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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새로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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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62

새로움의 의미

 

 

세기, 아니 한 천년기의 마지막 십 년은 참으로 요란스러웠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백 년도 살기 힘든 인류로서는 문자 그대로 천 년마다 한 번씩 오는 신천년기(新千年紀, New Millennium)의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요란함 속에서 더욱 유난했던 것은 현란한 '말의 잔치'였다. 사람의 말이 인간 존재의 다양한 차원을 반영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밀레니엄의 잔칫상에서 난무하던 말들은 인류의 절망과 희망, 체념과 염원, 우울과 환희의 냄새를 사람의 살냄새 마냥, 유독이도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지난 천년기의 마지막 십 년인 1990년대 전반기에 회자(膾炙)했던 말들은 모두 소멸과 끝을 뜻하는 것이었다. '종결', '종언', '종말'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십 년의 후반기에는 탄생과 시작을 뜻하는 말들이 수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나라 사람들이 쓰는 표현에도 한글 '새'와 한자어 '신(新)', 그리고 영어 형용사 'new'가 어느 단어에든 항상 붙어 다녔다.

 

이제 역사의 문턱을 넘어 그 '새로움'을 안고 있다는 시대에 첫 발을 내딛고 선다. 새 소식을 알리는 것을 임무로 하는 신문(新聞)들은 새로운 천년기의 새 아침을 노래하는 시(詩)를 일제히 첫 면에 싣는다. 그리고 모두 새로운 다짐을 하고 새 삶을 위해 새해 새날을 맞는다. 그런데 새로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말처럼 새로움이란 있는 것인가? 새로움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새로움이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을 불편한 심기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볼지도 모른다. 이러한 질문들은 상식에 대한 모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새 아침의 축제에 찬물을 끼얹는 말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획일적으로 새로움을 찬양하고 추구하는 분위기에서 새로움을 문제삼고 논한다는 것 자체가 '찬물' 같은 새로운 주제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1. 새로움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차가움이 따뜻함을 더욱 잘 느끼게 하고, 억압이 자유를 더욱 찾게 하듯이, 새로움도 그 반대 개념에 비추어 보면 더욱 명료해질 수 있다. 언뜻 보아 새로움의 반대는 낡음이다. 그래서 신구(新舊)는 늘 짝을 이루어서 이분법적 세계관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1990년대의 언어 사용 현상에서 보듯이, 그 십 년의 초, 중기에 우리의 삶에 동반했던 말들과 그 후기에 사람들이 앞세웠던 말들은 서로 반대어 개념을 담고 있다(십 년이란 기간에서 서로 반대되는 말 사이의 대체 현상은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 상반된 개념들 가운데 첫째는 끝과 시작이다. 이는 시간의 차원과 연관하여 어떤 시점에서 무엇인가 끝을 맺고 시작을 한다는 것이 새로움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임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로는 소멸과 탄생이다. 이는 '사건'이라는 차원에서 새로움의 본질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롭다고 할 수 있으며, 새로움은 어떤 방식으로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1)

 

시작과 탄생은 시대성과 존재성의 관점에서 새로움의 본질을 나타내 주는 것이지만, 새로움은 그 외에도 다양한 차원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다르다', '처음으로' 등의 뜻을 지니며, 이에 연관하여 '바꾸다' '최근에' '거듭' 등의 부수적 의미를 내포하고 '신선한(fresh)', '젊은' 또는 '이상한' 등의 수식을 동반하기도 한다. 새로움은 또한 창조, 발전, 진보, 개혁, 혁명, 희망, 소식, 탐구, 패러다임, 상기(想起) 등의 개념에 함의되어 있다.

 

앞에서 열거한 것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다르다는 것은 새로움의 조건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과 다름으로써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사람들은 새해에는 무엇인가 다르게 살 것을 다짐한다. 그것은 새 삶을 다짐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세상은 지금과 다른 세상이다.

 

새로움의 발현은 언제나 처음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던 것이 발현하든, 아니면 이미 존재해 있었으나 이제야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고 의식하든, 늘 처음이라는 자격을 갖고 나타난다.

