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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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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09 ㅣ No.344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1)

 


1. 생애

 

'성체의 성인', '고해소의 성인', '본당신부들의 수호 성인' 등으로 불리는 성 요한 비안네는 모든 본당사제들의 귀감이다. 그는 사목업무의 활력을 매일의 미사성제와 성체 대전에서 머무는 긴 시간의 기도를 통해 얻었으며 그 활력의 은총을 통해 본당 공동체의 쇄신과 신자들의 재복음화, 순례자들의 성화에 투신하며 기여할 수 있었다.

 

그의 모든 사도직의 중심인 사랑의 성사 성체성사에 참여 하기 위한 준비는 회심과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임을 강조하면서 그에 인내로이 초대했던 비안네 신부는 본당 공동체를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에서 가까운 마을 다르딜리에서 아버지 마태오 비안네와 어머니 마리아 벨루제의 일곱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프랑스 혁명(1789)과 그 여파로 인해 사회가 혼란하고 교회가 박해를 받아 곤경에 처해있던 시대에 청소년기를 지낸 요한 비안네는 학교 교육이나 본당의 교리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던 여건 속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는 가정에서 일찍 기도하는 것을 배워 혼자 조용히 기도하길 좋아했다.

 

그는 13살 되던 1799년 이웃마을 에퀼리에 보내져 교리 공부를 한 후 첫 영성체를 하였다. 박해의 상황이었기에 첫 영성체 날 미사는 건초로 창문을 가려 놓은 한 농가에서 그로보즈 신부에 의해 집전되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사목활동하던 그 신부의 담대한 용기는 비안네 소년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어 이 때부터 그의 마음 안에 사제 성소의 싹이 텄다.

 

마을에 공립학교가 세워지면서 비안네는 늦은 나이지만 어린이들과 함께 기초 공부를 하였다. 그는 부모를 도와 밭일을 해야 했으므로 학교에 자주 결석했지만 두 해에 걸쳐 프랑스어 읽기와 쓰기 등을 배워 그 지역 사투리만 알던 그가 이제 표준어인 프랑스어로 어느 정도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는 푸루니에 신부로부터 교리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 신부와 친해지면서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더욱 커갔다.

 

1806년 그가 스무 살 되던 해 신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에퀼리에 있는 발레 신부를 찾아갔다. 기초교육도 제대로 안 된 시골 젊은이를 면담한 그 신부는 의외로 흔쾌히 예비 신학생으로 받아 들였다. 그곳에서 비안네는 주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근 3년 공부하던 그는 군복무 관계로 학업을 중단했다가 1811년 3월 발레 신부에게 돌아왔다.

 

3개월 후 발레 신부는 쿠르봉 부주교에게 비안네를 사제 지망자로 추천했고 다음해 그는 리옹 교구의 신학생으로서 베리에르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기초 교육의 미흡과 라틴어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철학 신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는 2학년으로 진급할 수 없어 발레 신부에게 돌아가 언어와 신학 공부를 보충해야 했다.

 

1813년 비안네는 리옹의 성 이레네오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라틴어로 진행된 수업 때문에 다시 어려움을 겪던 그는 시험 결과가 좋지 못해 학업능력 결격자로 판정되었고 결국 추천 신부에게 되돌려보내졌다. 그 결정은 최종 탈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추천 신부가 그에게 사제가 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신학을 가르친다면 그의 사제 성소를 재검토 할 수 있다는 특례 조항이 첨부되었다.

 

발레 신부는 라틴어 아닌 프랑스어로 그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한 해 동안 열심히 공부한 그는 시험관 앞에서 프랑스어로 시험을 쳤고 드디어 무난한 평가를 받으며 통과되었다. 그리고 1814년 7월 2일 그는 감격스럽게 차부제품을 받았다.

 

발레 신부한테서 계속 공부한 그는 다음 해 6월 23일 부제품을 받았다. 비공개로 진행된 마지막 시험을 친 후 같은 해 8월 13일 사제성품을 받았다. 그러나 고해성사 집전권이 유보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발레 신부는 비안네를 자신의 보좌로 맡겨 주길 요청함으로써 사목실습을 도울 수 있었고, 한편 새 사제가 고해성사 집전권을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 일년이 채 안되어 문제를 해결했다.

