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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16: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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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24 ㅣ No.134

[격동의 현대사 - 교회와 세상] (16)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정의의 목소리를 갈망하던 시대... 천주교 위상 높여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 부산 중구 대청동. 봄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는 한층 화사하고 평화로웠다.

 

그런데 미국 문화원에서 갑자기 "펑"하고 불길이 치솟더니 3층 슬래브 건물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그 시각 인근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는 수 백장의 불온 유인물이 뿌려졌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물러가라"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불길

 

그날 저녁부터 모든 신문방송이 미 정부 시설에 대한 백주의 방화 사건(이하 부미방 사건)을 연일 톱기사로 보도하면서 나라 전체가 술렁거렸다. 국민들은 혈맹 미국의 성조기가 검은 연기에 휩싸인 현장 사진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AP, UPI 등 세계적 통신사들도 이 사건을 전 세계로 긴급 타전했다. 미국 도움으로 한국전쟁의 풍전등화 위기를 모면한 데다 반공을 국시로 삼는 남한에서 반미 구호가 터져 나온 것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방화범 색출에 팔을 걷어붙였다. 평양에서 밀파된 간첩이나 좌경 용공세력의 소행이라 단정하고, 각 시도경에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전 경찰에 비상령을 내린 치안본부는 "범인 검거 후 은신 장소가 밝혀지면 해당 관할구역 경찰서장을 엄중 문책하겠다"며 수사를 독려했다. 경찰은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휘발유를 뿌리고 도주한 여학생 몽타쥬를 만들어 전국을 이잡듯 뒤졌다. 언론이 수사 진척상황 소식을 연일 도배하다시피하면서 방화범 검거는 국민적 관심사로 증폭됐다.

 

광주민주화운동(1980년)을 유혈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로서는 국내 혼란을 겨우 진정시키고 국제적 위상에 눈을 돌리던 때라 이 사건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잔존하는 좌경 용공세력을 뿌리 뽑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건 발생 13일 만인 31일 아침, 마침내 경찰이 방화범 이미옥(부산 예수교장로회 고려신학대생) 등 몇 명을 체포했다는 긴급뉴스가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좌경 용공의 온상으로 매도당한 가톨릭

 

그 시각 원주교구 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는 그 뉴스를 듣고 김현장(빈첸시오, 당시 31살)이 은신해 있는 지하실로 뛰어 내려갔다. 김현장은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수배자로, 이곳저곳 전전하다 지인들 도움으로 교육원에 숨어 있었다.

 

"빈첸시오, 부미방 범인들이 붙잡혔다는데 알고 있어?"

 

"예, 방금 라디오에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범인 중 일부가 지금 저와 함께 있습니다. 사실상 이번 사건을 주도한 문부식과 김은숙입니다."

 

"뭐? 여기 지하실에?"

 

최 신부는 기절할듯 놀랐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를 방으로 불렀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조직 하부가 체포됐는데,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자수하도록 설득해보겠습니다."

 

최 신부는 곧바로 서울 한강성당으로 달려가 함세웅 신부를 만났다. 함 신부와 의논 끝에 정부 고위 당국에 그들의 자수의사를 전달했다. 이튿날 예정대로 그들 신병은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 인도됐다. 그런데 심문과정에서 김현장이 사건 배후인물이라는 사실이 하루만에 드러났다. 최 신부는 곧바로 김현장을 자수시켰다. 김현장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터라 "조용한 산골 교구에 누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조사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사 칼날은 사건 배후 김현장을 숨겨준 최기식 신부와 천주교를 겨냥했다. 최 신부도 결국 체포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유혈 진압 이후 재야세력과 학생운동권을 초토화시킨 상태였다. 언론도 모두 장악해 입에 재갈을 물려놓았다. 그러나 천주교는 길들이지 못했다. 1980~1982년 서슬 퍼런 정권을 향해 양심의 목소리를 내는 단체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유일하다시피했다. 정권은 이 사건을 가톨릭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언론기관을 총동원해 가톨릭을 음해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왜곡, 편파보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언론에 의해 원주교구 교육원은 좌경불순세력의 온상이, 최기식 신부는 '빨갱이 신부'가 되어갔다. 한 예로 원주지역 농민들이 시위 때 사용하고 쳐박아둔 피켓을 창고에서 찾아내 '좌경 의식화 교육 증거'라고 떠들었다.

