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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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사목] 은빛 왕국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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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2 ㅣ No.102

은빛 왕국의 도래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은 먹지 않아. 밀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어. 밀밭은 내게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그건 서글픈 일이지! 그런데 너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거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왕자에게 하는 말이다. 

 

나는 지금도 흰색에 잿빛이 잔잔히 섞인 구름 떼를 보거나, 관악산 약수터 흐르는 물 밑 알루미늄 수관의 잿빛 아른거림을 보아도, 내 어머니의 할미꽃 하아얀 솜털 같은 머리 결을 떠올리고, 아버지 같던 노 스승의 은빛 머리칼을 기억한다. 그러면 그들의 모습 전체가 내게 다가온다. 그것은 자연스레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다. 그리고 은빛 구름이 떠 있는 날은 하늘을 매섭게 가로지르는 찬바람 소리도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노인 이야기가 나오면, 그건 ‘은빛 왕국’에 관한 일이고, 노인 문제가 부상한다고 하면 그건 ‘은빛 왕국의 도래’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외국에 있는 친구나 동료들에게는 ‘The Coming of Silver Kingdom’이란 말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밀밭이 여우에게 그랬듯이 가슴을 흔들며 뭔가를 생각나게 하는 의미 있는 색깔에 관한 것이다. 이건 은빛 현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노인들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라 의미 있는 ‘현상’으로 대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곧 ‘노인 문제’에서 ‘노인 현상’으로 인식을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에선 백발이건 은발이건 거의 볼 수가 없다(이것은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기이하게 보기 시작했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백발을 휘날리며 파리 대학의 교정을 거니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노벨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신경의학자 리타 레비 몬탈치니의 은발은 8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그를 미녀로 만들었다. 필자도 그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깊게 파인 주름들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아름답다”는 찬사가 절로 나오는 것을 들었다. 이는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볼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선 그런 일상적 감동의 기회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우리 나라도 이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는데,1) 은빛 왕국을 구성할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모두 숨어 있는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검은 머리 밑에 자신을 숨기고, 그럴 여유도 없는 사람들은 아예 숨죽이고 있는지 모른다. 노인들은 자신의 아이덴터티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 사회가 감추도록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나라같이 노인 현상을 노인 문제로만 보고자 하는 사회에서는 문제아(?)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적당히 위장하는 것이 속 편할지 모른다. ‘나이는 70대, 몸은 50대, 정신은 40대, 마음은 30대, 노는 것은 20대’라고 그럴듯하게 자위적인 구호 속에서 사회적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의반 타의반’의 극단적 자기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은빛 왕국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노인들의 게토만 형성될 뿐이다. 

 

노인 현상은 매우 미묘한 점을 놓칠 때 단순히 노인 문제가 되어 버린다. 미세한 관찰, 지속적 관심, 폭 넓은 기획, 구체적 실행이 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되찾고 그렇게 하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노력할 때, 노인 문제는 모든 세대와 함께하는 노인 현상으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우리 모두에게 은빛 왕국의 아름다움과 정다운 기운의 혜택을 돌려 줄 것이다. 이제 노인 공경의 전통을 가졌음에도 현대 사회 속에서 노인 배려의 수준은 밑바닥을 헤매는 ‘우리의 문제’(노인 문제가 아니라)를 위해, 몇 가지 짚어 보고자 한다. 1항에서는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2항에서는 노인에 대한 ‘인간학적 의미’에 대해서, 3항에서는 노년기가 지니는 ‘긍정적 가치’에 대해서 살펴본다. 

 

 

1. ‘늙어간다는 것’에 대하여 

 

1) 젊음에의 의지 

 

인간에게 생명에 관해 소원을 하나 빌라고 하면, 이 땅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영생(immortality)을 빌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노인에게 묻는다면, 그 대답은 ‘영원한 젊음’일 것이다. 젊은이들도 그 욕구를 즉각적으로 느끼지 못할 뿐이지 사실 그들도 바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지속적으로 있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장수나 장생이 아니라, 무병장수(無病長壽)이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인 것이다. 

