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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28: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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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08 ㅣ No.735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28)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⑧


영세 이후 자신의 학문에 가톨릭 신앙 접목



성녀 에디트 슈타인이 1923~1931년 도미니코회 소속 사범학교 교사로 활동했던 슈파이어 시 전경.


가르멜 수녀가 되기까지

에디트는 1922년에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과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으로 회심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가르멜 수녀가 되고자 하는 원의를 품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세례받은 이후 가톨릭 교회의 삶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당시 성녀의 고해신부는 에디트가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으로서 많은 학문 활동을 통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에디트가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에 좀 더 학문 활동을 하도록 조언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에디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다음, 신앙의 차이로 인해 어머니와 겪었던 내적 갈등에 있었습니다. 더욱이 봉쇄 수녀원으로의 입회는 어머니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에 가르멜로의 입회는 에디트 자신에게나 어머니 모두에게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가지 이름에 담긴 의미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에디트가 세례를 받으면서 받게 된 세례명입니다. 당시 에디트는 세 가지 이름을 받았습니다. ‘에디트’(Edith), ‘데레사’(Teresa), ‘헤드비히’(Hedwich). ‘에디트’라는 이름은 성녀가 지닌 민족적인 정체성(유다인)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에디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면서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유다인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유다교 신앙이 의미하는 바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녀는 세례를 통해 데레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로의 회심에 있어서 성녀 데레사가 미친 결정적인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 ‘데레사’라는 이름에는 성녀 데레사와 관련해서 에디트가 체험한 일련의 사건들이 담겨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에 귀의한 이후 성녀 데레사는 에디트의 훌륭한 영적 스승이자 동료로서 그를 인도해준 좋은 안내자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헤드비히’는 철학을 함께 공부했던 동료 이름입니다. 에디트는 밤베르그 차베른에 있는 그 친구의 집에 머물면서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을 읽고 회심을 했습니다. 헤드비히는 에디트가 세례를 받을 당시 대모가 돼주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헤드비히가 개신교 신자였다는 겁니다. 당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은 오늘날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바탕으로 한 보다 넓은 차원의 구원관과 교회관보다는 상당히 협소하고 보수적인 전망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개신교 신자인 헤드비히가 에디트 슈타인의 대모가 됐다는 점은 교회 일치의 차원에서 볼 때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에디트가 받은 이름, 특히 ‘헤드비히’에는 다른 사람의 신앙, 진리 추구 방식을 존중하는 에큐메니즘적(교회일치적) 특징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이름에는 자신에게 가톨릭 교회의 세례를 받도록 인도해준 개신교 친구와의 우정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학문에 가톨릭 신앙을 입히다

세례를 받은 이후, 에디트는 가톨릭 신자이자 여성으로서 자신의 성소에 충실했으며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성소를 꽃피워 갔습니다. 영세 이후 에디트의 학문에는 가톨릭 신앙이라는 색채가 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23년부터 1931년까지 에디트는 슈파이어라는 조그마한 도시에 있는 도미니코회 소속 사범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사범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도미니코회 수련 수녀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가톨릭 교회의 교육 분야에서 전념했던 에디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디트는 장차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여고생들에게 독어, 문학, 역사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동시에 교육 시스템, 교육 철학 등 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연구, 발표했습니다.


인격중심의 교육 철학

이 시기로 접어들면서 에디트는 독일에서 교육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또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과 수녀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에디트가 교육 과정에서 중점을 뒀던 근본 원칙 중에 하나는 학생들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에디트는 피교육자의 인격에 깊은 관심을 갖고 존중했던 교육계의 혁신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수녀들을 가르치면서도 각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했으며 문화적이고 심리적이며 삶의 미적인 요소(음악, 미술 등)를 고려하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교육을 지향했습니다. 또한 심리적이고 성적인 차원까지 고려하면서 피교육자들을 교육하고자 했습니다. 교육 과정에서 보여준 이런 그의 세심한 배려는 자연스럽게 수업 시간 이외에도 학생들이 처한 삶의 상황과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점차 이 분야에 연륜이 쌓이면서 에디트는 진정한 영적인 교사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럼으로써 학생들뿐만 아니라 여러 수녀에게도 깊은 관심을 갖고 동반하며 가르쳤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8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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