 

또한 일상에서 낡은 것을 바꾸고자 할 때에 새 것이 필요하고, 최근의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며, 거듭 행하는 일을 새로움을 위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거듭나다'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아 신선함과 젊음은 새로움의 수식어라는 기능을 넘어서 때론 새로움 그 자체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또한 새로운 것은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것과 다르기 때문에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 점은 흔히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새로움이 수용되기보다 거부되는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창조의 결과는 새로운 것이며, 발전, 진보, 개혁, 혁명 등이 지향하는 것도 지금과 다른 새로운 무엇이고, 희망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 또는 처해 있는 상황과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소식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새 소식이라는 말은 사실 동어반복(同語反覆)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탐구 행위가 찾는 것도 기존의 지식이 아니고 새로운 발견, 앎 그리고 깨우침이다. 패러다임은 의미상 일정한 틀이 바뀌는 것을 내포함으로 새로운 것으로의 전환을 뜻하기도 한다.

 

상기 또는 기억은 언뜻 새로움과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것이 이미 지난 것, 낡은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것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은 현재의 사람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가다머(H. G. Gadamer)가 주장하듯 과거를 상기하고 과거의 사실을 해석하는 것은 '의미를 위한 새로운 기획'이다. 그의 말처럼 "새 것은 곧 헌 것이 되고, 헌 것은 새 것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신화, 언어, 사상 등 이른바 '문화적 추억'들은 우리 삶의 새로운 의미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새로움은 뒤에도 있다. 인간의 정신은 앞과 뒤 모두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새로움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의미들은 양면성 또는 모순적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가장 모순적인 것은 아마도 생명과 시간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는 만큼 생명체는 늙게 된다. 하지만 그 생명체에게도 다가온(아니면 그가 다가간) 시간은 새로운 시간이다. 다시 말해 늙어감으로 해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또는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백수(白壽)의 노인에게도 이 한 해는 새로운 한 해인 것이다. 사실 한 해만큼 더 늙은 몸도 이전과는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역동적인 생명체에게 낡음과 새로움은 단순히 반대 개념일 수 없는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언젠가 어린 손자를 보고 "여기 새 주름 하나 더 생겼으니, 이제 할아버지 주름이 모두 몇 개지?" 하고 묻던 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새로움은 상황에 따라 모호할 뿐만 아니라, 돌연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혀 예기치 못한 것, 돌연한 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2) 이러한 새로움은 그 발현이 주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최근의 역사에서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그 좋은 예이다. 예상하지 못한 채로 일어난 전쟁도 새로운 사건이 된다. 자연 현상에서도 새로움은 돌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갑작스런 지각 변동으로 침몰한 섬이라든가 산처럼 솟아오른 지층은 자연에서 새로움의 탄생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새로움이라는 말은 되도록 현실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것을 지칭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희망과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신세계, 신문명, 신지식인 등의 말이 지니는 상징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오늘날같이 아이디어 개발과 창의력 발휘의 시대에는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사람이 어디서든지 대우받는다.

 

그러나 하나의 새로움은 또 다른 새로움을 필요로 한다. 새로움이란, 말 그대로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새로이 등장한 것이 지속적이거나, 영구하다면 그것은 새로움의 의미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새로움의 일시적인 성격 때문에 새로움은 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과 만물이 무상(無常)하다는 것, 곧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무로부터'(ex nihilo) 탄생인 창세(創世)가 한 번 있은 후, 곧 최초의 절대적 새로움이 있은 후, 이 세상에서 모든 새로움의 탄생은 바로 변화의 결과이다. 변화는 언제나 새로움을 동반하는 것이며, 새로움의 얼굴은 변화의 역사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2. 변화를 앞세운 시대에 살다

 

하지만 변화의 결과로 새로움이 탄생한다는 말은 역으로 바꾸어 쓸 수도 있다. 곧 새로움의 탄생이 변화를 유발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로움의 얼굴이 변화의 흐름을 반영한다는 것도, 변화의 흐름이 새로움의 연속으로 구성된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변화와 새로움은 이렇게 서로 의미의 호환성(互換性)을 지닐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자연 현상에서는 새로움의 탄생과 변화의 흐름이 서로 별 구분 없이 어우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는 인위적으로 새로움을 창출함으로써 변화를 유도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변화의 기획은 새로움의 제시를 내포한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인간의 창의력이 더욱 요구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과 밀접하다.

