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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하느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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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533

[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하느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나?


믿음 깊은 신자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열심히 기도하고, 미사 등 전례에 적극 참여하며, 성직자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기꺼이 순종하고, 헌금도 많이 하며, 가난이나 병고를 겪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봉사하는 모습 등이 될 것이다.


이승과 저승의 이원론

그런데 대부분 이런 믿음 깊은 신자들은 현세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관심을 덜 가지려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초연하려 하고, 특히 정치는 더러운 것을 만지듯 멀리하려 한다. 뉴스 보는 시간이 낭비라고 여기고 그 시간에 성경 구절 하나 더 쓰려 한다. 그들은 걸을 때 땅을 보고 걷지만, 마음은 늘 저 하늘을 향하고자 한다.

그들은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하신 바오로 사도의 충실한 제자들로 보인다.

신실한 그들에게 현세는 풀잎 끝에 맺혀진 이슬방울처럼 잠시 지나가는 것이니 영원한 천상 행복에 마음 두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며, 기껏해야 눈물의 귀양살이 자리일 뿐이니 어서 천사들이 부르는 그곳으로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마땅하다. 불멸의 영광을 위하여 썩어 없어지고 말 이 세상을 살더라도 이 세상을 살고 있지 않고 천상에서 사는 것처럼 이 세상과 초연해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사제가 성당에서 기도나 할 일이지 삼성 그룹의 부패를 세상에 떠벌리고, 4대강 살린다며 여울목에 모여 단식하고, 해군기지를 반대한다며 제주 강정에 모여드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신부가 세상일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는 것인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는 말씀도 모르는 사제들이 아닌가? 정치는 정치인에게, 경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종교인은 종교인답게 종교에만 전념해야 옳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여긴다.


‘저 위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추구해야 할 ‘저 위에 있는 것’은 무엇이며, ‘생각하지 말아야 할 땅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오로 사도는 다른 데도 아닌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콜로 3,5). 이어서 분노와 거짓말을 버리고 서로 참아주고 용서해 주며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새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저 위에 있는 것’은 죽어서 가게 될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새 인간이 살아야 할 덕과 규범이며, ‘땅에 있는 것’은 초연해야 할 인간의 구체적 삶의 현장이 아니라 버려야 할 옛 인간의 악습을 말하는 것이다.

정교분리 원칙은 지켜야 할 원칙이지만 그것이 믿는 이들의 사랑의 삶을 규제하는 원칙이 될 수는 없고, 또 그렇게 허용해서도 안 된다. 그 원칙은 국가가 교황이나 주교를 임명하거나 거기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또 교회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교회재단이 탈세를 하거나 불법을 저질러도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거나 국가가 생명과 인권을 유린하고 환경을 훼손해도 교회가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은 남미의 정치도 민주화가 많이 진전되었지만, 예전에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극우독재 체제가 납치, 살인, 약탈 등 온갖 만행을 부릴 때 정의를 부르짖다 제단에서 총탄에 쓰러진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결식아동들의 도시락을 제공하면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결식아동들의 도시락을 횡령하는 정부의 부패를 말하면 교회가 정치에 관여한다고 비난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지상에서 순례하는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정의했다. 교회는 순례하는 도상에 있지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순례길은 관광길이 아니다. 그래서 사목헌장에서는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1항)라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굽어보시고, 그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시키시려 예언자를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기꺼이 해방의 예언자가 되고자 다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농민이 자기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고, 노동자가 기업 운영에 참여하도록 촉진해야 하며, 노동조합에 자유로이 참여할 권리는 기본 인권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모든 것은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하는 공유물이기 때문에 극도의 궁핍 속에 사는 사람은 타인의 재화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취득할 권리를 가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공의회는 이렇게 분명히 분열된 인류 세상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공의회의 가르침이 진보 정당의 정책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천상의 것을 추구하라는 말씀을, 현실이 부당하고 불합리할지라도 고치려 들거나 저항하지 말고 말없이 참아 받아 저세상에서의 보상을 기다리라는 말씀으로 해석한다면, 불의를 보고 분노하시는 하느님을 지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가진 자들의 기만에 동조하고 협조하는 것일 뿐이다.


이 세상은 환승역이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승과 저승의 이원론에 세뇌되어 실제로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살면서도, 그래서 당장 천국에 보내준대도 점심 먹고 간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을 환승역 정도로나 간주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환승역이 아니라 우리의 일터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낙원으로 가꾸어야 할 소명을 받은 하느님의 정원사들이며, 하느님의 재산을 잘 나누고 관리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두 제때에 먹을 것을 받으며 화목하게 지내도록 할 책임을 맡은 청지기(집사)들이다. 이 세상에서 이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저세상에서의 영원한 행복도 없다.

다른 한편, 이승과 저승의 이원론은 하느님 나라를 시간과 공간에 예속된 실재로 만들어버리는 위험이 크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이승은 거대한 우주의 한 지점 지구일 뿐이고 저승은 우주 건너 어딘가에 있을 공간으로 간주되고,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여기가 아니라 죽은 다음의 어느 때와 어느 장소로 국한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있음을 알고 있다. 물론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이곳에 이미 와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도래한 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해 나가도록 불린 사도들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를 시간과 공간의 개념 속에 집어넣으면 뒤죽박죽이 될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적 개념이다. 그래서 겨우 인간의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상태라고나 할까? 정의와 공평, 사랑과 평화가 넘실대는 상태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나라는 비자가 없으면 입국 금지하는 검문소나 무단 월경을 막는 이중 철조망도 없다. 이 하느님의 나라는 사망 진단서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의 삶 속에 이미 건설되기 시작한 나라이며, 사랑의 왕이신 그분께서 오실 때에 그분의 자비와 은총으로 완성될 나라이다.

우리는 그 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를 살며 그 나라를 확장하도록 열심히 일할 뿐이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바닷물고기 같은 우리는 늘 묻는다. “바다는 어디 있어요?”

* 임문철 시몬 - 제주교구 하귀본당 신부. 1983년 사제품을 받았고, 교구 사목국장과 교육국장을 역임하였으며, 신창본당, 광양본당, 중앙주교좌성당 등에서 사목하였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임문철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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