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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사목]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노인들에게 보내는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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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2 ㅣ No.10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노인들에게 보내는 서한

LETTERA AGLI ANZIANI

(1999. 10. 1.)

 

 

노인 여러분께!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저희는 나는 듯 가 버리나이다”(시편 89,10).

 

1. 이 시편이 쓰여질 때만 해도 70세는 고령이었고, 70세 이상 사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의학의 발달과 사회 경제적 여건의 향상으로 전세계적으로 수명이 상당히 늘었습니다. 그래도 인생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생이라는 선물은 온갖 수고와 고통이 따르기는 하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하여 결코 싫증나는 법이 없습니다.

 

저 자신도 노인이기에 노인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저는 지금까지 제게 풍성한 은혜와 기회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금세기의 역사와 맞물려 있는 제 인생의 단계들을 기억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그 가운데에는 제게 특별히 소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평범하였던 일과 놀라웠던 일, 행복하였던 시절과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섭리의 손길을 떠올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보살피시고”1)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십니다”(1요한 5,14). 시편 저자와 함께 저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하느님, 젊어서부터 저를 가르치셨으니, 묘하신 그 일들을 이때껏 일컫나이다. 나이 늙어 백발이 될 때라도, 하느님, 이 몸을 버리지 마옵소서. 주님의 팔, 주님의 그 힘을 이제와 뒷사람에게 전하리이다”(시편 70, 17-18).

 

저는 애정을 가지고 다른 언어와 문화권에 속한 노인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국제연합이 때마침 노인의 해로 정한 올해에 여러분께 이 서한을 쓰는 것은 노령의 짐 때문에 흔히 온갖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사정에 사회 전체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교황청 평신도평의회는 몇 가지 유익한 성찰거리를 제시하였습니다.2) 이 서한에서 저는 다만 같은 노인으로서 여러분께 영적인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의 이 시기를 개인적으로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따라서 같은 나이의 다른 사람들과 더 친밀한 만남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공동 문제를 함께 성찰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저는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주시고 섭리로 우리를 도와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하느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2. 노인 여러분, 우리 나이에 과거를 되돌아보며 평가를 해 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회고의 시선은 우리가 살아 오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상황들을 좀더 침착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세월은 우리의 경험들을 좀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 주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누그러뜨립니다. 슬프게도 우리 인생은 많은 부분이 고난과 시련으로 차 있습니다. 때때로 어려움과 괴로움이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인내심을 시험하고,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매일의 고난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개인의 성숙과 인격 형성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개의 사건들을 뛰어넘어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입니다. 옛 로마 시인이 말하였던 것처럼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날아가 버립니다.”3) 사람은 시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사람은 시간 안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며 죽습니다. 탄생으로 인생의 첫날이 정해지고, 죽음으로 인생의 마지막 날이 정해집니다. 그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다 가는 역사의 ‘알파’이고 ‘오메가’이며, 시작이고 끝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그리스 말의 이 두 알파벳 글자를 묘비에 새김으로써 이를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의 인생이 유한하고 덧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영적인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리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얻습니다. 더 나아가, 신앙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로마 5,5 참조)으로 향하게 하고, 궁극적 부활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합니다. 부활 성야에 교회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일컬으며 이 두 그리스 말 글자를 사용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작이요 마침이요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대도 세기도 주님의 것입니다.”4) 인간의 경험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만, 그리스도에 의하여 불멸의 지평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과 끝을, 인간과 하느님을 결합시키시고자 인간들 가운데 인간이 되셨습니다.”5)

 

 

희망의 미래를 향한 복잡한 세기

 

