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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교회: 50년만에 자유를 얻은 비밀수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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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2 ㅣ No.43

[아시아 아시아] 베트남 교회 : 50년 만에 자유를 얻은 비밀수녀들

 

 

수도복을 입고 공개 활동을

 

베트남 북부지방에 있는 타이빈 교구의 누옌반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는 지난 3월 25일 교구내에 타이빈 도미니코 수녀회를 설립하는 교령에 서명했다. 정부로부터는 지난 2003년에 공식 승인서를 받았으며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서는 2001년에 이미 승인을 받은 바 있다. 팜티킴둑 수녀원장(56세)에 따르면, 상 주교는 수녀회 승인청원서를 1990년대 초에 교황청과 정부에 제출했다고 한다.

 

둑 수녀(베트남에서는 이름 끝 자를 성처럼 써서 부른다)는 이제 수녀들이 수도복을 입고 본당에서 공개 활동할 수 있다면서 “예전처럼 몰래 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공산군이 북부 베트남을 장악한 이후 50년간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수녀들은 수녀원에 살도록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이 나타나면 짚더미 속이나 과수원, 연못, 심지어는 가축 똥통 속으로 숨기도 했다고 밝혔다. 몇몇은 체포되어 며칠간 구금되었다가 집으로 돌려보내지곤 했다. 정부는 수녀원 몇 군데를 몰수한 뒤 학교나 농산물 창고로 쓰기도 했다.

 

수녀들은 현재 벼농사를 짓거나 돼지, 닭을 기르고 전통약을 만들며 생계를 마련하고 있다.

 

원래 타이빈 교구에서 도미니코 수녀회는 매우 컸다. 1939년 교회의 기록에는 서원자가 280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1964년에는 13개 수녀원에 겨우 26명만 남았다. 1954년에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항복한 뒤 수녀 대부분이 탈출했기 때문이다. 당시 성직자와 수도자를 비롯해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남부로 탈출하였다.

 

그 뒤 베트남은 공산당이 장악한 북부와 미국이 지지하는 남부로 분단되었다가 1975년에 공산군이 승리하면서 통일되었다.

 

 

수련수녀 20명이 유기서원을

 

오는 8월 22일에는 이 수도회의 주보성인인 동정성모 축일 기념 장엄미사로 새 본원을 축성하는데, 미사 중에 20명의 수련수녀가 유기서원을 할 예정이다. 이들은 교구사제 3명에게 양성을 받고 있다. 대지가 160평가량 되는 수녀원 본원은 본부와 숙소로 쓰인다. 본원이 세워지는 곳은 타이빈성 동호아에 있는 옛 교구 소신학교 자리다. 건축비 5억 동(약 4000만 원)은 교구와 국내외 기부로 마련되었다.

 

현재 60명의 서원자와 20명의 수련자, 그리고 청원자 85명이 있으며, 이들은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이들로 현재 타이빈성과 흥옌성의 11개 수도원에 흩어져 있다. 수녀들은 본당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등 사목활동을 하며, 또 교구가 세운 진료소에서 일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녀들은 아직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진료소와 탁아소를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허가를 받지는 못했다. 트란티사마리 수녀는 수녀회에서 이런 시설을 열고자 하지만 정부가 아직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수녀들이 이제 본원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고 공부나 서원을 위해 남부지방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면서 전에는 그런 일로 시간과 돈이 많아 들었다고 지적했다.

 

수녀회에서는 베트남에서 종교정책이 완화된 1990년 이후 수녀들을 비밀리에 남부지방으로 보내 공부하고 서원을 받게 했는데, 해마다 3000만 동(250만 원)이나 되는 많은 돈이 들었다.

 

 

한 사제의 기일에 몰린 3만 명의 군중

 

한편 베트남 남부지방에서는 60년 전에 살해당한 한 사제의 기일에 3만 명이나 되는 군중이 몰렸다. 트룽부디엡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지난 1946년 3월 12일 본당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살해당했다. 오늘날 그는 본당신자들을 위해 죽은 순교자이자 그의 전구를 통해 많은 이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 전구자로 존경받는다.

 

그가 본당신부로 일하던 탁사이 성당은 박리우성에 있으며 1996년에 칸토 교구는 이 성당을 순례지로 공식 승인한 바 있다. 올해 추도미사는 사제 18명이 공동으로 집전하였다.

 

디엡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는 여러 정치세력과 종교가 서로 다투던 혼란한 시대였다. 그는 장상이 어디로든지 피난하라고 조언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동포들 사이에 살다가 그들 가운데서 죽겠다. 어디로든 가지 않겠다.” 그는 평신도 지도자 70명과 함께 적대세력에 붙잡혀 쌀창고에 갇혔다. 시체는 나중에 근처 연못에서 찾았지만 교회사 연구자들은 누가 왜 디엡 신부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올해 기일에, 순례자들은 서로 밀고 밀리며 디엡 신부의 묘와 그의 상을 만지고, 향불과 촛불, 돈, 음식과 기도를 바쳤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순례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새끼 돼지나 구운 돼지고기, 떡, 꽃과 과일 등을 묘지 앞에 차린 상 위에 놓았다.

 

 

가는 곳마다 디엡 신부의 사진이

 

부근 여인숙들은 꽉 들어차서 교회 부지 안에서 잠을 자야 하는 이들도 많았다. 올해 60살로서 호치민에서 온 한 가톨릭 여성은 UCAN 통신에 자기네는 50명이 같이 왔는데 운 좋게도 사제관 입구 계단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빌릴 방도 없었을 뿐 아니라 숙박료도 평상시보다 세 배나 비쌌다고 했다.

 

그녀는 관절염이 심해서 의사도 치료할 수 없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그의 묘를 방문한 직후 디엡 신부가 내 병을 낫게 해줬다.”고 말했다. 그 뒤 그녀는 해마다 신체적 도움이나 영적 도움을 원하는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서 디엡 신부에게 감사한다.

 

많은 신자들은 “디엡 신부님, 감사합니다.”라고 쓰인 작은 석판을 가져와 교회를 에워싼 벽 위에 올려놓는다. 처음 이곳에 순례를 온 한 사람은 디엡 신부가 순례자들을 돕는 것이 틀림없다면서, 그렇지 않다면 상당수는 비신자인 이들이 이렇게 해마다 그의 기일에 그의 묘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한 버스 운전사는 이 지방에서는 각 집의 제단이나 책장, 배, 버스나 가게 등 ‘가는 곳마다’ 디엡 신부의 사진이 붙어 있고, 심지어는 주민들이 목걸이에도 그의 사진을 넣고 다닌다고 말했다.

 

훙 신부는 1980년대에 디엡 신부의 묘에서 기도를 한 뒤 병이 나았다거나 일이 잘 풀렸다고 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이곳이 이 지방에서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으며, 지방당국과는 거의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덧붙였다. 또 순례자를 위한 콘크리트 벤치를 기부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일부는 다른 성당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경향잡지, 2004년 6월호, 박준영 요셉(아시아 가톨릭 뉴스(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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