 

다만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젊음에 대한 욕구가 현실적으로 더욱 강해질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현대 산업 사회 이전까지 늙어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이점과 이득이 있었다. 농본 사회와 대가족 제도에서 노인은 두 가지 점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현실적으로 확실히 유지했다. 첫째, 노인은 삶의 지혜와 실용적 지식의 보고(寶庫)였고,2) 둘째, 노인의 위치는 공동체에서 권위의 소재(所在)이자 사회적 분쟁 해결의 기준이었다.3) 

 

산업 사회의 도래와 핵가족의 확산은 먼저 후자를 없애기 시작했다. 곧 권위로서 노인의 위상은 약해져 갔다. 하지만 전자에 대한 노인의 영역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산업 사회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식’이 그래도 필요했던 사회다. 그것은 부의 생산에서뿐만 아니라, 부의 운용에서도 필요했다(그래서 최고 경영자는 그래도 나이가 많았다). 다시 말해 아직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질서가 상징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용적으로도 유지되던 사회다. 

 

후기 산업 사회와 정보 지식 사회의 도래는 노인들이 유지하던 첫 번째 영역조차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식이 아니라, 창조성을 바탕으로 한 지식을 필요로 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출하여 변화를 유도해야 하는 사회에서 노인들의 축적된 지식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은 생활의 지혜라는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산업 사회에서 생산된 문명의 이기는 아직 도구적 성격이 강했다. 냉장고, 자동차 등은 생활의 편이를 가져왔으나, 인간 공동체 구성 자체를 획기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라디오, TV 등 대중 매체도 방송이라는 일방 소통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이라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인터넷 등 디지털 문화는 공동체 구성 방식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탄생하는 수많은 ‘커뮤니티’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생활의 지혜를 제공하는 데 노인들은 제외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지식과 지혜의 영역에서도 젊은이들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것이다. 굳이 말을 만들어 표현하자면 ‘유장유서(幼長有序)’의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최근 서구에서보다 우리 나라에서 유별나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젊음’이 거의 절대적으로 우대받고 ‘늙음’의 사회 문화적 위상이 거의 소멸해 가는 상황에서 영원한 젊음에 대한 욕구는 당연히 강해진다. 그러나 영원한 젊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현대 의학의 마술이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해결해 줄지 모르겠지만, 영생이 유토피아적이라면 영원한 젊음의 실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특히 한국 사회에서) 노인들은 ‘젊음을 가장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난 요즘처럼 내 자신이 젊다는 것을 느낀 적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바로 그가 늙어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젊게 살아야지.”라든가, “나도 DDR했지.” 등도 확실한 늙음의 증거다. 

 

‘젊음에의 의지’는 심리적 스트레스 외에도 현실적으로 ‘젊음 유지 비용’이라는 문제를 가져온다. 단순히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늙어감에 따른 변화를 적당히 조정하며 그것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 청춘’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데는 확실히 돈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빈부 격차의 문제는 노년기에도 심각하게 연장된다. 젊음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노인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오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어떤 작가의 말은 반어적이지만 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늙음에 만족할 때, 늙음을 지탱할 수 있지만, 그 반대라면 늙음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이것은 젊음에도 해당된다.”라는 플라톤의 말은 아직 유효하다. 노인 자신을 비롯해 사회 전체가 늙어 가는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노인 현상은 노인 문제가 되어 버린다. 노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불가능한 ‘젊음에의 의지’가 아니라, 가능한 ‘늙음의 긍정적 수용’이다. 