3. 노인들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긴 여정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고 또 그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지혜 4,13 참조). 또 저의 동시대인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므로 저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 20세기를 거쳐 왔습니다. 과거의 복잡한 유산을 물려받은 이 20세기에 우리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역사상의 다른 많은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20세기도 명암이 엇갈렸습니다. 모든 것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긍정적인 면이 부정적인 면을 상쇄하거나, 부정적인 면에 대한 공동 의식의 유익한 반작용으로 부정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례없는 재난이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한다는 것은 부당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국가 사이의 영토 분쟁이나 인종 사이의 증오로 여러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만 생각하여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남반구의 사회 구석구석에 파고드는 극심한 빈곤 상황, 인종 차별과 같은 부끄러운 현상, 많은 나라에서 자행되는 계획적인 인권 침해 등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세계 대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금세기 전반에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있었습니다. 사상자와 파괴의 참상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수백만의 군인과 민간인을 죽였고, 청소년과 어린이의 목숨까지도 수없이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은 어떠하였습니까?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서, 비교적 평화로웠던 몇십 년이 지난 뒤 일어났던 이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 때보다 훨씬 더 비참하였고, 각 국가와 대륙의 생활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미증유의 적개심이 동원되었던 전면전으로서, 무방비의 시민들에게 치명타를 가하였고, 모든 세대를 파멸시켰습니다. 전선 곳곳에서 전쟁의 광기 때문에 치른 대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행되었던 대학살 또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고, 이는 우리 시대의 골고타로 남아 있습니다.

 

금세기 후반은 여러 해 동안 냉전의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대립하는 거대한 두 이데올로기 진영 사이의 갈등, 곧 동서의 갈등은 광적인 무기 경쟁과 인류를 전멸시킬 수 있는 끊임없는 핵전쟁의 위협을 몰고 왔습니다.6) 다행히 유럽의 억압적인 전체주의 체제가 몰락함으로써 역사의 저 어두운 장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진리와 정의의 무기에 의존한 평화로운 투쟁의 결실이었습니다.7) 이를 계기로 민족들 사이의 평화롭고 우호적인 공존의 확립을 목표로 한, 힘들지만 결실 풍부한 대화와 화해의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나라가 아직도 평화와 자유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인종적 갈등으로 끔찍한 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폭력 분쟁은 최근 몇 달 동안 큰 우려를 자아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피를 흘렸고, 많은 파괴가 자행되었으며, 많은 증오심을 키웠습니다. 마침내 무력 충돌은 끝이 나고 이제, 다가오는 새 천년기를 위한 재건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른 대륙들에서도 계속해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 때때로 대량 학살과 폭력이 발생하고 있지만, 세계의 언론들은 이를 모두 너무 쉽게 잊고 있습니다.

 

 

4. 이러한 기억과 고통스러운 사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는 금세기에 나타났던 많은 긍정적인 표징들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표징들은 제삼천년기를 위한 희망의 수많은 원천입니다. 여러 가지 모순, 특히 인간 생명의 존중과 관련하여 많은 모순이 있었지만,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의식이 증대하였고, 장엄하고 구속력 있는 국제적 선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국가 관계와 국제 관계에서 민족 자치권에 대한 의식이 꾸준히 발전하여 왔습니다. 이는 소수 민족에 대한 존중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부 유럽에서와 같이 전체주의 체제의 붕괴는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의 가치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사회 정의를 결합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세계의 종교들이 더욱 굳은 결단력으로 종교간 대화를 이끌어 가고자 노력하는 것 또한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로 여겨야 합니다. 종교간 대화는 종교를 세계 평화와 일치의 근본 요인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여성의 존엄에 대한 인식도 증대되어 왔습니다. 물론 가야 할 길이 아직 멀었지만 길은 열린 것입니다. 더욱더 희망적인 것은 통신 수단의 급성장입니다. 통신 수단은 현대 과학 기술 덕택에 국경을 초월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우리가 세계의 한 시민임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은 생태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증대로서, 이는 격려할 만한 일입니다. 또 다른 희망의 원천은 의학계의 큰 진보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과학의 기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모든 일을 생각해 볼 때, 금세기의 최근 마지막 몇 년은 평화와 진보를 위한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세대가 겪었던 그 역경에서 우리의 노년을 밝혀 줄 빛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원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시련은 희망을 없애지 못하며, 오히려 희망의 토대가 됩니다.”8)