 

요즈음 우리는 '21세기의 화두는 변화'라는 말을 자주 듣고 산다. 하지만 새로움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인 창조성을 지속 가능한 삶에 필요한 변화와 연관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지는 문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어떤 것에 변화와 쇄신이 필요한지 숙고하고 판단하며 실행하기보다는 변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하는 데에 쉽게 빠질 가능성은 상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단순히 변하는 시대가 아니라, 변화를 앞세운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더구나 그것은 실리 추구의 영역에서 돋보인다. 오늘날 사회와 문화는 변화를 기획, 경영하는 전문가들의 지식과 그 적용에 거의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다. 다시 말해 '변화 자본'을 운용하는 능력이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사회, 문화의 '경제화'라는 현상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변해야 산다'는 말은 오늘날 생존을 위한 모토이기도 하지만, 변화 자본의 경영자들이 그들 상품(단순히 물질적 제품만이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의 소비자들을 의식적으로 훈련시키고 빠른 변화에 습관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지식 경영자들의 상당수 임무도 지식으로 변화를 창출하는 데에 있다. 무엇인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변화 경영(Change Management)의 주임무가 더 이상 변화의 상황에 적응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 내는 데에 있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변화의 유도(誘導)가 매력적이고 강한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언급했듯이 새로움이라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신세대, 새물결, 신경향, 신상품 등의 언어적 상징성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신세대, 새물결, 신경향은 신상품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적 이념으로 쉽게 전락하기도 한다. 경제가 문화적 기획과 손을 잡으면서 제품 생산과 판매의 전략적 기준도 이미 '질'(質, quality)에서 '신'(新, novelty)으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또한 새로움을 향한 업그레이드와 업데이트는 시대적 사명이 되었다.

 

이제 신속하게 새 것을 열고 낡은 것을 닫는 능력은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해졌다. 미국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우(Lester Thurow)는 경제와 경영의 관점에서 오늘날 막강 미국의 최대 강점은 새 것을 여는 능력뿐 아니라, 바로 낡은 것을 닫는 능력이라고 했다. 곧 변화의 이행 과정을 최대한 신속하게 하자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것의 등장과 확산을 피하고 거부하는 기신주의자(忌新主義者, misoneist)는 만인의 기피 대상이 되고, 새로움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숭신주의자(崇新主義者, neophilist)는 쉽게 호감을 얻고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다.

 

니이체(F. Nietzsche)는 "인류는 새로운 음악을 듣기 위한 귀를 갖고 있지 않다."라고 했지만, 오늘날의 네오매니아(neomania)적 경향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나 오늘날도 네오매니아의 쉽게 관찰되지 않는 모순은 곳곳에 숨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영원한 젊은이로 남아 있고자 하는 욕구다. 어느 중년 탤런트는 아직도 애써 유지한 틴에이저 같은 모습으로 광고에 등장한다. 젊음을 끝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새로움과 변화를 거부하고 절대적 불변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극단적으로 수구적인 태도이다.

 

오늘날 경제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브랜드와 캐릭터도 인간 심리의 저변에 깔려 있는 무엇인가 불변의 것을 추구하고 그것에 의지하는 경향을 이용한 것이다. 유명 제품의 브랜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것이 불변의 마크로 각인되도록 경영자들은 모든 전략적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다시 말해 불변을 위해 모든 경영 혁신을 추구할 것이다.

 

새로움과 변화 그리고 불변의 이러한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뒷면은 사람들에게 귀찮은 지적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순과 역설이 이 시대의 중요한 흐름을 포착하여 알려 주는 예민한 센서이기도 하다.

 

 

3. 변화와 불변의 정곡을 가로지르며

 

이 세상을 불변의 존재로 인식할 것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으로 볼 것인지는 고대에서부터 대립해 온 두 입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적어도 서양 사상사에서는 이러한 이항 대립적 해석의 시도가 줄곧 있어 왔다. 가시적 현상의 관점에서 보면, 불변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을 갖기 어려우나, 자연 현상과 인생 역정을 관찰해도 알 수 있는 변화의 연속은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며 훨씬 우세한 입장에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난 역사 속에서 현자(賢者)들은 불변의 요소와 그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을 멈춘 적이 없다.3) 그리고 그것이 깨달음의 길이고 그 깨달음이 또한 실용적 삶의 지표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린 적이 없다. 그들은 변화와 불변이 상호 침투적으로 세상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변하며,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은 변화 그 자체뿐이다." 다시 말해 "변치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라는 명제 속에서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logos)를, 중국의 노자는 도(道)를 보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만물의 법칙으로 인식되었으며, 그 법칙으로 그들은 변화와 불변을 동시에 본 것이다. 그들의 혜안은 변화와 불변의 정곡(正鵠)을 가로지른 것이다.

