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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음으로 세상보기: 장애인을 더 외롭게 만드는 족쇄들, 편견과 단정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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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세상보기] 장애인을 더 외롭게 만드는 족쇄들, 편견과 단정들…
장애등급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불편함의 수준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차등적으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입니다. 현재는 장애 상태에 따라 1~6등급으로 나누어 적용하여 등급에 따라 연금을 지급합니다. 장애수당과 활동보조인 서비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몸에 대하여 판정을 내리고 그 상태에 따라서 등급을 부여합니다. 2008년에 개정된 장애인복지법에 의거하여 장애진단을 의뢰받은 의료기관에서 장애인의 장애상태를 진단한 후 진단서를 지방자치단체장에게 통보하여 등급이 부여됩니다.
그러나 의료서비스는 등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자의 상태에 따라서 이뤄져야 합니다. 의사가 환자 개개인의 상태를 진단하고 그에 맞게 처방을 하는 것이지 장애등급에 따라 병명이나 처방이 바뀌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의료서비스 뿐만 아니라 모든 서비스가 개개인에 맞춰져야 합니다. 그래서 장애인 단체와 인권 단체에서는 장애등급제가 장애인에게 수혜대상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차등적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반인권적인 제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양의무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빈곤층이라도 직계 부양의무자가 일정 부분 소득이 있거나 일정 기준 이상의 재산이 있으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도록 한 조항입니다. 가족 중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수급이 줄어들거나 수급이 끊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수급이 끊어진 장애가족은 비장애인인 자녀가 있음에 따라 수급을 받지 못하게 되어 생활이 위태로워지는 것입니다. 복지의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첫째로, 생사도 모르는 연락이 끊긴 가족이 소득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자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이미 노인이 된 자식이 더 노인인 부모님을 부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셋째로, 수급자 혜택을 받다가 10년 이상 연락되지 않는 자식과 연락이 된 경우 자식과 연락이 닿았다는 이유로 수급자 혜택을 박탈당합니다. 물론 부양의무제 폐지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막대한 국가의 예산이 투입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등급을 매겨 관계 형성할 수는 없어
사회복지 서비스는 장애인이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제약받는 조건들을 해소하거나 이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지원들입니다. 기초생활, 교육, 의료, 이동, 정보 및 통신, 일상생활 전반에 관한 제반서비스입니다. 그래서 복지는 서로의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불편함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불편을 제거해 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서로를 이어주는 고리입니다. 이런 복지가 등급을 나누어 차등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연락도 되지 않는 가족들에게 미뤄진다면 정작 곤란을 겪고 있는 장애인들과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족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두 제도가 단계적으로 폐지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장애인들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선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 23항에서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들도 모든 권리를 가진 주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그들의 능력에 따라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모든 다른 노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애인들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노동 조건과 그들에게 주어지는 정당한 보상, 그들의 지위 향상 가능성, 그리고 여러 가지 장애의 제거 등에 특별한 배려를 해야 한다. 장애인들이 노동계에서 동떨어져 있지도 않으며 사회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유익하고 온전한 노동의 주체이며, 인간 존엄성을 존중받는 자로서, 그들 특유의 능력에 따라 가정과 공동체의 진보와 복지에 기여할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랜 시간 장애인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시혜를 베풀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는 사람의 시각으로 이웃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는 사람의 기준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등급을 매기고 그 등급에 따라 대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은 모두 다른 모습입니다. 똑같이 생긴 사람이 둘도 없습니다. 쌍둥이조차 다릅니다. 그리고 그 이웃들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성격으로 살아가고, 본연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가며 서로 관계 맺고 있습니다. 그런 이웃들에 대하여 등급을 매겨 관계를 형성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장애인’이라는 단어나 ‘사회적 약자’라는 말은 사실 없어져야 합니다. 모두가 동등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들이 이름을 붙이는 것들이었습니다. 태어난 고장에 따라서, 다닌 학교에 따라서, 그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문화적 성향에 따라서, 믿고 있는 종교에 따라서 다양한 이름을 붙여왔습니다. 그 이름은 배제와 차별을 가져왔습니다. ‘모두가 우리’인 것을 나누고 갈라서 ‘우리와 그들’로 가리켰고 더 많은 꼬리표들을 만들어 우리와는 다른 그룹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수많은 그룹은 대결과 갈등을 일으켰고 심지어는 증오와 살육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눔의 시작은 아주 우스운 시작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영호남의 갈등’같이 말입니다. 지금이야 점점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같은 나라에 살면서 지역에 따라서 서로 다른 공화국이라고 부른 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불행한 인류의 역사에는 하나같이 그런 나뉨이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편견과 차별부터 없애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진짜 복음은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교도였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면서 약간의 논쟁을 베푸셨지만 그도, 그녀의 딸도 하느님의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마르코 7장) 바리사이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마태오와 다른 세리들과 식탁에 함께 앉으셨습니다.(마태오 9장)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도 없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도 없었습니다. 노인과 어린이도, 죄인들도, 오랜 세월 병고에 시달리던 이들도 모두 예수님께는 구원해야할 하느님의 자녀였습니다. 예수님께는 모두가 이웃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차별 없이 대하는 그 모습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인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누고 가르기 좋아하는 이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 통제하고 다스리기는 더욱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누고 가르는 순간, 등급을 매기는 순간 사람들이 이웃에서 대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편견과 차별부터 없애야 할 것입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며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스스로의 차별부터 깨 나가야 하겠습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고서야 마음이 편하다면 불편함을 오히려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두가 사랑받는 당신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잠시 눈을 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로 떠서 보는 눈에는, 마음에는 그 누구도 차별이나 편견이 아닌 사랑의 눈으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3월호,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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