 

금세기와 제이천년기가 저물어 가고, 인류의 새 시대의 여명이 지평선 위로 밝아 오는 지금,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화살같이 날아가는 시간에 대하여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자비한 운명에 체념하기보다는 아직 우리 앞에 남아 있는 날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의 가을

 

5. 노년은 무엇입니까? 흔히 노년은,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9) 인생의 가을이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계절과 자연의 연속적인 변화가 시사하는 유추를 따른 것입니다. 산과 들, 풀밭, 계곡과 숲, 나무와 식물 등 한 해 동안 일어나는 자연 경관의 변화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체 주기와 우리도 그 일부분을 차지하는 자연의 순환 사이에는 긴밀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다름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다른 모든 실재와 구별됩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의식이 있고 책임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 차원에서마저 연속적인 다양한 단계들을 경험하고, 모든 것이 한결같이 무상함을 느낍니다. 시리아의 교부 성 에프렘은 우리 인생을 손가락에 비유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인생은 겨우 한 뼘 길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인생의 각 단계는 서로 다른 손가락처럼 각각 독특한 특성이 있고 “다섯 손가락은 인간이 나아가는 다섯 단계를 나타낸다.” 하고10)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년기와 청년기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로서 전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며, 자기 능력을 깨닫게 되면 성인기를 위한 계획을 세우지만, 노년기에도 그 나름대로 이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성 예로니모가 말한 대로, 정열이 가라앉으면서 노년에는 “지혜가 늘고 더욱 성숙한 의견을 가지게 됩니다.”11) 어떤 의미에서 노년은 일반적으로 경험에서 오는 그러한 지혜가 무르익는 시기입니다. “시간은 위대한 스승이기 때문입니다.”12) 시편 저자의 다음과 같은 기도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날 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시편 89,12).

 

 

성서 속의 노인들

 

6. 설교자는 “젊음도 검은 머리도 물거품 같은 것”(전도 11,10) 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주저하지 않고, 때로는 꾸밈 없는 사실주의로 인생의 무상함과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다. ……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전도 1,2). 옛 현자의 이러한 매서운 경고를 모른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이 많은 우리 노인들은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그러한 경고를 특별히 잘 이해합니다.

 

이러한 씁쓸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성서는 삶의 가치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 참조) 만들어지며, 인생의 각 단계에는 그 나름의 아름다움과 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말씀은 노년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장수를 하느님 은총의 징표로 여기고 있습니다(창세 11,10-32 참조). 노년의 특권이 강조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경우에 이러한 은총은 약속의 형태를 띱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12,2-3). 아브라함 곁에는 사라가 있습니다. 사라는 자기 몸이 늙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노쇠한 육체의 한계 속에서, 모든 인간의 약점을 선으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한 여인입니다.

 

모세 또한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일을 해내었을 때 그는 젊은이가 아니라 노인이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노인들의 여러 본보기 가운데서 저는 토비트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토비트는 겸손하고 용기 있게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며, 눈이 먼 뒤에도 하느님의 천사가 찾아와 그의 어려운 형편을 다시 펴 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감내하였습니다(토비 3,16-17 참조). 또한 순교를 통하여 뛰어난 덕행과 용기를 증언하였던 엘르아잘도 있습니다(2마카 6,18-31 참조).

 

 

7. 그리스도의 빛으로 충만한 신약성서에도 훌륭한 본보기가 되는 노인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는 첫머리에 “나이 많은”(1,7) 부부, 곧 세례자 요한의 부모 엘리사벳과 즈가리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가 그들에게 내립니다(루가 1,5-25.39-79 참조). 이미 노인이 된 즈가리야는 그에게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루가 1,18) 마리아께서 방문하셨을 때, 그분의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이렇게 외칩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루가 1,42).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자 즈가리야는 ‘예언의 노래’를 부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은 기도의 영으로 충만한 훌륭한 노부부를 봅니다.

