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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36: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영성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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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16 ㅣ No.756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36)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영성 ③

성부 · 성자 ·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다

 

 

삼위일체 하느님. 성녀 에디트의 생애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증거한 삶이었다.


친교의 하느님

유다교의 하느님에서 출발해 무신론을 거쳐 철학적 진리 추구를 통해 굽이굽이 돌아 마주한 에디트 슈타인의 하느님,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만나 가톨릭으로 회심한 1922년을 기점으로 에디트는 점차 그 하느님의 신비를 깨우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1922~1928년 사이의 에디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우리는 하느님이 그의 실존적인 삶 안에서 서서히 절대적인 실재이자 삶의 중심이 되어갔음을 보게 됩니다. 당시 에디트는 슈파이어의 사범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했지만, 그 시절의 그는 점점 더 깊이 하느님 안으로 잠겨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경험과 더불어 먼저 자신을 열어젖히며 말을 걸어오고 당신을 선물로 건네시는 하느님, 그리고 사랑의 응답을 기다리는 하느님, 한 마디로 ‘친교의 하느님’을 알아듣게 됩니다. 더 나아가 당시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자기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당신을 건네시는 모든 이들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은 그가 자신 안에만 안주하지 않고 모든 이를 향해 진리의 길을 전하고 초대하는, 세상을 향한 친교의 사도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강연과 저술 활동에서 끊임없이 “저는 그저 하느님의 종일뿐입니다” “제가 하는 일의 목적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사랑의 하느님

이렇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에디트는 점차 또 다른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듣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에디트가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사랑이자 삶의 한가운데 현존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의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발견하고 만날 수 있도록, 먼저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분이십니다.

에디트는 신앙의 진리를 알아가며 바로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인 사랑의 하느님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가난함과 나약함 가운데 드러나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밖에 모르기 때문에 늘 용서할 준비를 하고 계시며 언제고 그분 품에 달려드는 죄인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는 분입니다. 에디트는 이런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며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의 본질에 속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시화되어 드러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모든 애덕은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자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에디트에게 있어 사랑은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되어주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우리는 에디트의 하느님 체험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모습 가운데 하나로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을 들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에디트의 이해가 친교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알아듣는 가운데 심화됐다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는 또 다른 이해의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에디트는 ‘사랑’이야말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실마리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속성상 홀로 존재하는 한 인격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한 분의 위격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진정 사랑이시라면, 그분은 한 분이 아닌 세 분의 위격으로 이루어진 분,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다고 에디트는 보았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온전히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것이자 그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에디트는 이러한 사랑의 원형을 성부, 성자, 성령 간의 사랑에서 발견했습니다. 우리 존재를 비롯해 모든 피조물은 궁극적으로 세 위격 간의 차고 넘치는 사랑에서 유래한 결실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건네심으로써 우리 또한 당신께 사랑의 응답을 드리고 더 나아가 모든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도록 초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에디트의 삶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체험하고 이를 증거했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자 구세주이신 하느님

이러한 에디트의 일련의 하느님 체험은 종국에는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라는 하느님 체험 안에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동시에 생명의 주인이자 구세주이실 수밖에 없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에디트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자기 내면에 끊임없이 현존하고 계심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생의 마지막 시기에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에디트는 늘 소유격을 붙여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말하곤 했습니다. 당시 처절했던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에디트는 자기 민족을 비롯해 인류 전체를 불쌍히 여기고 구원해주시리라는 희망을 품고 구세주 하느님 안에서 죽어갔습니다. 결국 에디트는 그 하느님 안에서 죽음마저 넘어서는 생명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7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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