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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34: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영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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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25 ㅣ No.749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34)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영성 ①

유년기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느님’ 모습 각인

 

 

유다인들의 화해의 축제(욤 키푸르). 이 축제는 어린 시절의 에디트에게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느님 모습을 각인시켜 주었다.


유년기에 체험한 하느님(1891~ 1902년)

유다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에디트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에디트의 가족 중에 깊은 유다교 신앙을 간직한 이는 어머니였습니다. 그의 형제자매들 역시 신앙을 갖고 있긴 했지만 열심히 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유다인들이 해오던 기도를 잘 가르쳤고, 유다교 절기에 따라 여러 축일에 함께 집회에 참석하게 했으며,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권고하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절 에디트가 참석할 수 있었던 유다교 절기 축제를 통해 그가 이해한 하느님의 모습을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화해의 축제, 둘째는 파스카 축제, 셋째는 신년 축제입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에디트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축제는 화해의 축제였습니다. 무엇보다 에디트의 생일이 이 축제일과 겹쳐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에디트 역시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성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유다인들이 사용한 전례력은 유동적이었지만, 어머니는 에디트의 생일을 화해의 축제일로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에디트에게 화해의 축제는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이 축제는 ‘속죄의 날’로 기억되었습니다. 그 축제일만 되면 어머니는 이날을 준비하기 위해 하루 동안 단식을 하고 집회에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이 축제는 유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속죄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뒤집어쓴 숫염소를 제단에 바쳐 죽이고 광야로 내보내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날은 유다인들에게 특히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이 축제를 보아왔던 에디트에게 하느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각인됩니다.


당신 백성을 해방하시는 하느님

어린 시절 성녀가 하느님을 체험한 또 다른 유다교 절기로 파스카 축제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에디트는 이 축제에 즐겁게 참석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절기에 가까운 친지들이 모두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에디트에게 이날은 상당히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그간 보고 싶었던 친척들을 모두 볼 수 있었고 덤으로 선물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축제를 위한 식기들이 따로 준비됐고 그때만 먹는 별식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에디트의 기억에 파스카 축제는 가족의 잔치였습니다. 이 축제는 가정에서 거행되었으며 전례 거행 중에 시편을 낭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몫은 언제나 집안의 막내 귀염둥이인 에디트의 차지가 되곤 했습니다. 어린 에디트가 그 축제의 주인공 역할을 한 셈입니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 축제에 참여하면서 에디트는 자연스레 당신 백성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신 백성을 섭리적으로 이끄는 하느님

유다인들이 거행하는 큰 축제 중에 하나로 신년 축제를 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축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들은 이 축제를 통해 한 해 동안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렸습니다. 유다인들이 이 축제에서 감사드리는 하느님은 섭리적으로 당신 백성을 이끄는 분이십니다. 어린 에디트는 매년 신년 축제를 통해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자연스레 접했습니다. 물론 어린 소녀였던 그가 그 축제에 담겨진 깊은 신학적 의미를 알아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뇌리에는 자기 백성을 돌보는 자애 가득한 하느님이 자리 잡아 갔을 것입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 에디트가 체험한 하느님은 유다인들이 공경해온 용서하시는 하느님, 해방하시는 하느님, 당신 백성을 섭리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무신론을 거쳐 오랜 철학적 사유와 실존적 고민을 통해 돌아가 훗날 에디트가 만난 하느님은 어린 시절 체험한,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멀리 떠나보낸 하느님이었습니다.


사춘기에 체험한 부정적인 하느님(1903~1921년)

에디트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게 된 것은 사춘기로 접어들면서부터였습니다. 열네 살이 되면서 에디트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 철이 들면서 삶의 의미에 대해, 진리에 대해 묻기 시작한 에디트는 그런 실존적인 물음에 대해 전혀 해답을 주지 못하는 하느님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개인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을뿐더러 다른 민족은 배제한 채 유다인들과만 통교하시고 영향을 미치는 하느님, 에디트에게 그런 하느님은 보편적인 진리를 간직한 분이 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삶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저 높은 옥좌에 앉아 관망하기만 하는 하느님은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외삼촌 가운데 한 분의 자살을 경험하면서 에디트의 마음에는 결정적으로 무신론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경제적인 실패로 인해 자살을 선택해야 했던 외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에디트는 유다교가 현세적인 종교에 불과하며 결코 죽음을 넘어선 영원에 대한 희망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그런 제한된 축복과 행복밖에 줄 수 없는 하느님이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며 반문을 거듭한 에디트는 결국 무신론에 이르게 됩니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25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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