 

마리아와 요셉께서는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하시러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십니다. 말하자면 율법에 따라 그들의 첫아들이신 예수님을 봉헌하러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마리아와 요셉께서는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온 시므온 노인을 만납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 감게 되었습니다”(루가 2,29).

시므온 옆에는 안나라는 여든네 살의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을 자주 방문하던 중에 예수님을 보게 되는 기쁨을 맛봅니다. 복음사가는 “이 여자는 예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바로 그 자리에 왔다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이 구원될 날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의 이야기를 하였다.”(루가 2,38)고 전합니다.

 

산헤드린의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도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요한 3,1-21 참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할 때 침향을 섞은 몰약을 가지고 다시 나타납니다. 그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냅니다(요한 19,38-40 참조). 이 모든 본보기는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주며,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우리의 재능을 바치라고 요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복음에 대한 봉사는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이 들어 순교로써 신앙을 증언하도록 부름 받은 베드로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요한 21,18). 이 말씀은 베드로의 후계자인 제게 개인적으로 깊이 와 닿습니다. 그 말씀은 제게 손을 내밀어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나를 따르라.”(요한 21,19) 하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해 줍니다.

 

 

8. 성서 전체에서 발견되는 노인들의 훌륭한 모습을 요약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편 91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의인은 팔마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체드루스처럼 자라나리니, …… 늙어서도 그들은 열매를 맺으며, 진기 있고 싱싱하오리니, 그들은 주님께서 얼마나 바르심을, 저의 바위, 주님께는 하자 없으심을 널리 알리리이다”(13.15-16). 바오로 사도는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편 저자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는 자제력이 있고 위엄이 있고 신중하며 건전한 믿음과 건전한 사랑과 건전한 인내를 갖추도록 가르치시오. 또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는 남을 헐뜯거나 술의 노예가 되거나 하지 말고 경건한 몸가짐으로 선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오. 그러면 젊은 여자들은 늙은 여자들의 훈련을 받아 자기 남편과 자식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2,2-4).

 

이렇게 성서의 가르침과 말씀은 노년을 삶에 완성을 가져다 주는 ‘좋은 때’, 개개인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모든 것이 화합하여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고 ‘마음의 지혜’를 얻게 해 줄 수 있는 시기로 표현합니다. 지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노인은 오래 살았다고 해서 영예를 누리는 것이 아니며, 인생은 산 햇수로 재는 것이 아니다. 현명이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생활이 곧 노년기의 원숙한 결실이다”(4,8-9). 노년은 인격 성숙의 마지막 단계이며 하느님 은총의 징표입니다.

 

 

공동 기억의 수호자

 

9. 과거에는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깊은 공경심을 보였습니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도 “한때 백발 노인에 대한 공경심은 대단하였다.” 하고13) 말하였습니다. 이보다 수세기 전에 그리스 시인 포실리데스는 “백발 노인을 공경하라. 너의 친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처럼 나이 든 현인을 똑같이 공경하라.” 하고14) 충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잠시 오늘날의 상황을 살펴보면, 노년을 높이 평가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직접적인 유용성과 생산성을 우선하는 사고 방식 때문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흔히 인생의 말년을 경시하는 풍조로 이어지고, 노인들 자신도 자신의 삶이 아직도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힘든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안락사를 점점 더 권장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안락사라는 개념이 생명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불러일으켰던 혐오감을 불행하게도 최근에는 많은 사람이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중병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는 병자는 절망에 빠지기 쉽고, 그 가족들이나 그들을 돌볼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그릇된 동정심에 이끌려 합리적인 방법으로 ‘편안한 죽음’이라는 해결책을 고려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명심하여야 할 것은, 도덕법은 “지나친 의학 치료”는15) 거부하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반드시 필요한 정상적인 의학 치료로서 말기병인 경우에 주로 고통을 경감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치료 형태만을 의무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죽음을 가져오는 안락사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의도나 상황과 관계 없이 안락사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악한 행위이며, 하느님의 법에 대한 위반이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모욕입니다.16)