 

2) 노년기의 연장 

 

“현대의 마술사들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해 놓고, 그래서 노인의 숫자를 잔뜩 늘려 놓고는 …… 그것을 도저히 참아 낼 인내심조차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약 30년 전 유럽의 한 일간지 사설의 일부다. 이것을 보면 이른바 서구 선진국에서 노인 복지 문제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설에서 말한 것처럼, 현대의 마술사들이 인간의 수명을 연장해 놓았다는 것은 사실인가? 이에 대한 이견은 우선 통계상의 문제에서 제기된다. 일반적으로 평균 수명 산출에는 모든 사망 인구의 사망시 나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영아와 유아 사망을 비롯해, 사고사 등, 통계 산출 대상의 사회 공동체 안에서 일정 기간 동안 일어나는 모든 사망이 포함된다. 현재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은 주로 영아, 유아, 청소년기의 사망률이 저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의학 발전이라는 점에서 보아도 인간 수명이 늘어난 것은, 감염성 질환의 감소, 위생 상태의 개선, 섭생과 영양의 발전에 주로 기인하는 것이지, 의술의 과학적 발전에 의해서 인간 수명이 근본적으로 연장된 흔적은 미미하다는 것이다. 인간 체질이라는 면에서 보면 현대 사회 이전에도 장수할 사람은 현재의 기대 수명 이상으로 장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65세 이상의 고령 인구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수천 년 동안 성인의 기대 수명이 근본적으로 특별히 연장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좀더 전문적 연구가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위의 논쟁을 차치하고라도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인간 수명이 정말 연장되고 있는지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은 수명 연장의 신화가 숨기고 있는 또 다른 비밀을 밝힐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명 연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노년기의 연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곧 늙음의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25세 전후에 이미 체세포의 쇠퇴기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밀히 말해 25세를 정점으로 성장의 상향선은 멈추고 노화의 하향선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과학과 의학의 발달은 이 노화의 하향선을 계속 완만하게 연장해 온 것일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2025년쯤 되면, 개인별 유전자의 기능을 밝혀 내 훼손된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이식하는 기술로 인간의 평균 수명이 150세 정도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성장의 상향선을 완만하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150년을 반으로 나누어, 25세에 해당하는 육체적 상태에 이르는 기간을 75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지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더더구나 유전 공학의 발전에 따른 신체적 개선이 150세까지 항상 20대의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유전 공학이 불로장생과 무병장수를 모두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구가 잘 진행되어 간다 해도 그 중 반쪽만을 보장할 수 있을 뿐이다. 곧 장생과 장수는 보장하지만, 무병과 불로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오늘날 수명 연장의 비밀스런 진실은 노년기를 끊임없이 연장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오래 산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노년기 연장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 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좀 그로테스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넓게 보아 25세 이후의 모든 연령층을 고려의 대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쇠퇴 연령의 관점에서만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이유도 얼마든지 있다. 

 

앞으로 각종 전자 문명 이기의 사용에 따른 부작용과 질병은 젊은 연령층에서 확실한 현실로 등장할 것이다(그것을 어릴 적부터 사용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또한 질병 치료의 능력이 발전하는 만큼 질병을 발견하는 능력도 커지는 법이다. 따라서 크고 작은 질병의 다양화를 배제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는, 취업 기대 연령의 하향화와 창의력 개발에 따른 조기 사회 진출로, 젊은 나이에도 이른바 기성 세대로 몰리는 현상을 예측해 볼 수 있다. 곧 ‘준(準)노인’이 늘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앞으로 노인이라는 사실이 별난 것이 아니라, 젊은이라는 사실이 별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노인 문제를 ‘특별한’ 것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점 더 폭넓은 연령층을 포함하게 되는 노년기의 인구를 단지 특정 연령층의 문제로 여길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현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다. 