 

비안네 신부의 첫 고해자는 그의 스승이며 아버지이고 주임인 발레 신부였다. 1817년 12월 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비안네는 다음 해 2월 11일 아르스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이틀 후 부임했다. 주민이 230명에 불과한 아르스의 교우들은 대다수가 세상사에 쫓기면서 신앙엔 무관심한 상태에 있었다.

 

비안네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공동체의 회심을 위해 자주 금식 고행을 했고 매일 긴 시간동안 성체 앞에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에 대한 친절과 자비심은 그에게 있어서 언제나 금식이나 어떤 고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새벽 4시부터 기도와 성체조배, 미사 봉헌, 고해 성사 등으로 하루 중 10시간 이상 성당과 고해소에서 지냈으며 틈틈이 가정과 환자 방문, 강론 및 교리 강좌 준비를 하였다. 몇 년 후 아르스 본당은 그가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공동체가 되었다.

 

1824년에 그는 '섭리'라는 이름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것은 소녀들을 위한 무료학교였는데 장래 어머니 역할을 수행해야 할 소녀들이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교육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선 교사들을 양성하여 그들에게 쓰기, 읽기, 셈하기 뿐 아니라 요리, 집안 살림, 정원 가꾸기, 바느질 등을 가르쳤다. 곧 기숙사 시설도 갖추었고 고아원도 함께 운영하면서 교육시켰다. 그는 이러한 시설들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곤경 중에 기적 같은 일들을 가끔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섭리를 뜨겁게 느꼈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비안네 신부의 단순하면서도 감명을 주는 신앙강좌를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1838년에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성가정 수도회에 맡겨 교육하도록 했다.

 

1823년 1월에 샤르트르회 신부들이 아르스에서 멀지 않은 트레부라는 곳에 피정 선교단을 보냈는데 비안네 신부도 그 일원이 되어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 활동을 마치고 돌아 온 후 그의 성덕과 카리스마에 대한 평판은 그 주변 뿐 아니라 점차 리옹에까지 퍼졌으며, 1826년부터 순례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아르스를 찾아왔다.

 

비안네 신부는 그 후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씩 봉사해야 했다. 아르스의 시장 프로스페르 데 가레 백작에 의하면 1834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순례자가 3만에 달했다.

 

순례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비안네 신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은 그들이 아르스에 오는 목적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자기를 보러 온다는 부담감이었다. 그러던 중 아르스가 순례지가 되도록 하는 공적인 이유를 마련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을 찾아냈다.

 

그가 평소 공경하던 성녀 필로메나 순교자의 경당을 지어 그곳에서 순례자들이 성녀의 중재 기도를 청하며 회개하여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는 은총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안네 신부는 튼튼한 몸을 타고났지만 엄격한 수덕생활과 충실한 사도직 업무 그리고 끊임없는 순례자들의 방문으로 과로하게 되어 점점 쇠약해졌다. 그러나 그가 움직일 수 있던 날까지 일상적 본당 업무, 소년, 소녀들을 위한 학교 운영, 교리교육, 환자 방문, 고해성사, 상담 등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73세이던 1859년 8월 2일 병자성사를 받고 마지막 성체를 모셨다. 그리고 8월 4일 새벽 2시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 드렸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된 그를 비오 11세는 1928년 4월 23일 시성했으며 1929년엔 '본당신부의 수호자'로 선언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20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2)

 

 

2. 영성사 안에서의 기여 

 