 

 

10. 인생 전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올바른 시각은 영원에 대한 시각을 말합니다. 인생의 모든 단계는 영원을 위한 의미 있는 준비입니다. 영원에 이르는 길을 따라 가는 이 점진적인 성숙의 과정에서 노년 또한 감당하여야 할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도 그 일부에 속하여 있는 더 큰 사회도 이러한 성숙의 과정에서 혜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노인들은 인생의 부침(浮沈)으로 지식을 얻고 성숙에 이르렀기에, 인간사를 더욱 큰 지혜로 바라보도록 도와 줍니다. 노인들은 우리의 공동 기억의 수호자들이며, 사회 생활을 뒷받침해 주고 이끌어 주는 이상과 공동 가치 체계의 탁월한 해석자들입니다. 노인들을 배척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억이 배제된 현대성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가 굳건히 뿌리박고 있는 과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성숙한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에게 귀중한 충고와 지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노령과 명백한 연관성이 있는 인간적 나약함의 표징들은 서로 다른 세대를 하나로 묶는 상호 의존과 필수적인 연대에 대한 요구가 됩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며, 모든 사람의 은혜와 은사에서 풍요로움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시인의 성찰이 여기에 꼭 들어맞을 것 같습니다. “영원한 것은 미래만이 아닙니다. 절대 미래만이 아닙니다! …… 과거 또한 영원에 속합니다. 이미 일어났던 일은 그 때처럼 오늘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다만 생각으로 떠오를 것이며, 그대로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17)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11. 그렇다면 모든 대륙 여러 문화의 건전한 전통들이 매우 높이 평가하여 왔던 노인들에 대한 존중을 우리는 어째서 더 이상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까? 성서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쳐 준거로 삼았던 것은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는 십계명이었습니다. 부모 공경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의무입니다. 이 계명에 대한 충실하고 일관성 있는 적용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성의 원천이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세대 사이에 강한 유대감을 형성해 주었습니다. 이 계명을 받아들이고 성실히 지키는 곳에서는, 노인들이 쓸모 없고 귀찮은 짐으로 여겨질 위험이 거의 없습니다.

 

이 계명은 또한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과 그들이 행한 모든 선행을 존중하도록 가르칩니다. ‘어버이’라는 말은 과거를 가리키며,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세대 사이의 유대를 가리킵니다. 성서에 나오는 두 개의 십계명(출애 20,2-17; 신명 5,6-21 참조)에서, 이 계명은 다른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다루고 있는 두 번째 증거판에 새겨진 계명들 가운데 첫 번째 계명입니다. 더 나아가 이 계명은 약속이 붙은 유일한 계명입니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주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출애 20,12; 신명 5,16 참조).

 

 

12. "백발이 성성한 어른 앞에서 일어서고 나이 많은 노인을 공경하여라”(레위 19,32). 노인 공경은 세 가지 의무를 포함합니다. 다시 말하여 노인을 환대하고 도와 주며, 그들의 장점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많은 지역에서 오랜 관습의 결과로 이러한 일이 거의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특히 경제적으로 더욱 앞서 간 국가에서는 현재의 동향을 반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노인들이 존엄성을 지키며, 결국 아무 쓸모 없는 존재로 끝나리라는 두려움 없이 늙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문화는 노인에 대한 공경과 사랑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노쇠하더라도 사회의 중요한 일부분임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는 신념이 증대되어야 합니다. 키케로는 “젊은이들에게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노인들에게는 나이의 짐이 훨씬 가볍다.” 하고18) 말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정신도 육신의 노화 과정과 관계가 있지만, 끊임없이 영원을 지향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언제나 젊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젊음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선한 양심의 내적 증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감사와 애정과 결합될 때 더욱더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영적으로 늙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장차 올 자유를 위하여 준비된 순간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인간은 내세로, 곧 젊음도 늙음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곳으로 건너갈 것입니다.”19)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놀라운 젊음과 활력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들의 예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인들과 만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서 영감을 얻고 그들의 모범을 위로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사회가 이들 노인의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하기 바랍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 특히 아프리카가 그러한 것 같습니다. - 노인들이 지혜의 ‘산 백과 사전’으로, 더 없이 귀중한 보화인 인간적 영적 경험의 수호자로 마땅히 존중받고 있습니다.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은 일반적으로 육체적 도움이 필요하지만, 미래를 향하여 인생 길을 떠날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에게 지도와 격려를 해 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노인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젊은이들에게도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커다란 사랑과 너그러운 마음으로 노인들을 환대하고 가까이하십시오. 노인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습니다. 집회서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노인들의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그들도 조상들로부터 배웠다”(8,9). “너는 노인들의 모임에 자주 가고 그 중에 현명한 사람이 있거든 그를 가까이하여라”(6,34). “노인이 보여 주는 지혜는 지극히 훌륭한 것이다”(25,5).