 

 

2. 인간학적 의미 

 

1) 인권의 문제 

 

우리 나라에서는 노인 현상이라고 하면 곧 노부모 모시는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아직 시대의 중요한 현상을 사회화하기보다는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보고자 하는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노인 현상을 효도의 맥락에서 다루는 경향도 매우 강하다. 한 예로, 치매 환자를 병원에 진찰받으러 데려 갔는데,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의사가 호통치는 경우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면서도 방송사에서 노인을 희화화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 것도 우리 사회의 특별한 현상이다. 노인의 이상한 말투와 몸짓을 개그의 소재로 삼고, 더구나 노인들을 출연시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게 하고는 배꼽을 잡고 웃는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방송을 노인들이 많이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노인들은 여가의 상당수를 방송 시청에 할애하기 때문이다. “손자들과 함께 방송을 보다가 노인을 비하하거나 취약한 면을 부각하는 장면이 나오면 TV를 끄고 싶어도 못 끈 채 안타까워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노인들이 많다.”라는 어떤 노인회 회장의 말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는 장애인 등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에 특별히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을 위한 자원 봉사 활동도 늘고 있는 실정이다. 방송에서 장애 때문에 나타나는 장애인의 이상한 행동을 희화화한다면 아마 그 방송사는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노인들에 대해서는 왜 허용되는가? 특히 장애인들을 위한 구체적 배려(공공 시설 등)는 - 아직 부족한 점이 있지만 - 몇 년 전에 비해 많이 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장애를 느끼는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매우 미미한 상태다. 

 

“늙음은 그 자체로 병이다”(Senectus ipsa est morbus). 기원전 2세기 로마 시대의 극작가 테렌티우스의 말이다. 혹 이 말이 노인들 귀에는 거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크고 작은 신체적 장애가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넓게 보아 이미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누구에게나 오는 현상이다. 노인들이 계단을 빨리 오를 수 없다든가, 귀가 잘 안 들려서 자신도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한다든가, 치아가 부실해 음식을 잘못 씹는다든가,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 등은 모두 신체적 장애다. 노인들에게 “당신들도 젊은이처럼 할 수 있다.”라는 헛된 자존심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노인들의 핸디캡을 사회가 나누어 가져야 한다. 

 

우리가 장애인에게 특별한 배려를 하는 것은 그들의 인권을 위해서다. 곧 그들을 건강한 사람과 동등하게 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태도이다. 늙음이라는 신체적 장애를 느끼는 노인들에 대한 배려도 그들의 인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어르신을 잘 모시는 것을 효도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인권의 관점에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효의 전통을 현대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이어가도록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한편으론 효도의 맥락을 가정의 테두리에만 놓아두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를 가정 밖의 사회적 맥락에만 놓아두기 때문이다. 

 

노부모에 대한 효도가 좀더 보편적 차원을 획득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세대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필자는 장애인을 위한 자원 봉사에는 열심인 젊은이가 자립 능력이 없는 병약한 노부모 모시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보았다. 그리고는 효도의 시대착오적 측면을 적극 비판하는 것을 보았다. 보편적 관점에서 보면 노부모를 잘 모시는 것은 오히려 효도가 아니라, 인권 존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인권은 그것이 누구의 인권이든 언제 어디서든 존중되어야 한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말한다. “어떤 사람이 늙어서도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가 언제 어디서나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한 인간으로서 대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듯 남을 대접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서로 보편적 인권을 찾아 주고 찾아가는 길이다. 곧 남녀노소에 대한 사회적 차별 없이 모두 함께 어울려 인간다운 삶을 사는 길이다. 

 

2) 자유의 역설 

 

노년기는 자유의 역설을 가장 심하게 경험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언급했듯이 나이 들면서 오는 크고 작은 신체적 장애는 바로 ‘신체적 부자유’를 가져온다. 몸이 말을 안 들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가장 큰 부자유 가운데 하나다. 또한 노인들은 경제적 부자유도 많이 경험한다. 일부 부유 계층을 제외하고 노인이 되면서 경제적 자립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우리 나라처럼 사회 보장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경우 노인들의 경제적 부자유는 심화된다. 

 

반면 노인들은―개인 차이는 있지만―정신적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나이 들면서 지혜롭게 된다면 그 자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이 말했듯이 “늙어서 가장 신나는 일은 걱정할 일이 줄어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자유가 온갖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면 노인이 되면서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그것은 욕망에서 해방이 아니라 욕망의 포기라고 할지 모른다. 그것이 포기이든, 체념이든 욕망을 어떻게 해서든지 실현하고자 하는 구체적 시도에서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더 나아가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면 자유의 가능성은 더 커진다. 

