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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30: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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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23 ㅣ No.739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30)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⑩


반유다 나치 정권 하에서 ‘십자가 성소’ 발견

 


- 에디트 슈타인이 독일 교육 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뮌스터.


다양한 학문 활동

1922년 세례를 받은 후 다양한 분야에서 기여하는 가운데 활동 영역을 넓혀간 에디트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보다 심도 있는 연구와 강의에 전념하기 위해 슈파이어의 사범학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성 토마스의 주요 작품들을 라틴어에서 현대 독일어로 번역,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에디트는 정규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1931년부터는 대학에서 심리학부의 정교수 자격을 얻기 위해 박사 학위 논문에 준하는 또 다른 논문을 준비했습니다. 이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병행해서 에디트는 독일 북부에 있는 뮌스터의 독일 교육 연구소에서 강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32년 이 연구소로 발령을 받아 가톨릭 계열의 교수와 교사들을 양성하는 분야에 전념했습니다.

당시 에디트는 현대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여성을 교육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주제들을 심도 있게 연구했습니다. 특히 에디트는 베를린의 교육부와 협력하는 가운데 이 분야에 상당히 기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교육 시스템을 혁신하는 데에도 일조했습니다. 당시 에디트가 강의했던 내용 중에는 ‘인간 인격의 구조’라는 주제도 있었습니다. 에디트는 이 강좌를 통해 인간에 대한 교육의 전제 조건으로서 인간 인격의 구조를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 강의는 당시 철학적, 신학적 인간학 분야를 종합한 명강의로 손꼽혔고, 에디트가 정리한 강의록들은 출판되어 우리에게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현상학, 토미즘 학회 활동


1932년부터 에디트는 파리 교외에 있는 쥬비시에서 열린 현상학과 토미즘 학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본격적으로 학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학회는 유럽 각지에서 선발된 현상학, 토미즘 분야의 우수한 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에디트는 유일한 여성 철학자였습니다. 이는 에디트가 국제적인 차원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지닌 철학자로 자리매김해 갔음을 의미합니다. 에디트는 이 학회 활동을 통해 성 토마스 철학 연구에 있어 당대의 석학인 자크 마르탱과 교분을 나눴습니다. 이 시기에 에디트의 인지도는 독일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상당히 높아 갔습니다.


십자가 성소에 대한 발견

그러나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수상이 되면서 독일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자 에디트 역시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반유다적 인종차별주의를 표방했던 나치 정권으로 인해 단지 유다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에디트는 뮌스터의 연구소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을 비롯해 그동안 활동해 왔던 여러 분야에서 더 이상 강연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독일에서는 더 이상 교수로서 학자로서의 자신의 소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디트는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오히려 더욱 깊은 영적 여정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에디트는 이 부조리한 상황을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유다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박해받고 있는 자기 민족과 깊이 연대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에디트는 자신의 성소가 ‘십자가 성소’라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 민족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하느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디트는 이미 국제적인 인지도를 갖춘 여성 철학자였기 때문에 충분히 그 상황을 피해 이민을 가서 새로운 나라에서 학문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친언니들이 이미 북미와 남미에 정착한 상태였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디트는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결코 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온몸으로 그 상황을 끌어안았습니다.


히틀러에 대항한 두 가지 선택

당시 에디트는 이 총체적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히틀러의 잘못된 정책에 반대하며 두 가지 길을 갔습니다. 하나는 가톨릭 교회가 히틀러의 잘못을 거슬러 고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에디트는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교황님 알현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개인 알현은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편지에 담아 교황님께 전했습니다. 이 편지는 교황님께 직접 전달됐습니다. 당시 교황이시던 비오 11세 교황님의 탁자에는 임종 전까지 이 편지가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티칸은 에디트의 요청에 침묵했습니다.

에디트가 히틀러를 거슬러 걸었던 두 번째 길은 책을 저술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 유다인을 암적 존재라고 주장하며 탄압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유다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사회적, 경제적 문제로 인해 힘들어하던 독일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유다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대해 에디트는 좋은 유다인 가정을 소개함으로써 이런 히틀러의 잘못된 정책에 맞설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쓰게 된 것이 「어느 유다 가정의 삶에 대해서」라는 작품입니다. 이는 에디트 슈타인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에디트의 가정환경을 비롯해 성장 과정, 가치관 형성 과정, 철학을 통한 진리 추구의 여정, 수도 성소를 받기까지의 여정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어 그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힙니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2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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