1) 비안네 신부는 수도자가 아닌 교구 사제 즉 본당 주임 신부로서 시성된 첫 사제이다. 교회 역사 안에서 그토록 많은 수도자, 주교, 교황들이 시성 되었는데 왜 재속(교구) 사제 혹은 본당 사제들이 시성 되지 못했을까? 교구 사제들이 그만큼 거룩하게 살지 못해서였을까? 그것은 영성의 다양성과 성성에의 보편적 소명에 대한 인식부족과 성성을 재는 규준의 역사적 한계성 때문이 었을 것이다. 교회 역사 안에서 오랜 동안 성인의 특성(聖性) 이란 종말적 상황 안에서 소수의 예외적 인물이 실천할 수 있는 엄격한 수덕 행위와 연계되어 이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성은 순교자들이나 종말 영성을 사는 관상 수덕자들에게 가능한 특전처럼 제한적으로 이해되면서 세상사에 관여하는 평신도나 교구 사제의 생활 방식에서 성인의 길 추구란 어려운 것이라 여겨졌다. 교구 사제들의 고유한 영성과 완덕관이 제시될 수 없었기에 적절한 성성의 척도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성에 불렸다는 「성성에의 보편적 소명」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기 신분과 생활 상태에 따라 고유한 방법으로 은총과 협력하여 성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거룩하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의 목표는 하나이고 모두에게 공통적이지만 거기에 나아가는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성소에 따라 생활의 모습이 다양하므로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표현도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성사를 생활화 하는데 공통적 요소를 지니지만 신분과 생활의 양태에 따라 완덕에 나아가는 방법엔 고유성을 지닌다. 이를테면 수도자가 철저한 복음 권고덕을 살면서 성화된다면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 성화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한편 사제는 백성들을 가르치고 성화시키며 헌신적으로 봉사하면서 성화되는 것이다.

 

비안네 신부가 성인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엄격한 수덕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 실제로 그는 금식, 수면 단축, 청빈, 절제 등 엄격한 수덕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성인 되게 한 것이 아니다. 교회 생활 안에서 때론 고행을 성성과 동일시되면서 고행적 수덕이 비인간적일 만큼 엄격할 수록 완덕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로 잘 못 생각하기도 하였다. 수덕은 성성이나 완덕에 나아가는 생활의 기초이고 방편이긴 하지만 성성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인간 안에 활동 하시도록 준비하는 자세이며 또한 그분의 효율적 도구가 되기 위한 훈련이다. 그러나 성성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받는 은총인 것이다. 비안네가 성인인 이유는 무엇 보다 본당신부로서 성실히 살며 사랑으로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가르친 대로 그는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사제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인 신자들을 일생 동안 온 몸을 바쳐 사랑하고 봉사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상이며 목표인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일상생활 이나 그 과제에서 떠난 특수한 수덕생활 방식에 있다고 제한적 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인이 되는 지름길은 비안네가 그러했 듯이 자신의 소명 안에서 자기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맡은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그러했듯이 오늘도 잘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훌륭한 성인으로 살며 봉사하고 있는 본당사제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2) 비안네 신부는 고해사제 및 영적 지도자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귀감이다. 비안네 신부가 훌륭한 사제 및 영적 지도자로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 카리스마도 타고났지만 기도와 훈련을 통한 은총의 결실로서 필요한 덕과 맑은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그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데 요청되는 통찰력과 식별력, 적절한 훈계를 위한 말씀, 용기와 위로를 북돋아 주는 내적 치유력 등 카리스마들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가 부성애를 지닌 고해 사제 및 영적 지도자가 되기까지엔 은총에 협력하면서 사랑, 인내, 자비로움의 덕을 갖추어야 하는 성숙의 시간이 요청되었다.

 