 

반면 노인이 되면서 자기 자신에게 더욱 집착할 가능성도 있다. 흔히 말하듯 완고해지는 것이다. 이해심이 많아질 가능성과 완고해질 가능성은 같은 비율로 존재한다. 전 독일 수상 아데나워(K. Adenauer)가 대만 총통 장개석(蔣介石)을 보고 한 말은 유명하다. “장개석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이미 너무 늙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데나워는 장개석이 너무 자기 자신에 집착하고 완고해져서 정치적 능력을 상실해 가는 것을 빗대서 한 말이다. 그런데 당시 장개석의 나이 76세였고, 아데나워의 나이 88세였다. 장개석은 비교적 신체적으로 건강했고, 아데나워는 그렇지 못했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다는 것은 정신력을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 

 

신체적 부자유는 정도의 차이일 뿐 어떤 노인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정신적 자유와 부자유의 가능성은 노인들이 하기 나름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상당수 노인들은 신체적 젊음을 위한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 헬스 클럽 이용과 등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적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은 무리한 운동으로 탈이 나는 경우도 있다. 

 

신체적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정신적 건강에 소홀하면 사회적 소외의 가능성은 더 커진다. ‘아무리 건강한 노인도 병약한 젊은이 못 따라 간다’는 속담도 있다. 신체적인 면에서 젊은이를 앞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훨씬 더 가능하다. 디지털 문화의 도래로 실용적 지식과 개별적 커뮤니티에서의 생활 지혜라는 면에서는 노인들의 입지가 좁아졌지만, 세상을 전체적으로 보는 능력에서는 얼마든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백발과 깊은 주름은 바보도 현자로 만든다’는 서양 속담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노인 스스로가 정신 건강을 위해 노력했을 때이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노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젊은이 따라하기 식이나, 아니면 늙음에 자포자기하는 식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년기는 ‘자유를 시험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학적으로 보면 가장 의미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은 자유일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몰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노년기는 다양한 차원에서 부자유와 자유가 가장 극명하게 혼재(混在)하는 시기다. 그러면서도 지혜롭게 자유를 쓸 줄 아는 가능성이 주어진 시기다. 그래서 자유를 위해 도전해 볼 만한 시기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도전하는 것은 아름답다.”라고 한다. 그래서 시간에 대해서도 도전한다. 늙어가면서도 젊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 한 예다. 그러나 늙어가면서도 진정으로 해 볼 만한 도전은 자유를 위한 도전이다. 시간에 대한 도전에는 실패라는 말이 미리 써 있지만, 자유를 위한 도전은 늘 가능성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3. 노년기의 긍정적 가치 

 

1) 사회적 자산 

 

우주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늙고 죽어 가는 것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소멸이 없다면, 공간은 점점 포화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4) 소멸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것이다. 문제는 노년기가 사회적으로도 긍정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 여부이다. 더 나아가 노인들의 긍정적 가치를 노인들 스스로나 사회 구성원들이 의식하고 있는지 여부이다. 

 

더구나 노인 인구의 증가는 - 65세 이상의 공식적 고령 인구의 증가뿐만 아니라, 1항 2)절에서 언급한 ‘준노인’의 증가를 포함한 - 노인들의 긍정적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의식하는 것을 넘어서 그 가치를 발굴해야 할 필요성을 가져왔다. 이제 점점 더 폭 넓은 연령층을 포함하게 되는 노년기의 인구는 우리 모두에게 그들을 사회적 자산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안겨 주었다. 

 

또한 좀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앞으로 피부양자와 부양자 사이의 숫자 대비상,5)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제대로 부양할 수 있는 사회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노인들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사회만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점점 더 ‘노년’이라는 인생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곧 노년기는 퇴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중요한 사회적 기준으로 되돌아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시대적으로 바른 판단일 것이다. 

