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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1) 조르지오 비구찌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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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1) 조르지오 비구찌 주교 “서로에 대한 신뢰와 평화를 향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 어디에선가는 격렬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싸움의 현장에서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주님을 찾는 고통에 찬 외침이 메아리친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절한 아픔 속에서도 주님을 증거하는 이들이 있어 끝까지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 평화가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시다. 평화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곳에서 주님 사랑의 길을 내는 이들이 있다. 묵묵히 주님이 맡기신 희망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을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에서 만나본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대회가 한창이던 3월 7~9일 서울에서는 ‘2018 글로벌 비즈니스 평화상 시상식 및 심포지엄’이 열렸다.
유엔글로벌콤팩트한국협회(GCNK)와 미국의 비정부기구(NGO) ‘종교자유와 비즈니스 재단(RFBF: Religious Freedom & Business Foundation)이 수여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평화상’은 평화 구축에 있어 리더십을 보여준 전 세계 전·현직 최고경영자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전쟁과 갈등으로 피해를 입은 선수들을 포함해 역경을 극복한 인간승리를 강조하는 패럴림픽과 그 의미를 함께해 동·하계 패럴림픽이 열리는 2년마다 시행되고 있다. 올해 시상식은 지난 제15회 2016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에 이어 두 번째다.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시상식에 함께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기업인들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를 통해 마련된 남북 대화 분위기를 높이 평가했다. 이들은 ‘올림픽 휴전에서 공동 평화로’라는 제목의 공동 선언문을 채택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업인들의 활동을 독려하는 내용이 골자다.
이 행사에 함께한 이들 가운데 눈에 띄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미국 RFBF 이사장 브라이언 그림(Brian J. Grim) 박사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이들을 만났다.
- '시에라리온'의 친구로 불리는 조르지오 비구찌 주교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에게 말한다. "인류 공동체 전체에 대한 연민을 갖고 항상 정의를 추구하십시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조르지오 비구찌(Giorgio Biguzzi) 주교는
1936년 이탈리아 북부 체세나(Cesena)에서 태어났다. 1960년 파르마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미국 밀워키의 마케트대학교(Marquette University)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시에라리온 마케니교구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1987년 마케니교구 교구장주교로 서품된 뒤로도 25년간 더 사목했다. 2012년 은퇴해 이탈리아로 돌아갔지만 지금도 평화를 위한 활동에 나서고 있다.
시에라리온의 친구
지금도 가끔씩 그날을 생각한다. 끝 모를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한없이 떨어지다 일순간 빛의 세계로 솟구쳐 오르는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따르는 무수한 잔영들.
‘시에라리온의 친구’로 불리는 조르지오 비구찌(Giorgio Biguzzi) 주교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느님 체험이다.
정부군과 반군 간 일진일퇴의 공방이 격심했던 어느 날, 반군 게릴라가 비구찌 주교를 찾아왔다. 잡아간 아이들을 돌려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길을 나섰다. 게릴라들과 약속한 곳을 찾아가니 밀림 속이었다. 한낮인데도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덤불을 헤치며 한참을 더 들어가니 아이들이 보였다. 순간 어둠 속에서 총부리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함정이었다. 죽음의 냄새가 이런 것일까. 죽음을 직감한 순간에도 비구찌 주교의 눈은 아이들을 찾고 있었다.
총부리에 떠밀려 들어간 밀림 속 컴컴한 반군 아지트, 게릴라 지도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구쳤을까, 먼저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를 떠올렸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
‘우리가 바라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방망이질 치던 가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반군들은 비구찌 주교가 차고 있던 시계와 구두, 옷가지들은 물론 주교 반지(anulus episcopalis)와 가슴 십자가(Pectorale)까지 모두 빼앗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 사항이 적힌 긴 리스트를 건넸다. 첫 번째가 모든 외국인(외국인 신부, 선교사들)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처음 사선(死線)에서 살아 돌아왔다.