 

 

13.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노인들의 평온한 현존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복음화와 관련해서 그렇습니다. 복음화의 효과는 전문적 지식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많은 가정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와 손녀들에게 신앙의 바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노인들이 유익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영역은 이 밖에도 많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라시는 대로 바라시는 곳에서 활동하시며,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이는 인간적인 수단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외롭고 병들었지만 애정어린 충고와 말없는 기도, 참을성 있게 감내하며 받아들이는 고통의 증거로써 용기를 심어 주는 노인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해와 위안을 얻습니까! 육체적인 힘과 활동량이 줄어드는 바로 이 시기에 노인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섭리의 신비로운 계획 안에서 더욱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노인들이 심리적으로 명백히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에도, 사람이 노년을 보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아주 ‘편안함’을 느끼며 남에게 유용한 존재로 남을 수 있는 환경입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의 수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노인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태도를 널리 권장하고, 그들을 가장자리로 내몰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것은 역시 노인들이 가족과 함께 살면서, 노령과 질병에서 오는 더 큰 요구들을 실질적인 사회적 원조로써 보장받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형편상 노인들을 ‘양로원’에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 곳에서 노인들은 친구들을 사귀며 전문적인 치료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설들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러한 시설들은 효율적인 관리뿐 아니라 애정어린 관심으로 노인들에게 소중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양로원의 모든 노인이 가족이나 친구, 본당 공동체의 배려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며 사회에 여전히 유용하다고 느낄 때, 모든 것이 더 쉬워집니다. 노인들,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노인들과 어려움에 놓인 노인들을 보살피는 데 특별히 헌신하는 수도회와 자원 봉사단에게 이 자리를 빌려 칭찬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거나 다른 사정 때문에 불안을 느끼시는 노인 여러분, 여러분께 제가 친밀감과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질병과 고독, 또는 노령과 연관된 다른 여러 이유로 받는 고통을 허락하신다면, 그분께서는 우리가 더 큰 사랑으로 성자의 희생에 일치하여 그분의 구원 계획에 더욱 온전히 동참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은총과 힘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확신을 가집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특히 배우자와 사별하고 생의 끝자락에서 홀로되신 노인 여러분과, 여러 해 동안 하늘나라를 위하여 충실히 봉사하여 왔던 나이 드신 남녀 수도자들, 그리고 고령으로 더 이상 사목 직무를 직접 책임지지 못하는 형제 사제와 주교 여러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는 여전히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여러분께서 여러 사도직 분야에서 하고 싶어하시는 봉사들을 높이 평가하며, 여러분의 오랜 기도의 힘에 의지합니다. 또한 경험에서 나오는 여러분의 충고에 의지하며, 날마다 여러분께서 보여 주시는 복음의 증거로 풍요로워집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주님을 모시고 흐뭇할 기꺼움을, 주님 오른편에서

영원히 누릴 즐거움을 보여 주시리이다”(시편 15,11)

 

