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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만주 땅의 한국 교회 사적지: 백가점, 양관, 차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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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89

만주 땅의 한국 교회 사적지 - 백가점, 양관, 차쿠

 

 

한국 천주교회와 관련된 만주의 사적지 하면 흔히 소팔가자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소팔가자만이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교회의 밀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드나들어야만 했던 압록강 너머의 봉황성 책문(柵門, 중국측의 국경 성문),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머물렀고 밀사들이 왕래했던 요녕성의 서만자(西灣子),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고 묻혔던 만주의 마가자(馬架子) 교우촌 등이 모두 우리의 교회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1842년 초겨울 이미 만주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만주인이 아닌 몇몇 사람들이 요동 반도의 남쪽 해안에 상륙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마카오를 떠난 조선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이들을 지도할 책임을 맡은 조선 선교사 매스트르 신부와 만주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이었다. 이들은 요동 땅에 상륙한 뒤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머물다가 하나둘씩 '양관'(陽關)을 거쳐 만주 북쪽의 소팔가자로 올라갔다. 김대건은 이 때 곧바로 북상하지 않고 1842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백가점에 거처하면서 봉황성 책문으로 나가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귀국로를 탐색하기도 했다. 양관은 현재 요녕성의 개주시 남동쪽 40-50리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나가점'(羅家店)이라고 불리는 한적한 농촌이다. 가구 수는 한 50여 호쯤.

 

베롤 주교는 1840년 양관에 부임하여 아름다운 주교좌 성당(성당 주보는 '성 후베르토')을 건립하였는데, 당시 이 지역의 신자 수는 180명이었다. 이 때부터 양관 성당은 만주 남쪽의 전교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 이 곳의 상황을 그려 보면, 양관 성당의 옛 터는 남향으로 마을 뒤편에 있으며,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6칸)과 옛 성당의 주황색 벽돌담만이 남아 있다. 또 마을 앞 남쪽은 낮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 난 마을 입구에는 제법 큰 냇물이 흐른다. 베롤 주교가 지은 처음의 성당은 문화 혁명(1966-1976년) 때 홍의병들에게 파괴되었다고 한다.

 

양관 성당은 이후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1843년 12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이 이 곳에서 있었으며, 최양업, 김대건 신학생이나 조선 선교사들은 만주를 여행할 때 자주 이 곳에 들렀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신부도 만주 선교사로 있을 당시 이 성당에 거처하면서 사목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요동으로 건너와 7개월 동안 베르뇌 신부의 보좌 신부로 양관에서 첫 사목을 시작하였다.

 

저는 5월에 함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 다시 요동으로 왔습니다. 이 곳(요동의 양관)에서 7개월 동안 머물면서 만주 대목구장 직무 대행을 맡고 있는 베르뇌 신부님의 명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에는 신자들에게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큰 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배령해 주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최양업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1869년 조선 선교사들이 베롤 주교에게 요동 일부의 사목 재치권을 이관받게 되면서 양관 지역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당시 조선 선교사들이 사목 중심지로 삼은 곳은 '차쿠'(차溝)라는 교우촌이었다. 현재 요동 남부의 장하 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60-70리 지점에 있는 차쿠는 인근에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용화산(蓉花山)으로 불리는데, 행정 구역상 장하 시에 속한다.

 

1840년대 베롤 주교는 양관 성당을 건립한 뒤, 차쿠에도 아름답고 높은 첨탑을 가진 성당을 건립하고 그 주보를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과 같은 이름으로 정하였다. 왜냐하면 차쿠 주변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눈이 오면 사방이 눈으로 덮여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곳에 가기 위해서는 천산산맥의 끝 부분에 속해 있는 높은 산들을 넘어야 한다. 또 차쿠 남쪽 가까이에는 아름다운 계관산(鷄冠山)이 솟아 있는데, 이러한 차쿠의 위치에 대해 조선 선교사들은 "성모설지전 성당은 북쪽으로 영광의 산, 남쪽으로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차쿠 성당은 이후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목 거점이 되었으며, 베르뇌 신부와 최양업 신부도 이 곳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차쿠 성당은 1860년대에 와서 다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동 지역 안에서도 차쿠 성당이 조선과 가장 가까웠고, 이로써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건너온 파리 외방 전교회의 리샤르, 마르티노, 그리고 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블랑 신부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문에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 곳 차쿠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조선을 탈출한 칼래 신부와 리델 신부도 차쿠로 와서 조선 입국을 모색하게 되었다.

 

1869년 베롤 주교에게 요동 사목의 재치권을 부여받은 리델 신부는 조선 교회의 장상으로서, 또 1870년 이후에는 교구장으로서 모든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우선 그는 조선교구의 대표부를 차쿠에 두고 그 안에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리샤르 신부를 차쿠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하여 대표부 일과 경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1876년부터 하나 둘씩 선교사들을 조선에 입국시키기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에 접근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는데도 리샤르 신부는 차쿠의 사목을 맡고 있었으므로 조선으로 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80년 9월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차쿠 성당 앞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동시에 리델 주교는 차쿠의 대표부를 일본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1881년에 일본을 방문하였다가 나가사키에서 발병하여 상해, 홍콩을 거쳐 다음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이후 조선교구의 대표부가 나가사키로 이전되면서 조선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요동에서의 재치권도 자연히 소멸되었다.

 

이 사적지들은 모두 대희년을 맞이하여 한 번쯤 순례해 볼만 한 신앙 선조들의 유산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이 사적지들을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관리해 나갈 수 있는 기구가 없다. '과연 교회 사적지 중에서 국가나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어떤 것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변이 막힐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이라도 교회 안에서 유무형의 문화재를 정리하고, 이를 교회 보물과 사적지로 구분하여 보존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들을 국가 사적지나 기념물 또는 보물로 하나씩 지정해 나가는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사목, 2000년 3월호, pp.80-82,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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