 

- 5공 통제하에 있던 언론들이 최기식 신부와 가톨릭에 대한 왜곡, 과장보도를 일삼자 김수환 추기경 등은 공정보도를 촉구하며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사진은 당시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내용.

 

 

이러한 음해성 보도가 2~3달간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도시에서는 한 시민이 "빨갱이 소굴"이라며 성당에 돌을 던지고, 한 택시기사는 승객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고 "천주교인은 안 태운다"며 하차를 종용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심지어 일부 신자들은 악화된 여론에 위축돼 신상명세서 작성 때 종교를 '무교'라고 쓰기까지 했다.

 

공안 당국도 이 사건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신부들, 하다못해 김현장과 옷깃이라도 한 번 스친 적이 있는 신부들을 모조리 연행해 조사했다.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 부산교구 송기인 신부, 인천교구 황상근 신부 등 10여 명이 경찰에 불려갔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는 "조선조 4대 박해 이후 최대 수난"이라며 우려했다.

 

 

사제로서 한 점 부끄럼 없다

 

당시 재야 운동권에서는 신군부의 광주 유혈 진압이 미국의 묵인 하에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또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한국 국민성을 모독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고 있었다. 부미방 사건의 뿌리는 광주 비극이라는 것이 사건 당사자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이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교회로서는 최 신부 구속을 둘러싸고 '양심법과 실정법' 충돌이라는 지난(至難)한 문제와 싸워야 했다.

 

최 신부는 구속되면서 발표한 양심선언문에서 "김현장이 80년 5월 말경 광주사태 후 죽다시피되어 찾아왔을 때 사제로서 우선 치료를 해주고 돌봐주지 않을 수 없었다…나는 사제로서 양심상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내 행위가 실정법에 저촉돼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달게 받겠다. 광주사태와 관련 있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고 밝혔다.

 

최 신부는 법정에서도 "교회의 양심법과 실정법이 상충될 때 사제는 양심법을 우선적으로 따라야 한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최 신부는 극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TV 뉴스에 연일 비치는 그의 평온한 얼굴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수환 추기경은 4월 8일 미사 강론에서 "최 신부 구속은 사제 신원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지는 사건이다. 예수께서 범법자가 당신에게 찾아와 도움을 구하면 밀고를 했겠는가? 최 신부는 죄인은 물론 고통받는 사람과 아픔을 함께 나눠야 하는 사제의 양심을 따랐다"고 말했다.

 

이후 전국 교구와 단체에서 최 신부의 양심을 옹호하는 한편 언론기관의 공정보도를 촉구하는 성명이 잇따라 발표됐다. 주교단은 담화를 통해 "최 신부 행위는 사제로서 최선의 길이었음을 확신한다. 오늘 이 사회의 언론자유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일방적 과장보도의 저의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당시 이돈명 변호사를 주축으로 황인철ㆍ홍성우ㆍ이홍록 변호사 등이 변론을 맡아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35살 젊은 나이에 기라성 같은 선배들 틈에서 특유의 소신으로 검찰 주장을 옹색하게 만들었다. 문부식과 김현장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80년대 후반 풀려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최 신부는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이래 원주에서 줄곧 사회복지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부미방 사건은 민주운동사 측면에서 제5공화국의 폭압정치에 숨죽이고 있던 재야 민주진영을 각성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최 신부의 양심적 행동을 한 목소리로 지지하면서 일치를 이루고, 시국 문제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나아가 이 사건은 정의의 목소리를 갈망하던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80년대 가톨릭에 대거 입교하는데 단초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화신문, 2009년 8월 23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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