 

14.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황혼기’를 더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이나 친구, 친지들의 수가 점점 더 적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황혼기’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를 들면 가족 모임이나 어릴 적 친구들의 모임, 초·중·고등 학교와 대학 동창회, 군대나 신학교의 옛 동료들의 모임에서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선은 우리의 공동체를 관통하며 가차없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곁으로 바싹 다가옵니다. 인생이 우리의 천상 본향을 향한 순례라면, 노년은 영원의 문턱을 바라보는 가장 자연스러운 시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노인들조차 이 문턱을 통과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죄와 맞닿아 있는 인간 조건에서, 죽음은 슬픔과 두려움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어두운 측면을 드러냅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삶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성서의 맨 앞부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창세 2─3장 참조), 죽음은 하느님의 원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악마의 시기”(지혜 2,24) 때문에 죄의 결과로 생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어두운 현실에 직면하였을 때 인간이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셨으나 죄는 짓지 않으신”(히브 4,15) 예수님께서도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셨다는 것은 의미 심장합니다.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태 26,39). 예수님께서 친구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신 눈물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것을 아셨으면서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셨던 것입니다(요한 11,35 참조).

 

죽음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가장 깊은 본능과 모순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릅니다. 인간은 꺼져 가는 육체의 쇠약과 고통에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소멸의 공포에 더 더욱 괴로워합니다.”20) 죽음이 완전한 소멸이고 모든 것의 끝이라면, 이러한 번뇌는 참으로 위로받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생 자체의 의미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들에 대하여 자문하게 만듭니다. 죽음의 어두운 벽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은 인생의 결정적인 종말인가? 아니면 죽음을 초월하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15. 인간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것에 국한하는 지극히 단순한 대답들을 수없이 해 왔습니다. 구약성서의 전도서의 일부 구절에서도 노년을 무너져 가는 건물로, 죽음을 결정적인 완전한 소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2,1-7 참조). 그러나 바로 이러한 비관적 자세를 배경으로, 계시 전체와 특히 복음서에 제시된 희망찬 전망이 빛을 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루가 20,38) 하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느님께서(로마 4,17 참조)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로마 8,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죽음의 문턱을 넘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여 영원이라는 미지의 ‘영토’에 속한 생명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첫 증인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불멸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합니다.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21) 교회의 전례는 이 말씀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이어서 희망을 선포합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22) 그리스도 안에서, 비통하고 당혹스럽기만 한 죽음도 구속되고 변화되며, 심지어 우리를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는 ‘자매’로 계시되기도 합니다.23)

 

 

16. 그러므로 신앙은 죽음의 신비를 밝혀 주고 노년에도 평온함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노년은 이제 더 이상 불행을 예상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완전한 성숙을 목표로 기대에 차서 다가가는 삶으로 여겨집니다. 노년은 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믿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노년은 더욱 열렬한 기도와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봉사에 헌신함으로써 영성 생활을 강화하고자 창조적으로 보내야 할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이 육체적 건강과 지적 성장, 인간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유용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들의 시간과 재능과 경험을 활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사회 제도들은 아주 훌륭합니다. 그러할 때 인생을 하느님의 원초적인 선물로 누릴 수 있는 능력이 보존되고 증대됩니다. 인생을 향유하는 이러한 능력은 영원함에 대한 바람과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바람은 성인들의 삶이 증언하는 것처럼 깊은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 안에서 자라납니다.

