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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29: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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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4 ㅣ No.737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29)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⑨


거룩한 신앙의 삶 세상에 전하는 도구로 철학 활용

 


- 에디트 성녀가 영적 지도를 받고 전례 쇄신 운동에 참여한 독일 보이론의 베네딕도회 대수도원.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철학을 활용하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은 후 에디트는 1923년부터 1931년까지 슈파이어라는 조그마한 도시의 도미니코회 소속 사범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의 에디트에게서 철학자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교사 소임 때문에 어느 정도 철학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간 에디트가 철학에 심취하고 공부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철학을 통해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입문하면서 이미 가톨릭 신앙 안에서 진리를 찾은 이상, 에디트는 더는 철학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철학에 대한 그런 자신의 태도가 잘못됐음을 깨닫게 됩니다. 에디트는 철학이야말로 거룩한 신앙의 삶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철학을 가까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철학에 접근했습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세상에 전하고 설명하기 위해 철학을 연구했습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시도하다

당시 에디트가 새롭게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교 철학과 현대 철학 사이의 만남과 대화였습니다. 에디트는 그리스도교가 그 시대의 문화적인 상황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사상적인 면에서 성 토마스의 사상으로만 돌아가도록 계속 부추겼기 때문에 날로 발전해가던 현대 철학과는 거리를 둬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신앙과 이성 간에 부조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에디트가 시도한 철학 연구는 신앙과 이성 간의 새로운 만남이었습니다. 신앙과 이성 간의 새로운 만남과 대화를 위한 시도는 독일에서 새롭고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디트는 이론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루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대 철학의 새로운 분야인 현상학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가톨릭 신앙에 귀의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의 행보는 가톨릭 교회 측면에서 볼 때 상당히 의미심장한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성 운동가 에디트

당시 에디트는 얼마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통해 가톨릭 교회 내에서 지명도 있는 철학가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1928년을 기점으로 강연을 위해 상당히 많은 여행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에디트는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전역에 걸쳐 강연했습니다. 에디트가 했던 강연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여성 운동, 교육학, 그리스도교 영성. 당시 에디트는 열렬한 여성 운동가로서 사회 여러 분야에서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고 그 권리를 위해 투신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으로도 확대됐습니다. 결국 이런 활동을 통해 에디트는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의 투표권뿐만 아니라 대학교에서 여성이 교수로서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으며 노동 분야에서 여성이 누려야 할 권리도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여성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했습니다. 에디트는 여성이 모든 분야에서 남자들과 똑같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실현되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여성이 자신의 품위와 소명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동시에 여성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이런 전망에서 에디트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가운데 특히 여성으로서의 인간은 누구인가, 여성의 존재와 역할은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전례 쇄신 운동에 참여하다

에디트는 또한 유럽의 여러 대학을 비롯해 교사협의회에서 다양한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이 시기에 에디트의 강연에서 드러나는 주요 주제는 교육에서 인간 인격의 개별성이 지닌 중요성입니다. 이 점은 현대 교육학에서 부각되는 중요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또한 에디트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영성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했으며 신자들이 깊이 있게 성찬례를 살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먼저 영성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가톨릭으로 회심한 이후부터 에디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있게 해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특히 성찬례는 에디트의 영성 생활에 있어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이후 줄곧 성무일도를 바쳤으며 1928년부터는 베네딕도회 사제를 통해 본격적으로 영적 지도를 받았습니다.

당시 에디트는 교분이 있던 예수회의 프시와라 신부를 통해 보이론에 있는 베네딕도회 대수도원에서 피정을 했으며 이 기회에 라파엘 발처라는 그 수도원의 아빠스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가 아빠스로 있던 수도원은 전례 쇄신 운동이 꽃피워난 발원지로 여기서부터 새로운 전례 쇄신 운동이 시작되면서 독일 전역에 퍼지고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곳의 아빠스를 영적 지도자로 둔 에디트 역시 이런 전례 쇄신 운동을 비롯해 전례 텍스트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15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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