 

이제 사회적 자산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노인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 젊은 세대 위주의 사회 의식과 취업관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는 이른바 IMF 사태로 노동 가능 인구이지만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다면 무차별적 조기 퇴출을 겪었다. 그리고 또 다른 위기의 순간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활동 영역에 따라 합리적인 노동력 배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일정 업종에서는 오히려 정년의 연장이 필요하다. 이웃 일본에서는 벌써 ‘평생 현역 사회’라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고 있다. 미국 등 서구 선진국에서는 업종별로 능력 있는 노인 노동력을 흡수하기 위해서 기업간 경쟁을 하고 있다. 

 

둘째, 아직까지는 사회적 경험과 지혜의 보고로서 노인의 중요성은 남아 있다. 그것은 문명 발전이 항상 ‘혼합의 시대’를 거치기 때문이다. 문명의 전환기에는 각 문명 요소들의 겹침 현상이 상당 기간 지속된다. 오늘의 노인 세대는 이른바 N세대, M세대 등 미래의 사회를 이끌 세대들과 문명적 ‘혼합의 시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인은 역사를 유지하며, 다양한 공동체 사이의 연결을 회복할 고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요즘 시대의 화두로 부각하고 있는 ‘느림의 미덕’을 가르칠 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노인의 언어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사회가 노인성 치매에 걸린다.”라는 경고성 발언을 차치하고라도, 노인의 말과 지혜는 사회적 자양분으로 남아 있다. 

 

셋째, 노인을 생각하는 것은 미래지향적 태도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각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어린 시절과 젊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에 관한 것이지만, 노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어린 시절과 젊음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사랑이지만, 노인에 대한 사랑은 곧 자신의 미래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노인에 대해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미리 학습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넷째, 노년기가 사회적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물론 노인 스스로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노인들 스스로 사회 참여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신체적으로는 노인들 나름대로 사회 활동을 위해 체력과 근력을 기본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이것은 젊어지기 위해서 하는 무리한 운동과는 다르다). 일부 우리 나라에서 오도(誤導)되고 있는 무리한 운동이 아닌, 자신의 신체 조건에 맞는 운동을 택해야 한다. 정신적으로는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 창조성이 있는 활동을 조금씩 하는 것이 좋다. 컴퓨터 활용을 배우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그것을 못한다고 해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 

 

이 모든 것이 어울리면 ‘노인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신세대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 함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는 뜻이다. 

 

2) 다양성의 제공 

 

이탈리아 작가 파베제(C. Pavese)는 “늙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영원히 아이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이 들고 늙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가 없다. 노인은 그 스스로가 세상에 대한 다양성을 축적하고 있다. 우리가 인생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양성의 축적’이다. 그리고 노인 세대는 다양한 세대들이 모인 사회 속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존재한다. 

 

또 하나 우리가 유심히 관찰할 것은 앞으로 노인 세대는 하나의 범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노인’이라는 말이 포함하는 연령층의 폭이 매우 넓어지기 때문이다. 한때는 사회적으로 60대면 노인이던 것이, 70대로, 더 나아가 80대로, 앞으로는 90대로 연장되어 갈지도 모른다. 이것은 노인의 범주가 밀려 나간다는 뜻이 아니다(그렇게 착각하고 싶겠지만). 오히려 그 만큼 노인의 범주가 넓어진다는 뜻이다.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준노인’을 포함시키면 매우 다양한 범주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예를 들어, 60대 노인과 90대 노인을 여러 가지 면에서 똑같은 범주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년기는 그 자체로 다양한 현상이 된다. 