 

여기에서 복음서는 늙은 시므온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구세주를 팔에 안아 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 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루가 2,29-30).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 더 살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싶은 마음과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은”(필립 1,23)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였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기쁜 마음으로 순교를 받아들이며, 마음 속으로 성령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소리는 그의 내면에서 솟아나 “어서 아버지께 오라.” 하고24) 속삭이는 ‘생명수’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예들은 이 세상 삶의 가치에 대하여 하등의 의심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곧, 이 세상 삶은 한계와 고통이 있지만 아름다우며, 끝까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그들은 이 세상 삶이 궁극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그리스도교의 시각에서 보면 인생의 황혼기는 하나의 ‘통로’로 보여집니다. 곧, 이 세상 삶과 저 세상 삶을 이어 주는 다리, 이 세상의 덧없고 불확실한 기쁨과 주님께서 당신의 충실한 종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신 기쁨,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하고 말씀하신 그 충만한 기쁨을 연결해 주는 다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충만한 삶에 대한 권고

 

17. 노인 여러분, 저는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께 허락하신 남은 여생을 평온하게 살아가실 것을 권고 드립니다. 동시에, 저는 베드로좌에 오른 지 이십여년이 지나고 제삼천년기의 도래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제 인생의 이 시점에서 갖게 되는 생각들을 여러분과 허심 탄회하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나이 때문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저는 계속해서 인생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저는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끝까지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동시에 저는 주님께서 저를 생명에서 생명으로 부르실 그 때를 생각하며 큰 평화를 느낍니다. 저는 자주 사제들이 성찬례 거행 뒤에, “죽을 때에 저를 당신 곁으로 부르소서.”(In hora mortis meae voca me, et iube me venire ad te) 하고 암송하는 기도를 기쁜 마음으로 바칩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드러내며, 현재의 기쁨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느님의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 보살핌에 미래를 맡기는 기도입니다.

 

 

18. "당신 곁으로 저를 부르소서.” 이것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열망입니다.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누구나 마음 속에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 생명의 주님, 저희가 이러한 사실을 더욱 생생히 깨닫게 하시고, 인생의 각 시기마다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충만한 은총을 맛보게 하소서.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주님의 자비로우신 손에 하루하루를 맡겨 드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오면, 뒤에 남겨 놓게 될 일에 대한 아쉬움 없이 평온하게 그 순간을 맞이하게 하소서. 오랫동안 찾았던 주님을 마침내 만나게 되면, 믿음과 희망의 표징을 안고 저희 앞에 가셨던 모든 이와 함께, 저희가 이 곳 지상에서 알았던 모든 참되고 좋은 것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순례하는 인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이시며 저희의 맏형이시고 생명과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 곁에 저희가 언제나 머무르도록 지켜 주소서. 아멘!

 

바티칸에서

1999년 10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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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정통 신앙」(De Fide Orthodoxa), 2, 29.

2. 「교회와 세상 안에서 노인의 존엄과 사명」(La Dignita` dell’Anziano e la sua Missione nella Chiesa e nel Mondo), 바티칸(1998) 참조.

3. 버질, “Fugit inreparabile tempus”, Georgics III, 284.

4. 부활 성야 전례.

5. 리옹의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Adversus Haereses), IV, 20, 4.

6.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 18항 참조.

7. 「백주년」, 23항.

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로마서 해설」(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10, 2.

9. Cato Maior, seu De Senectute, 19, 70 참조.

10. 「“모든 것이 헛되며 영혼의 고통이다.”에 관하여」(On “All is vanity and affliction of spirit”), 5-6.

11. “Auget sapientiam, dat maturiora consilia.”: 「아모스서 해설」(Commentaria in Amos), II, 263-264.

12. 코르네유, Sertorius, 제2막, 제4장, v.717.

13. “Magna fuit quondam capitis reverentia cani.”: Fasti, V, 57.

14. Sententiae, XLII.

15.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65항 참조.

16. 위와 같음.

17. C.K. Norwid, Nie tylko przyszlosc..., Post Scriptum, I, vv.1-4.

18. “Levior fit senectus, eorum qui a iuventute coluntur et diliguntur.”: Cato Maior, seu De Senectute, 8, 26.

19. 귀국 강연, 11.

2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18항.

21. 「로마 미사 전례서」(Missale Romanum), 위령 감사송, I.

22. 위와 같음.

2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태양의 찬가」(Canticle of the Creatures) 참조.

24.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Epistula ad Romanos), 7, 2.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2000년(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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