않도록 경고하신 셈이다.

 

자연과 역사는 인간이 사는 집이다. 집이 완전하지 않고, 더욱이 사는 이가 관리를 잘못한 탓에 물이 새고 지붕이 날아가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창세 1장의 위대한 낙관주의는 자연과 역사의 불완전함을 보시고도 ‘좋았다’고 말씀하신 하느님의 위대한 긍정과 강복에 근거한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대방동 성당 보좌를 역임한 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9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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