사목 생활 중 초반기엔 그가 얀세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의문이 제기될 만큼 고해자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그는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차차 엄격함에서 벗어나 용서와 자비의 봉사자로 변화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 내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인내 그리고 사랑을 점점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 찾아오는 사람들의 고뇌와 죄 고백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인간 실존의 한계성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주변의 현명한 조언을 겸손되이 받아 들였으며 무엇보다 기도와 묵상, 성체 조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가까이 나아 갈 수 있는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표현할 만큼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선량하신 하느님께서 제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당신께 큰 기쁨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물에 빠진 자기 아기를 구해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선량하신 하느님께서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3) 비안네 신부는 생활한 신학을 일생동안 끊임없이 공부한 사제였다. 가끔 비안네는 학문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열심한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마치 지성적 측면이 영성적 측면에 있어 성장하는 데 방해하거나 지장을 주는 것처럼 잘 못 생각하는 것이다. 사제 양성과 지속적 교육 과정에서 지적 교육은 인성 및 영성 교육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교육 들이 잘 이루어지는 데 필요하다. 실로 지적 교육과 영성생활은 연결되어 서로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이지 결코 서로간에 장애가 되면서 학문 연구의 견실함을 떨어뜨리거나 기도의 영성적인 풍미를 잃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신앙을 체계화한다. 한 측면은 하느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은 하느님과 대화 하는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비안네는 그와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신학을 조화 있게 공부한 사제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 시대적 사회 불안과 가정 형편상 기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소신학교 및 대신학교 과정을 제대로 이수할 수 없었지만 학교 당국의 배려로 발레 신부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으며 부족하긴 했지만 필수적인 신학 과목들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사제성품 후 일생동안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면서 공부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철저히 검소했던 그가 아르스 본당에 부임할 때 스승 신부로부터 물려받은 300 여권의 책만은 모두 챙겨 올 만큼 독서와 공부를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한편 그의 참된 신학 공부는 사목 생활의 체험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기도 중에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그분으로부터 직접 배웠으며 그분의 모상을 지닌 인간들과의 만남 중에 배운 것이다. 그의 참된 공부의 강좌와 교재는 기도와 미사, 성체 조배였고, 그 보조 교재는 그가 만나고 봉사한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기에 사람은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성서와 함께 주요한 원천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0년 10월 8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3)

 

 

3. 영성

 

비안네 신부는 성체께 대한 신심과 성체성사의 생활화 그리고 고해성사의 은총에 대한 인식 부족을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었으며 실천하도록 이끌어 준 모범 이며 스승이다.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그는「고해소의 성인」, 「성체의 성인」이란 강한 이미지로 여전히 살아 있으며 언제나 호소력 있는 모범이다. 

 

1) 사도적 영성

 

사제직은 본래 사제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기 보다 세상의 복음화 사명을 위한 헌신적 봉사를 요구한다. 사제직에 불리우는 동기는 사제 개인의 성화보다 인류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사도적 사명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가 성성(거룩함)에 이르는 고유한 길은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사제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 하는 것』(「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13항)이며 그는 『수행하는 직무 전체를 통하여 완덕 생활에 진보하는 것』(같은 교령 12항)이라고 가르친다.

 

실로 비안네 신부는 그가 맡은 사도직에 온 몸을 바쳐 수행 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인 완성의 단계에 나가게 되었고 성화되었다. 그는 일상적 사목 업무로서 환자및 가정방문, 교리 교육, 고해성사 집전, 상담뿐 아니라 공부할 여건이 못된 그 지역의 소년 소녀들을 위한 학교 및 고아원 운영 등을 통해 복음화 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의 성덕과 카리스마가 널리 알려지면서 수 없이 몰려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매일 12시간 이상씩 고해성사를 집전 하고 상담을 해주었다.

 

다른 한편 공의회는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사제에게 맞갖은 영성이 요청된다고 강조한다. 『사제의 성성 자체는 그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크게 이바지한다』(같은 교령, 12항).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백성에게 그분의 은총을 전달해 주며 성화 시키는 도구로서 선택된 이가 사제라면 그의 직무는 그에게 당연히 성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비안네 신부는 가르침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매일 영적 양식 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마음에 새기며 묵상한 후 가르쳤다. 그는 성화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매일 미사 중에 목자적 애덕을 배웠으며 성체 대전에서 사목적 활력을 얻었다. 그는 새벽 4시부터 기도와 성체조배를 하면서 미사 성제를 준비하였다. 성체성사는 그의 영성생활, 수덕 및 사도직 활동의 원천이고 중심 이며 정점이었다. 그는 다스림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봉사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봉사하러 오신 주님의 모범(마태 20, 28 참조)을 따르며 봉사에 아낌없이 투신하였다. 

