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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32: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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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06 ㅣ No.743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32)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 ⑫


구약의 에스텔처럼 자신을 예수 성심께 봉헌



에디트 슈타인이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이전한 네덜란드의 에히트 가르멜 수녀원 전경.


에디트가 쾰른 가르멜을 선택한 동기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1933년 10월 14일 쾰른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해서 수련을 받은 후 1936년 9월 14일 서원을 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가르멜 수녀원 가운데 하필이면 에디트는 왜 쾰른 가르멜 수녀원을 선택했을까요? 무엇보다도 친구 가운데 하나가 쾰른 가르멜 수녀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에디트는 그 친구의 소개로 쾰른 가르멜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에디트가 그 공동체를 선택하게 된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수녀원이 영적 자유를 지닌 공동체라는 데 있었습니다. 에디트 역시 영적으로 성장함에 있어서 영적 자유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으며 이 점이 그에게 어필했습니다. 에디트가 쾰른 수녀원을 접촉할 당시 이 공동체는 그의 고향인 브레슬라우에 새로운 공동체 창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 역시 에디트가 쾰른 수녀원을 선택하면서 고려했던 동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에디트는 쾰른 수녀원에서 양성을 받은 후 브레슬라우 수녀원 창립에 참여할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에디트는 브레슬라우 수녀원 창립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다인이 많이 살았던 브레슬라우 역시 나치 정권의 주요 박해 지역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비록 수도자 신분이었다고는 하지만, 브레슬라우는 에디트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가르멜 수녀원 내에서의 학문 활동

또한 에디트가 이 창립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데에는 그가 서원한 후 독일 가르멜의 관구장 신부의 배려로 수녀원 내에서 본격적인 학문 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맨발 가르멜의 창립자인 성녀 데레사는 수도회를 창립할 당시 수녀들에게 공부하도록 권하며 학문을 장려했지만 남성 중심적인 사회와 교회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에디트가 살던 20세기 중반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보건대, 가르멜 수녀원 내에서 에디트가 했던 학문적 시도는 여성 수도자로서 관상생활에 학문을 접목한 상당히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인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라는 대작을 집필했습니다. 이 작품은 에디트 자신의 지적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디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모든 학문적인 진리 추구 여정에 대한 종합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그는 이 작품을 비롯해 「성녀 데레사의 생애」, 「예수 성심의 성녀 마르가리타의 생애」를 비롯해 다양한 가르멜 영성 관련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에히트 가르멜로 이전

에디트는 쾰른 가르멜에서의 수도생활을 통해 당시 박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자기 민족과 깊이 연대했습니다. 그는 특히 구약에 등장하는 에스텔 여왕의 역할에 주목하는 가운데 유다 민족과 함께했습니다. 무엇보다 에디트는 스스로를 작고 무능한 에스텔 여왕이라 여기며 자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위대함과 자비로우심에 신뢰하는 가운데 그분께서 분명 자기 민족을 구해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에 대한 나치 정부의 박해는 더욱 극심해져 갔습니다. 마침내 1938년 11월 9일 소위 ‘수정(水晶)의 밤’이라 불린, 독일 전역에서 자행된 대규모의 유다인 박해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독일 전역에서 유다인들이 운영하던 모든 상점의 진열대에 있는 유리창을 깨부쉈기 때문에 당시 자행된 만행을 ‘수정의 밤’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많은 유다인 회당이 불탔으며 유다인들은 자기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심각한 상황을 보면서 에디트는 자신으로 인해 쾰른 수녀원에도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고심했으며 결국 원장 수녀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전시켜 줄 것을 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장 수녀는 이웃에 있는 네덜란드 쪽으로 가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네덜란드에는 쾰른 가르멜로부터 분가되어 나간 에히트 가르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쾰른 가르멜에서 불과 15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에디트는 1938년 12월 31일 에히트 가르멜 수녀원으로 가게 됩니다.


에히트 가르멜에서의 삶

이렇게 무사히 에히트 가르멜로 이전한 에디트의 삶은 외적으론 평온했습니다. 에히트는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으며 당시 독일을 휩쓸던 광풍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디트는 히틀러의 극단적인 행동이 결국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말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그래서 에히트 가르멜에서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지향으로 1939년 3월 예수 성심께 자신을 봉헌했습니다. 이 시기에 에디트에게는 작은 기쁨도 있었습니다. 바로 위의 친언니인 로사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입니다. 그 후 로사는 에디트가 에히트 수녀원에 있을 때 자주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로사 역시 가르멜 재속회에 입회해서 서약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히트 가르멜 수녀원의 외부 일을 도와주면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에디트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으로 접어들어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상황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6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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