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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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목] 외국인 노동자의 경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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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2 ㅣ No.95

외국인 노동자의 경험담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 이어금(중국 조선족 동포)

 

우리 중국에 사는 조선족 동포들은 고국인 한국을 찾아가기 위해 애를 씁니다. 많은 이들이 사기 피해를 당하면서도 한국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밀입국을 하다가 죽음을 당하기도 하면서도 한국에 물밀듯 밀려오고 있습니다. 저도 1997년에 중국 연변에서 살던 중 돈을 벌어 보고자 산업 연수생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큰 꿈과 기대를 가지고 찾아 왔지만 한국에서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여 만원의 돈을 지급하고 한국에 왔는데 연수생 생활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루 13시간 정도 일을 하는데 월급은 고작 40만 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몸도 피곤하여 견딜 수 없었지만 40만 원 정도를 받아 가지고서는 한국에 올 때 꾸어 쓴 돈의 원금과 이자도 제대로 갚을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합법 체류자인 연수생 신분을 벗어 버리고 도망을 쳐서 불법 체류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100만 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언제 체포되어 추방을 당할지 모르는 두려운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이제야 꾼 돈을 갚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법을 지키는 합법 체류자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고, 법을 어기는 불법 체류자는 100만 원이 넘는 월급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불법 체류자로 나서서 일하는 것이 연수생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고,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어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영어를 섞어서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잘 알아듣지 못해 실수도 많이 하고 혼도 많이 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기도 하였고 고향의 어머니도 그리워했습니다. 손님들 중에 가끔 조선족이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는데 차마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어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어떤 한국인은 옆에 앉아서 술을 따르라고 하였고,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자 불법 체류자로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을 해 겁을 먹고 그날 밤 도망쳐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순간마다 체포되어 추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억울함, 아픔이 계속되었습니다.

 

외로움 속에서 살던 저는 고향 남자 친구인 유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말을 해도 마음 놓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고, 피곤한 노동에서 벗어나 위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방을 얻어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던 우리 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중국에서 한국에 함께 온 남편의 친구 하나가 술만 마시면 종종 우리 집에 찾아 와서 시비를 걸고 때리면서 괴롭혔는데 그 날도 술에 취한 채 집에 찾아 와서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남편에게 강요하여 술을 마시게 하고 또 시비를 걸면서 때리고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남편은 그 친구한테 한 번만 더 때리면 찌르겠다고 칼을 들고 경고를 했지만 그 말도 듣지 않고 친구는 계속 괴롭혔습니다. 남편은 칼을 들어서 발로 차는 그 친구의 다리를 막는다는 것이 그만 그 친구의 허벅지를 찌르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의 다리에서 피가 흐르자 그때서야 제 정신이 든 남편은 친구한테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는 계속 발로차고 주먹으로 치면서 몸부림쳤고 출혈도 더 심해졌습니다. 남편은 구타를 당하면서도 택시를 잡아 억지로 그 친구를 태우고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그 친구는 대동맥이 끊어져 과다출혈로 다음날 아침 사망하였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친구를 죽인 살인자가 된 남편과 저는 멀리 도망을 치게 되었지만 결국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남편은 사람을 죽인 죄로 구속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죄책감에 못 이겨 수감 중에도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면회를 다니던 중에 저의 뱃속에서 생명이 자라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편이 살인 사건으로 구속이 되었는데 임신까지 하게 된 저는 앞길이 캄캄해졌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는 이 땅에서 제 앞에 벌어진 일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에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용기도 없었고 병원에 가서 아이를 떼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혼자 살아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과 중국 동포들을 위해서 일하는 목사님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남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다고 용기를 주시면서 뱃속에 있는 아이는 하느님이 주신 귀한 생명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을 만나고 중국 동포 교회를 만나면서 제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또 목사님과 주변의 도움으로 1999년 11월 29일에 저는 남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목사님은 세상에 희망을 주는 아이가 되라고 하시면서 '희망'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아이를 보면서 저는 제발 희망이 만큼은 건강하게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그런 기도를 하느님께서 못 들으셨는지 저는 또 한 번 가슴이 터지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희망이는 선천성 심실중격결손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숨쉬기 힘든 희망이는 우유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습니다. 몇 모금 먹고 나면 힘들어서 쉬다가 또 먹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습니다.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아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저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곧 나아진다고 하지만 엄청난 수술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저는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불쌍한 내 아들을 구원해 달라고 우리 가정을 구원해 달라고 목사님과 전도사님들과 함께 매일 기도하면서 아픈 가슴을 달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힘든 사람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엄청난 수술비 때문에 희망이를 치료해 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천안 단국대 병원 단우 후원회에서 희망이 수술비를 후원해 주겠으니 병원에 한 번 다녀가라는 소식을 보내 왔습니다. 우리 희망이를 치료할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또 한 번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더 커져만 갔습니다. 그후 희망이는 생후 5개월 만에 천안 단국대 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고 지금은 완쾌되어 아주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 사이 남편도 목사님이 좋은 변호사를 소개해 주시고 탄원서를 계속 넣어 주셔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범행이라는 점과 아이를 낳은 것이 정상 참작되어 올 4월에 2심 재판에서 실형 2년을 언도받았습니다. 정말로 절망뿐이던 우리 가정이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삶을 포기했을 저와 제 남편은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제 남편은 목사님이 넣어 준 성경책으로 주님을 만나서 지금은 교도소 안에서 소망 없는 이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기뻐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너무도 엄청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1년 만에 변화된 우리 가정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누군지 모르시던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들도 지금은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계십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믿음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음의 나락에서 허덕이던 저와 우리 가정을 하느님의 은혜로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느님 나라의 소망을 주신 우리 주님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위해서 밤낮으로 뛰어 다니시며 힘써 주신 목사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저희들도 저희들이 받은 이 모든 것을 똑같이 베풀며, 섬기며 또 복음을 전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메르체데스의 추억 - 이종범(본지 편집부)