 

2) 성체 신심

 

비안네는 「성체의 성인」이었다. 그는 첫영성체 중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 안에 사제 성소가 싹이 텄다. 그가 아르스 본당에 부임했을 때 다수의 교우들이 신앙에 무관심하며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음을 보면서 그들의 회개를 위하여 감실 안에 계신 주님 앞에서 매일 여러 시간씩 열성으로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가 성체 대전에서 주님께로부터 활력을 얻지 못했다면 매일 그가 자신을 아낌없이 준 그러한 사도직 수행을 결코 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감실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생생히 느끼는 특은을 받은 비안네는 성체성사의 신심을 끊임없이 강조했으며 그것이 그의 강론과 교리 강좌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그는 영성체를 통해 받는 놀라운 은총에 대해 다양한 표현으로 이해시키고자 애썼다. 『우리가 자주 영성체를 하면 우리 영혼은 꿀벌이 꽃향기로 목욕하는 것처럼 사랑의 향기로 목욕합니다』『영성체 하는 사람은 한 방울의 물이 대양에 파묻히듯이 하느님 안에 자기 모습을 감춥 니다』『이 성사를 멀리 하는 사람은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물이 흘러 넘치는 샘 가에서 갈증으로 죽는 사람과 같습 니다. 또한 팔을 내밀지 않아서 보물을 앞에 놓고도 가난하게 지내는 사람과 같습니다』『우리가 영성체 후 무엇을 집으로 나르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하늘 나라를 옮긴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매일 영성체를 하기 위하여 미사에 참례 하도록 신자들을 적극 초대하였다. 그리고 성체를 합당하게 모시기 위해 일상에서 잘 준비해야 함을 강조했다. 성체를 직접 모시지 못할 경우엔 영적 영성체라도 하길 권했다. 비안네 신부는 교우들에게 성체 조배를 자주 하도록 권면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사랑으로 성사 안에 계시며 아버지께 우리 죄인을 위해 끊임없이 용서를 빌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머무시기엔 우리가 얼마나 합당치 못합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로 하시기 위해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분을 자주 방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방문하고 그분께 경배 드리며 그분이 겪는 온갖 모욕을 위로하기 위하여 15분을 쓰는 것을 그분은 참으로 반기 십니다. 우리가 감실 앞에서 그분 발치에 있을 때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맛보는 행복은 얼마나 큽니까?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을 배가시키십시오!』

 

비안네 신부는 성체 조배의 자세와 방법이 참으로 단순한 것임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에게 감명을 주었던 노인 농부 샤팡의 모범을 소개하곤 했다. "제가 아르스에 처음 왔을 때 성당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이는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하러 나갈 때나 저녁에 돌아 올 때 성당 문앞에 괭이를 세워놓고 오랫 동안 성체 앞에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뻤던지요! 언젠가 저는 그에게 오래 머무는 동안 주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를 물었습니다.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신부님, 그분께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전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도 저를 보고 계십니다' " 

 

3) 고해성사 : 사죄, 식별과 내적 치유의 봉사

 

비안네는 사제 성품을 받으면서 얼마 동안 고해 성사권이 유보되어 행사할 수 없었다. 거의 일생을 매일 12시간 이상씩 고해소에 앉아 봉사해야할 만큼 명망이 높게 되고 세기를 통해 유명하게 될 「고해소의 성인」비안네 신부가 자격 미달로 판정되어 사죄권이 유보되었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그에 대해 우려하던 장상들의 조심 스런 관찰의 기간이 요청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얼른 판단되기도 하지만 거기엔 큰 일꾼을 키우고 굳건히 성숙시키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섭리적 배려가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사제직을 준비 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어야 했던 비안네 신부는 실로 사제직의 고귀한 품위와 고해성사의 놀라운 은총에 대해 어느 사제보다도 깊이 느끼고 체험하였으며 감격스러워 하였다.

 

비안네 신부를 만나고 고해성사를 보기 위하여 차츰 이웃 교구, 프랑스 전역 그리고 유럽 여러 지역에서 주교, 신부, 수도자들과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연간 수 만 명 씩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비안네 신부는 매일 12시간 이상을 그리고 말년에 17시간 정도를 고해소에 앉아 봉사해야만 했다. 순례객들은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비안네 신부를 만나고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때론 세 주간을 아르스에 머물며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좋은 고해신부에게 요청되는 적절한 카리스마를 타고 난 비안네 신부는 은총에 협력하면서 더욱 큰 사랑, 인내, 자비로움의 덕을 또한 갖추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0년 10월 15일,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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