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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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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3 ㅣ No.115

[격동의 현대사 - 교회와 세상]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5년 3월 7일.

 

신자들은 주일미사가 시작되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당 신부가 자신들을 향해 돌아서서 우리말로 미사를 봉헌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만 해도 등을 돌린 채 제단 벽면 십자가를 바라보고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는데 말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새 전례가 시행되자 전국 본당들은 벽에 바짝 붙어있던 제대를 신자석 쪽으로 빼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사제들은 신자들의 능동적 전례참여 유도라는 취지를 알면서도 "신자들 얼굴을 쳐다보고 미사를 드리려니 분심이 든다"며 갑작스런 변화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같은 변화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년)의 전례개혁 정신에 따른 것이다.

 

공의회는 전례쇄신을 통해 전례 토착화와 신자들 신앙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그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 종교간 대화에 나서도록 힘을 실어준 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의회가 '세상 속 교회'를 강조하면서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지난 40여 년간, 특히 1970~80년대에 공의회의 간접 영향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 배경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추기경들이 모인 자리에서 "바티칸의 창문을 열라"고 말했다. 한 추기경이 "날씨도 안 더운데 왜 창문을 열라고 하십니까?"하고 반문하자, 교황은 "교회에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라고 대답했다.

 

공의회가 일으킨 '쇄신과 시대적응' 바람은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에 서서히 불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쇄신은 전례나 신앙생활 같은 내부적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자기 구원의 안일(安逸)에서 깨어나 현대사회에 적응해야 한다는 공의회 정신은 교회 담장 너머까지 영향을 미쳤다.

 

우선 공의회 정신에 기초한 사회참여 활동이 우리 사회의 변혁을 이끈 점을 꼽을 수 있다.

 

한국 주교단은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 사건 직후 발표한 교서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1971년 11월)에서 공동선, 양심, 인간 존엄성 등을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을 근거로 역설했다. 한국교회 공식문서에 공의회 문헌이 인용된 것은 처음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사회 참여나 세상과의 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참여의 신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공의회가 남긴 16개 문헌(4개 헌장, 9개 교령, 3개 선언문)을 관통하는 정신은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사목헌장 서언)라는 선언은 교회 울타리 안에 안주해 있던 하느님 백성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라고 독려했다.

 

이 같은 '세상 속 교회' 정신은 가톨릭 사회참여 활동의 근간을 이룬다. 사회참여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74~1987년, 교회 단체들이 참여 현장에서 공의회 문헌을 인용한 빈도를 보면 전체 114회 중 83회(72.8%)가 「사목헌장」이다. 그 다음은 「교회헌장」(7%),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4.4%) 순이다. 자신들 활동의 정당성을 공의회 정신에서 찾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존립 근거를 공의회 정신에 두고 이 시기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정구사는 1978년 일본 사제단에 보낸 서한에서 "우리는 교회의 보편진리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정체성을 밝힌 바 있다. 정구사와 함께 사회참여의 주역이었던 정의평화위원회(전국 및 교구)의 존립 근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회참여 주도세력은 1980년대 후반부터 보수화 바람 속에서 해체되거나 장기침체 상태로 빠져든다.

 

공의회 이후 한국교회에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는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활성화다. 공의회가 문헌 「교회헌장」과 「평신도 사도직 교령」 등을 통해 평신도들을 깊은 잠에서 깨웠기 때문이다. 수직적 교계제도 속에서 수동적으로 살아온 평신도들을 복음화 사명의 능동적이고 책임있는 주체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공의회는 평신도의 신원을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의 사람이요, 교회 안에 사는 세상의 사람"(교의헌장 제4장 참조)이라고 정의했다. 평신도의 교회성과 세속성을 모두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평신도는 성직자, 수도자와 함께 교회와 세상의 복음화에 있어서 공동책임을 지고 서로 보완한다"(평신도 사도직 교령 6항 참조)고 가르치면서 평신도들의 시야와 활동범위를 넓혔다.

 

이 덕분에 평신도들은 본당과 교구의 사목평의회뿐만 아니라 주교회의의 여러 전문위원회 활동에까지 참여하게 됐다. 레지오 마리애, 가톨릭노동청년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등 평신도사도직 단체ㆍ운동은 모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설립되거나 도입된 것들이다. 이 같은 사도직 활동은 교회 안에서 맴돌지 않고 밖으로 영역을 넓혀 사회의 크고 작은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평신도들의 각성과 복음적 삶은 사회 복음화로 이어졌다. 서울대교구 시노드 준비위원회 조사자료집에 따르면, 한국 평신도들은 '이웃 및 주위에 직접 권유하는 인도'(29.2%)보다 '생활의 모범'(38.1%)을 통한 선교방식을 선호한다. 세상을 성화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는 데도 전적(47.7%)으로, 또는 어느 정도(48.1%) 동의한다. 또 가장 바람직한 평신도상을 '사회 전체 구원을 위해 정의ㆍ평화ㆍ사랑 구현에 최선을 다하는 것'(43.5%)이라고 본다.

 

평신도 각성이 교세성장과 사회 복음화에 얼마만큼 기여했는가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여도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한국사회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1967년 당시 마산교구장 김수환 주교는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라는 논문에서 교회 존재 이유의 회복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공의회를 기점으로 하나의 새 세대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또한 이를 종점으로 교회사상 한 특징적 세대가 그 막을 내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 이래 400여 년간 교회생활과 양상을 지배한 트리엔트 시대의 종식이다. 트리엔트 시대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 종교개혁적 자세와 세속주의에 대한 반세속주의 투쟁으로 일관한 시대였다. 교회와 세계의 대화 단절은 단지 양측의 유리(遊離)만을 뜻하느 게 아니라 교회 본질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한국평협 한홍순(토마스) 회장은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2000년 평신도 대희년 행사에서 '공의회를 다시 읽으라'고 강조했다"며 "이는 공의회 16개 문헌의 행간에 있는, 그 밑바닥에 있는 정신을 다시 읽고 실천에 옮기라는 촉구였다"고 말했다.

 

[평화신문, 2008년 6월 1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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