 

3년 반 동안 잘 다니던 회사에서 주는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을 들고 마치 이웃 도시에 놀러가듯 간단히 가방을 싸고 무턱대고 나선 유학길이었다. 한국에서 일상화된 유일한 독일어인 '아르바이트'의 나라가 아닌가. 그러니 돈벌어 공부할 방법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말 그대로 무작정 나섰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독일은 미국보다 '아르바이트'의 기회가 더욱 제한된 나라였다. 외국인 학생의 경우 법으로 학기 중의 노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오직 방학 동안에만 곧 '아르바이트'(Arbeit)가 아닌 '페리엔좁'(Ferienjob)을 그것도 8주 정도만 할 수가 있었다. 독일에서 아르바이트는 정식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적인 것이다. 정식 노동자를 독일에서는 '아르바이터'(Arbeiter)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에서처럼 외국계의 싸구려 음식 체인점에서 시간제 일을 하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독일의 경력이 있는 아르바이터는 보통 대학 교수와 맞먹는 또는 그보다 나은 급여를 받는다. 그러니 외국에서 이제 막 독일 땅에 발을 디딘 학생에게 아르바이트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가져온 돈은 반 년도 안 되어 바닥이 난 데다 방학은 시작되었다. 그러니 페리엔좁이라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메르체데스 벤츠 자동차(독일에서는 벤츠가 아니라 메르체데스라고 한다.)를 생산하는 다이믈러 벤츠 공장에서 1주일에 40시간씩 4주간 노동을 할 수 있는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운 좋게 다시 4주를 연장하여 총 8주를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실제적으로는 학생으로서 페리엔좁을 얻은 것이지만 형식적으로는 4주간의 고용 계약을 맺은 정식 노동자였다. 그래서 정식 노동자처럼 모든 보험은 물론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1990년 당시 보통 학생들의 페리엔좁은 시간당 10마르크(약 5,500원)였다. 그러나 메르체데스는 시간당 30마르크(약 16,500원)를 주었다. 그리고 토요일에 일하면 그 두 배, 곧 시간당 60마르크를 주었다. 8시간씩 교대 근무를 했기 때문에 야근 수당도 규칙적으로 나왔다. 이는 정식 노동자와 전혀 차별이 없는 대우였다. 인사부에서 고용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담당 여직원이 내가 다니던 튜빙엔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순간 한국의 최고의 대기업에 철학과 출신은 몇 명이나 될까 잠시 생각을 했다. 역시 철학을 아는 나라의 대기업답다는 생각을 하며 사장에게 마음으로 존경의 인사를 보냈다.

 

내가 한 일은 주로 메르체데스 중에도 최고급에 속하는 에스클라세(S-Klasse) 자동차 기어박스 콘솔의 나무 장식을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곧 먼지 털고 흠이 없나 빛에 비추어 보는 매우 단순한 일이었다. 그리고 50분간 일하면 정확히 10분간 휴식을 취했다. 벨소리가 크게 나기 때문에 시끄러운 공장에서도 다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10분도 노동 시간에 포함되었다. 한국식 일 습관에 젖어 있던 나는 휴식 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일을 하다가 동료 노동자들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퇴근 벨소리가 나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모든 노동자들은 샤워한 후에 출퇴근 카드에 도장 찍으러 달려 나간다. 이런 일로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하면서 1991년 당시 환율로 300만 원 가까운 월급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은 독일의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에 비해서 크게 높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독일의 물가가 한국에 비해 크게 높은 편도 아니었다. 생필품비와 주거비는 오히려 당시 한국보다 더 싼 경우가 많았다. 순간이었지만 정말로 공부를 포기하고 그냥 독일의 정식 노동자로 평생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한국에서의 3년 반 동안의 대기업에서의 나의 삶과 극명한 대비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유학길에 오른 1990년 당시 한국에는 현재와는 달리 보통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하고도 야근하고 그것도 모자라 일요일에도 특근을 하는 기업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나는 언어와 문화에 서툰 외국인이었고, 노동자들과 호흡이 맞지 않는 학생이었고, 기술도 부족한 미숙련공이었다. 그러나 메르체데스는 그런 나를 조금도 차별하지 않았다. 그리고 착취를 할 생각은 더욱 안 했다. 더구나 내가 학생이라고 해서 나중에 연말 정산을 통해 모든 세금을 고스란히 환급해 주었다.

 

이렇게 나는 메르체데스에서 외국인 미숙련공이고 임시직을 가진 상태에서 독일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비결이 임금 착취가 아니라는 증거를 몸소 체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독일에는 약 400만 명의 실업자가 있다. 평균 10% 전후의 실업률이다. 그래도 독일의 경제가 흔들리지 않고 더욱 발전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나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인들은 그것도 모르는 것 같아 입맛이 매우 쓰다.

 

[사목, 200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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