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26: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6)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17 ㅣ No.729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26)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⑥


동료 라이나흐의 죽음 접하며 신앙 세계로 입문



에디트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동료인 라이나흐의 죽음을 신앙으로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부인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을 최초로 만나게 됐다. 사진은 프라이부르크 대학.


현상학자 후설의 조교로 활동하다

에디트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다음, 1916년부터 1918년까지 그 대학에서 후설의 조교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성녀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현상학을 강의했으며 이와 함께 후설이 쓴 초벌 원고들을 잘 정리해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녀에게 이러한 일들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당시 대학가에는 남성중심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따라서 비록 조교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에디트는 후설을 보좌하는 협력 교수라기보다 비서로서의 업무를 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 동안 강의, 원고 교정 작업뿐만 아니라 동시에 학자로서 깊이 있게 학문을 연구하면서 여러 주제들을 탐구하고 다양한 강의에 참여하는 등 폭넓은 학문 활동을 통해 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져갔습니다. 그 와중에도 성녀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화두는 “인간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였습니다. 당시 성녀는 인간이 지닌 사회적, 정치적 면에 대해 연구하면서 사회주의당 계열에 속해 정치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성녀는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부터 독일에서는 여성들도 투표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동료 라이나흐의 죽음에 대한 체험

에디트는 이 무렵부터 알게 된 로만 잉가르텐과 한스 립스라는 동료 철학자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많은 교감을 나눴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와도 연인 관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에디트의 생애에서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 중에 하나는, 그가 전쟁에서 돌아와 복학한 후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을 당시, 큰 힘과 위로가 되어 준 후설의 조교이자 에디트의 동료인 아돌프 라이나흐였습니다. 라이나흐 역시 성녀가 전쟁에서 돌아온 지 얼마 후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만 1917년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에디트에게 있어서 그의 죽음은 상당히 받아들이기 힘든 소식이었습니다. 라이나흐야말로 에디트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디트는 이 사건을 겪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실존적인 물음을 던졌으며 다시금 슬럼프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라이나흐의 부인에게서 십자가의 능력을 보다

에디트는 침통한 마음으로 라이나흐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성녀는 예기치 못했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녀는 장례식에서 남편의 사망 소식으로 인해 고통에 짓눌려 있을 부인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하면서 남편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라이나흐의 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라이나흐는 전사하기 1년 전 아내와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습니다. 그 부인은 신앙에 의지하며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했고, 이를 바탕으로 남편의 죽음을 꿋꿋하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훗날 에디트는 그런 부인을 기억하며, 그때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을 만난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습니다.


그의 유고집을 정리하며 새로운 지평을 보다

안나 라이나흐는 에디트에게 남편 라이나흐의 유고집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청에 따라 성녀는 유고집을 준비하면서 라이나흐가 썼던 여러 원고를 비롯해 개인적인 편지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라이나흐가 죽기 얼마 전 내적인 심경의 변화를 겪었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편지에는 라이나흐가 전쟁 후에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 것인가 하는 새로운 삶의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다음 혼신을 다해 사람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고 싶어 했습니다. 또한 학문이 결코 신앙, 하느님과 반대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라이나흐의 사상에 대한 발견은 에디트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결국 에디트는 이로 인해 신앙의 세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때부터 에디트는 복음서를 읽기 시작했으며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을 비롯해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그리고 그 밖에 여러 신학자의 주요 저서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이때부터 에디트는 신앙을 향한 본격적인 회심의 여정에 들어섰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8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1,38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