 

사람들은 신세대, 새물결 등의 표현이 사실 무의미한 동어반복일 수 있다는 것을 쉽게 간과한다. 예를 들어 유기적 자생력을 지니지 않은 물체인 헌 옷과 새 옷은 분명히 구분의 의미가 있지만, 세대나 물결처럼 자생적 역동성이 그 존재의 조건이라면 지속적으로 태어나고 자라나는 세대는 모두 신세대이고 흐름 속에 있는 물결은 모두 새물결인 것이다. 장강(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장강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세대는 끊임없이 변해도 인간 존재는 그대로 있으며, 물결이 서로 쉴새없이 밀어내고 흘러도 강은 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4) 아니 바로 그 세대와 물결의 단절 없는 변화가 인간과 강을 변함없이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지속적 변화는 변함없는 존재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지속적 변화의 현상과 변화를 안고 있는 존재에 대한 불변의 인식에 대해 생각해 보면, 변화와 불변의 비밀스런 역설은 이제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사실 변화의 욕구는 이미 불변의 기획 안에 있는 것이며, 불변의 인식은 변화의 과정에 수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 삶에서 중요한 것이 불변의 타성에 감추어진 변화의 기운과 변화의 현란함 속에 망각되는 불변의 숨결을 포착하는 태도인 것이다.

 

변화의 욕구와 불변의 인식이 똑같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존재이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4. 존재를 위한 새로움이기를

 

"인간 영혼은 새로움을 향해 기운다." 로마 시대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 Publius)가 한 말이다. 새로움의 관점에서도 자연적 조건에 머무는 동물과 문화적 활동을 하는 인간의 차이는 관찰된다. 동물은 새로움과 변화보다는 지속적 안정을 추구한다. 동물은 되도록 새로운 것을 피한다. 사납고 용감해 보이는 맹수도 익숙지 않은 것 앞에서는 몸을 사리고 두려워하며 도망치기까지 한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동물처럼 진기함, 신기함, 놀라움 등 넓은 의미에서 새로움에 대해 거부감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을 향한 욕구와 정열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새로운 것에서 위안을 받기도 한다.

 

이상은 주로 인간이 자신 밖에 있는 객체로서의 새로움을 대하는 태도이다. 인간은 자아의 표출이라는 차원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움을 경험한다. 탐구 행위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깨닫고, 개혁과 쇄신으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여 사회 문화적 발전을 꾀한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도로 무엇을 얻고 깨닫는 것이 큰 기쁨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바꾸는 방식을 각자 개성 있게 찾아내기도 한다. 조안 키티스터(Joan Chittister)는 자신에게 글쓰기의 과정은 관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은 낡은 생각과 낡은 세계관을 벗어 던지게 하는 교환의 필수 과정이라고 한다.5)

 

새 천년을 맞아 이제 모두들 새로움을 위하여 낡은 생각과 낡은 세계관을 벗어 던지고자 한다. "묵은 것이나 폐단을 솔질하듯 털어 없애고 아주 새롭게 한다."라는 뜻의 쇄신은 시대의 화두이자 오늘날 모두가 지향하는 바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진정하게 바라는 것은 새로움의 추구 그 자체가 아니다. 쇄신의 기운으로 다시금 생동할 우리의 삶이다. 더 나아가 그 새로움이 전체적 비전에서 보아 존재를 위한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볼테르(Voltaire)는 새로움을 향한 만인 공통의 취향은 자연의 선물이라고 했다. 선물은 좋은 것이다. 새로움을 찾는 경향과 새로움을 이루어 내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지만, 그것이 존재를 위한 것일 때에 비로소 선물로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또한 진정한 새로움은 탄생의 진통을 겪는다는 것을 잊지 않는 지혜도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 진정한 의미가 있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어야 하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어야 한다. 한 송이의 여린 국화꽃도 그렇게 탄생한다.

 

하지만 국화꽃은 언젠가 져야 한다. 시간의 지배 속에서 새로움의 탄생과 소멸, 곧 변화를 겪어야 한다. 시간의 흐름에 비기면서 변화와 새로움이 지속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일이다. 그러나 말씀의 계시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의 날에, 필연적 법칙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이 끊임없는 새로움의 탄생에 종언을 고하리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구원의 기운으로 새로움과 변화를 존재에 영원히 귀의(歸依)시키리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그리고 존재가 구원되는 순간 시간은 소멸하리라는 것도 믿을 것이다. 구원의 길로 인도받는 것은 시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존재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창세의 절대적 새로움이 한 번 있은 후, 다시 한 번 찾아올 수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새로움일 것이다.