 

한 사회에 폭 넓은 노인 세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통시적 다양성’(Diachronic Variety)6)을 제공하는 것이다. 곧 변화의 속도가 빠른 오늘날 각기 다른 시대를 산 세대들이 공존함으로써 한 사회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잘 이용하는 것은 우리의 활용 능력과 각 세대를 대하는 자세에 달려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각 세대는 다른 세대에게 해 줄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각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대의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오늘날 각각의 세대가 그 자신의 편협한 영역을 넘어 개인의 발전과 더불어 사회 공동체 속에서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세대라는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그것은 또한 사회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기도 하다) ‘세대의 타임머신’을 타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세대의 타임머신을 타느냐 못 타느냐 하는 것은 미래 발전 전망의 명암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 구성원들이 세대의 타임머신을 타고 세대의 다양성을 즐기기 위해서는 각 세대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독특하고 독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세대 간의 독특한 차이가 없다면 세대의 타임머신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만―마치 그것이 상위 가치라는 선입견 때문에―자기 정체성을 지키거나 더 나아가 그것을 내세우는 사회는 획일적인 사회다. 다른 세대가 젊음의 권력을 따라가는 사회는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독창성을 필요로 하는 세계적 추세에 뒤떨어질 것이다. 노인 세대는 다른 세대와 차별되는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젊은 세대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을 독창적 자세로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사회도 그것을 받아 줄 만큼 성숙해야 한다. 

 

이 글의 처음에 든 머리 색깔의 은유를 혹 과민한 반응이라고 생각한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색깔 자체가 아니다. 모두 획일적으로 검은 머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정신, 그리고 사회 문화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파고들어 가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경우 미세한 것이 큰 문제를 담고 있는 법이다. 각개인이 정말 자유롭게 아름다운 개성을 즐기기 위해서 검은 머리를 선택한다면 적극 권장할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사회 문화적 억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다시 생각할 일이다. 

 

프랑스 배우 쟌느 모로(Jeanne Moreau)는 남들이 아름답다고 했던 그녀의 젊은 모습과 빗대어 늙어서 주름진 얼굴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왜 내 주름들을 없애 버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들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는데, 내 인생 전체를 주고 얻은 것인데.” 어떤 이는 이것도 과민한 역반응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백발을 얻기 위해서 수십 년을 기다렸는데!”라고 말할 정도로 노인들은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다양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나라같이 획일화 현상이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는 경우에는 그러한 자세가 더욱 필요할지도 모른다. 은빛 왕국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다양성 구성의 한 축으로 노인들이 활력 있고 자신 있게 존재할 때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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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이 올해 전체 인구의 7.1%이고, 2022년에는 14.3%로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갈수록 ‘후기 고령인구’ 곧 70대 중반 이상의 인구도 급속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 나이가 들면 인생의 지혜를 터득한다는 좀 추상적 의미 외에도, 한 사회의 부(富)의 생산에도 노인들의 지식은 필수적이었다. 그들의 경험에 바탕한 실용적 지식 없이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3)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이지만, ‘연장자 우선 순위’라는 것은 분쟁 해결뿐만 아니라, 어떤 결정을 용이하게 하는 기준이었다. 이런 기준은 - 예를 들어, 어떤 단체장 선출에서 동일한 득표시 연장자가 당선된다든가 하는 - 아직 사회의 여러 곳에 조금씩 남아 있지만 앞으로는 ‘용도 폐기’될지도 모른다. 

 

4) 우주의 무한정 팽창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런 입장에 이론(異論)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전문적 논쟁은 피한다. 다만 현재의 일반적 인식 패러다임에서 논지를 전개하는 것이다. 

 

5) 현재 65세 이상의 가상 피부양자의 수는 부양 가능자 12.6명당 한 명이다. 지금 추세라면 2020년에는 5.7명당 한 명이고 2050년에는 2.4명당 한 명 꼴로 예상하고 있다. 

 

6) 이 말은 개념을 주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자가 만든 것이다. 통시적(diachronic)이란 말은 원래 언어학에서 주로 사용한 것인데, 여기서는 ‘시대를 관통하여’ 또는 ‘여러 시기에 걸쳐’라는 글자 뜻대로 사용한 것이다.

 

[사목, 2000년 11월호, 김용석(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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