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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61-62: 춘천교구의 사제와 성소사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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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61) 춘천교구의 사제와 성소사목 I
강원도 출신 첫 번째 사제는 영동 지역 간성에서 출생하여 강릉의 제비골1)에서 용산 소신학교에 들어간 서병익 바오로 신부이다. 그는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10일 용산 신학교를 졸업하고 종현 성당에서 동갑인 최문식 베드로2)와 함께 사제서품을 받았다. 사제 인명록에 따르면 그는 19번째 한국인 신부이다. 두 신부의 수품으로 조선교구의 한국인 신부는 15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프랑스인 사제는 46명이었고, 전국의 총 신자 수는 73,057명이었다. 서병익 신부의 첫 임지는 전라도였고, 이곳에서 사목한 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 서 신부는 사제생활의 후반을 전라도에서 보낸다. 그는 1931년 강원도 춘천 약사리 본당(현 죽림동 주교좌 성당)에서 4년간 주임 사제로 사목하다가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사목하였다. 전라도로 가기에 앞서 1935년에는 대구교구 주교좌 계산동 본당에서 1년간 임시로 사목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서병익 신부는 강론 잘하는 다혈질적 성격의 소유자로 교우들에게 기억되었다고 한다.
1) 강릉 구정면에 제비골이라는 마을이 1922년 이철연 신부의 연례보고서에 언급된다. 2) 양양 본당의 주임으로 있으면서, 현재 강릉 지역의 신앙공동체 설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2020년 3월 22일 사순 제4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62) 춘천교구의 사제와 성소사목 II
오늘은 춘천교구 설립(1939년 4월 25일) 후 첫 번째 사제였던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그는 1911년 8월 9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 산골 마을에서 아버지 김덕희 에티엔(스테파노의 프랑스식 이름)과 어머니 이 마리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독실한 신앙인으로 성가정을 이루었으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 편부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12세가 되던 해인 1923년 9월 고향을 떠나 서울 용산 신학교(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 생활을 함께했던 동창 신부들은 그를 ‘활달하면서도 섬세한 사람’ ‘절대 남과 다투지 않는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 으로 기억했다.
해방 후 공산정권 수립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여의치 못하고 신변에 위협도 있었지만 김교명 신부는 단호히 월남을 거절하고 자신의 임지를 지키며 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교구장 주교와 사제들이 차례로 체포 또는 납치되는 가운데 거의 연금 상태에 있던 와중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다음 날 새벽 김교명 신부는 연행되어 일주일간 의주 보안서에 억류되었는데, 그 후 아무도 그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춘천교구 설립 후 탄생한 첫 사제 김교명 신부는 11년간의 사목 생활을 마치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춘천교구를 담당했던 성 골롬반 선교회에서도 한국인 사제양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사제 양성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한국인으로 처음 춘천교구 주교로 부임한 장익 십자가의 요한 원로 주교는 지속적인 사제 양성을 위해 정성을 다했으며, 현 김운회 루카 주교는 사제 양성을 담당하는 성소국을 신설하여 좋은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05년 11월부터 춘천교구 주교는 함흥교구장 서리를 당연직으로 맡게 되었다. 그래서 춘천교구의 사제 양성뿐만 아니라 남북이 자유로이 왕래하는 날을 대비하여 현재 춘천교구 성소국에서는 함흥교구(부제 1명, 신학생 4명) 사제 지원자를 뽑아 함께 양성하고 있다. [2020년 3월 29일 사순 제4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0 1,063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