 

 

5.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간상

 

그렇지만 그 날이 오기까지 인간은 '시간의 진행'이라는 역설에 부딪히는 삶을 산다. 진화하고 부패할 수 있는 모든 유기체는 시간과 버겁게 비기며 살고 스러져 간다. 시간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맞는 만큼 우리가 성장 또는 쇠퇴의 진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더 현실적인 말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흐르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우리가 찾아가는 시대이다.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세우는 새로운 인간상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의지와 자유를 의식하고 인정할 때에 시대관과 인간상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증적 결론도 이념적 결단도 아니다. 실용적인 선택인 것이다. 존재를 위한 선택인 것이기 때문이다. 새 천년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쇄신의 기획과 새로운 인간상의 정립도 마찬가지다. 그 의미 부여의 책임 또한 우리에게 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우리가 만들어 내는 모든 새로움은 존재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새로움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 의미 부여의 작업과 책임은 현재와 미래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것에도 연관된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 같은 타불라 라사(tabula rasa)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가 '꽉 차게' 마련해 준 타불라 플레나(tabula plena)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제 과거의 어두운 유산조차도 '살라 먹고' 오늘과 내일의 에너지로 삼는 것이다.

 

새 천년의 태양도 지난밤의 어둠을 살라 먹고 솟아오르는 것이다. 다시금 "말갛게 씻은 얼굴"로 솟아오르는 고운 해도,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새 생명이 넘치는 "이글이글 애 띤 얼굴"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일말의 미련과 동정심 없이 낡은 세상을 모두 싹 쓸어 버리고 정말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욕망을 인류가 저버린 적은 없다. 그렇지만 노아의 대홍수는 신의 권한이고 신의 능력일 뿐이다. 인간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말로써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인간은 새로움을 창조하지 못한다. 새로움을 '이어갈' 뿐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간상도 '이어감'의 지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새로움과 세대의 변화 그리고 그 갈등을 뼈 속 깊이 느끼는 우리에게 하는 소리 같아 소월의 시 한 구절로 글을 맺는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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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상 그리스도교만큼 '새로움으로서 태어남' 또는 '태어남으로서 새로움'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한 종교도 드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윤회적이 아니고 선형적 역사관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복음서에서도 태어남과 새로움을 동어반복(同語反覆)적으로 동일시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다(요한 3,3-8 참조).

 

2) 과학자들은 절대적 의미의 '새로움의 출현'을 밝히기 위한 이론들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현대 과학에서 진화 이론들이 그러한 시도를 했다. 그 가운데서도 C.L. Morgan, S. Alexander 등이 주장한 창발적 진화론(Emergent Evolutionism)은 진화를 새로움의 발현이란 점에 핵심을 두고 설명하고자 했다. 이에 따르면 진화의 창발성이 세상에 일으키는 새로움은 세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 단순히 기존 요소들의 재조합만이 아니고, 둘째, 우주 전체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기존의 것과 양적으로 뿐아니라 질적으로도 다른 것이며, 셋째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창발적 진화론은 새로움(novelty)의 발현에 관해 여타 인문 사회 과학에도 이론적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다.

 

3) 바로 이러한 노력이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뿐 아니라, 오늘날의 자연 과학의 발달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 이유였다. 곧 가시적 현상 너머를 보려는 시도와 노력이 없었다면 인간 사고의 발달과 학문의 체계적 발전 또는 그것의 기술적 적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4) 강의 이미지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저 유명한 단편(斷編)을 생각나게 한다. "모든 것은 흐른다." 변화의 과정과 불변의 존재를 대립시키는 편협한 이분법적 사고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을 불변이나 정체가 없는 변화와 흐름의 철학이라고 해석해 파르메니데스의 부동과 불변의 존재 철학에 대립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고,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상 전체로서의 부동의 존재가 있어야만 변화의 움직임을 품고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변화를 통해서 존재를 인식했다면, 파르메니데스는 '전체로서의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흔들림없는 존재 안에서 가능한 변화를 인식한 것이다.

 

5) 로버트 레일리(Robert Reilly), "글을 쓴다는 것", [사목] 250호(1999. 11.), 151면에서 재인용.

 

[사목, 2000년 1월호, 김용석(전 그레고리안 대학교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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