비구찌 주교가 처음 아프리카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974년 시에라리온 북부 마케니(Makeni)교구가 운영하는 중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였다. 1960년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Parma)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미국으로 건너가 밀워키 마케트대학교(Marquette University)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난 직후였다. 그렇게 교사요 목자로서 10년간 가난한 이들 곁을 지켰다. 잠시 고국 이탈리아로 돌아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외방전교회(Saint Francis Xavier Foreign Mission Society) 일을 돕던 그는 1987년 제2대 마케니교구 교구장주교가 돼 2012년 은퇴할 때까지 25년간 더 사목했다. 아니, 그의 표현대로 ‘살았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죽음의 길에서 되돌아온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반군 중 한 명이 저를 알아본 모양입니다. 그 청년은 제가 가톨릭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 가르친 제자였습니다. 그는 교회 도움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며 반지를 되찾아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반지는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비구찌 주교가 사목하던 1990년대 시에라리온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반복되는 내전과 쿠데타로 혼란은 극에 달했다. 전쟁과 폭력은 일상이었다.
총을 난사하며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반군은 정부에 투표하지 못하게 한다며 산 사람들을 잡아다 팔을 자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한 정부와 반군 세력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지만 정작 시에라리온 국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다이아몬드를 팔아 번 돈은 다시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돼 내전이 격화되면서 무차별 살상이 자행됐기 때문이다.
비구찌 주교는 또 한 번 반군에게 끌려갔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정부 요인들은 물론 이웃종교인들까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를 대표해 정부와 반군 간 대화의 중재자로 나섰다. 평화회담장엔 늘 그가 유일한 주교였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그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 곁에 머물며 우리가 그들의 편임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폭력의 시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1991년 3월 23일 외세의 간섭으로 시작된 내전은 1999년 3월 27일 토고 로메에서 정부와 반군 간 ‘로메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평화는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둘러싼 이권 다툼 등으로 다시 내전이 벌어졌다. 영국을 비롯한 영국 연방 회원국들과 유엔(UN)이 분쟁에 개입하면서 2002년 1월 28일에서야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전 종식 후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 더 바빠졌다. 평화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비구찌 주교가 가장 공들인 것은 무엇보다 ‘교육’이었다. 소년병으로 전장에 내몰렸던 아이들이 배운 것이라고는 총 쏘는 방법뿐이었다. 아이들은 거리의 범죄자로 전락하기 일쑤였고 폭력의 그림자는 모두를 위협했다.
비구찌 주교는 그런 아이들을 모아 직업훈련을 시켰다.
“소년들에게 목공과 재봉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교육이 끝나면 목수가 될 아이들에게는 공구 박스를, 재봉사가 될 아이들에게는 재봉틀을 선물했습니다. 아이들은 직업을 갖게 됐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평화의 씨앗을 뿌려갔습니다.”
2005년 9월 마케니대학교를 세웠다. 시에라리온 최초의 가톨릭 대학이자 북부에서는 유일한 대학이었다. 그는 특히 의과대학 설립과 발전에 공을 들였다.
“당시 시에라리온 인구는 700만 명이었지만 의사 수는 200명이 안 됐습니다. 의사 수는 부족했고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은 너무 적었어요. 전쟁과 가난으로 병든 사람들을 도울 의사를 길러내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를 세우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라디오 마리아 방송국’을 설립한 것도 평화의 길을 넓히기 위한 비구찌 주교의 선택이었다.
종족, 종교, 정치적 견해를 초월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의 뜻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땀방울들이 모여 대학 문을 연 지 4년 만에 시에라리온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교가 됐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는 ‘신뢰와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평화를 향한 인내. 너무 익숙한 답처럼 들리지만 그의 조언은 폭력의 현장에서 평화를 위해 일해온 경험에서 길어낸 지혜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러한 지혜가 극심한 갈등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지칠 줄 모르고 평화를 향해 나아가게 했다.
비구찌 주교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에게 말한다.
“인류 공동체 전체에 대한 연민을 갖고 항상 정의를 추구하십시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시에라리온은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나라. 1961년 4월 27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7만1740㎢ 면적에 인구는 2015년 현재 707만5641명. 1991~2002년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내전을 치렀다. 내전은 400만 명의 난민과 7만5000명의 무고한 죽음, 그리고 팔다리가 잘린 2만 명의 장애인을 남겼다. 또 25만 명의 여성들이 다양한 형태의 성적 학대를 받았고 7000여 명의 소년병들이 어른들의 전쟁에 내몰려야 했다. 시에라리온의 지옥도는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그레그 캠벨, 2006)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25일, 서상덕 기자] 0 1,26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