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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강론자의 세 가지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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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6 ㅣ No.672

강론자의 세 가지 임무

 

케네스 운터너(미국 미시간주 사지노 교구 주교)

 

“…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1데살 2,13).

 

예전에 필자는 강론자를 요리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요리사는 식품 저장고와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고(성경 본문), 식단을 정하여(중심 생각) 음식을 만든 뒤(강론), 이를 제공한다.


그러나 필자가 좀 더 다르게 이해하게 된 점은 바로 강론자는 이미 만들어진 음식이 있는 부엌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 음식들은 주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것이다. 전례는 식단, 조리, 차림을 포함한 주님께서 마련하신 식사이다. 우리는 주님을 거드는 사람이다.


강론자를 포함한 전례 집전자들의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돕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전례 기도의 인도자이시기 때문이다. 강론을 준비하면서(또는 전례를 계획하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겸손되이 주님 앞에 서는 것이다.

 

 

강론자의 세 가지 임무

 

앞서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강론자의 역할은 세 가지 임무로 요약된다.


(1) 오늘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행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식별한다.
(2) 회중이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3) 이 모든 일을 교회를 대신하여 한다.

 

 

1. 오늘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행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식별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책 안에 있지 않다. 다음을 포함하는 전체 사건 안에 살아있다.


- 오늘의 성서 본문(주일에는 4개의 성서 본문이 읽힌다. 곧 독서 3개와 시편)
- 오늘의 전례적 배경(전례시기, 축일 등)
- 오늘의 역사적 시간과 장소(지금 우리 세상과 교회에서 지속되고 있는 모든 것)
- 현재 있는 사람들(강론을 듣는 이들의 실제 삶의 배경)


강론은 물론 성서 주석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그것 이상이다. 우리는 어떻게 오늘의 독서가 지금 여기에서 작용하는지 식별하도록 노력한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강론자들은 자주 “역사적인 예수”를 설교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 곧 강론자들은 과거의 예수님만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다. 또한 가만히 계시지도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향해 활동하고 계시며, 특히 전례 안에 살아계신다. 이러한 성서와 현재 사건의 결합으로 무언가가 촉발된다. 강론자인 우리는 이것을 발견하고 하느님 백성을 위해 이를 열어 보여야 한다.


전례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살아있으며, 결코 재연되지 않는다.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과거에 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아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교리이다.1)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살아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 생명력을 주는 것임을 뜻한다.2) 이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힘을 가진 은총의 말씀이다. 또한 이는 참된 말씀,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말씀을 넘어선다. 곧 전통적 용어를 사용하면, 그것이 가리키는 구원을 가져오는 ‘유효한 표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개인과 교회를 형성한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는 말씀에 이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3)라고 하셨다. 잠시 뒤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


바오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로마 1,16). 강론자들은 은총이며 살아있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이 말씀의 흐름을 식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회중이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주님께서 오늘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식별한 다음, 강론자들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임무는 회중이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3)


강론자들은 많은 일이 이미 강론 전에 일어났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가, 상징, 기도 그리고 하느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흘러들어왔다. 우리의 임무는 이미 이루어진 이 흐름을 돕는 것이다. 강론자들은 그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 55,10-11).

 

강론자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은총에 의지한다. 그 은총은 강론자의 화술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4)

 

 

3. 이 모든 일을 교회를 대신하여 한다.


강론자가 강론을 할 때는 교회를 대신하여 하는 것이다. 곧 강론자는 개인적으로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며, 하느님의 개인적 대변인 역할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우리는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은총에 참여하여, 우리 신앙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신앙을 공유한다. 이것이 바로 강론이 개인적 증언과 다른 이유이다. 개인적 증언을 위한 때와 장소가 있을 수 있지만, 강론은 이보다 넓은 차원의 것이다. 강론자는 주님께서 오늘의 사건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식별한 것처럼 교회 전체의 신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강론자는 인간적인(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방식으로 강론을 해야지, 메시지의 범위를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폭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몇 가지 결론

 

앞서 설명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봉사한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1. 준비 과정이 훨씬 즐거울 수 있다.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강론은 더 이상 매주 성서의 말씀을 설명해야만 하는 의무가 아니다. 그 대신 강론자들은 이미 일어나고 있고 매우 훌륭한 어떤 일에 동참하여 그것을 돕는다. 선포된 성서가 넘쳐흐르고, 강론자들은 이를 돕는다. 흐름의 식별은 연구와 기도 그리고 해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전하는 데는 어떤 창조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신에게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

 

2. 소재 고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다양한 자료들은 일정한 양이 비축되어 있는 기름과 같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마르지 않는 살아있는 물이며 공동체의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살아있는 말씀이 삶과 연관되어 있을 때, 끝없는 풍요로움이 지속적으로 열린다.

 

3. 매주 새로운 주제를 소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같은 주제를 차례대로 몇 주에 걸쳐서 설교하는 것을 편하게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부활시기에는 그동안 설교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부분인 성령을 중심으로 강론할 수 있다(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활동만 강조한 경향이 있다.). 이번 주일에 성령에 대한 강론을 했다면, 다음 주일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지난주에 이미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새로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강론자는 같은 주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매번 신선한 방식으로 같은 진리를 반복해서 들려줄 수도 있다. 계속되는 주일 강론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아니라 주일마다 살아있는 성서를 비추는 것이다.

 

4. 좋은 강론은 언변이 뛰어나지 않은 강론자에게서 나온다.


강론자보다는 하느님 말씀에 집중하게 된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존경과 사랑이 드러날 것이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초점은 강론이나 강론자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통찰에 맞춰질 것이다. 강론이나 강론자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에 열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훌륭한 강론은 기본적인 연설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이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강론자가 타고난 이야기꾼, 연예인 또는 외향적인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5. 강론은 훨씬 더 다양해질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나 기도 중에 우리 마음에 떠오른 것을 판단하는 척도로 성서를 이용하다 보면, 각 강론자는 개인 성향, 관심 분야, 자신의 성격 유형 등에 따라 인간관계, 사회 정의, 교회의 가르침 등 자연적으로 끌리는 주제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반면, 성서 앞에 겸손되이 서서, 하느님께서 오늘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들으면, 강론자들은 자신의 내적 성향에 따른 동일한 주제로 강론하지 않게 된다. 이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요한 21,19 참조).

 

6. 좀 더 직접적으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대해 강론할 것이다.


신자들 가운데 강론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보다는 교회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신자들이 얼마나 자주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런데 이러이러한 것들에 대해 교회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그러면서 그들은 좀처럼 다음과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이러이러한 것들에 관해서 주님께서 뭐라고 가르치십니까?”

 

7. 우리 신앙의 기초 진리를 강론할 것이다.


성서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판단하는 척도가 아니라) 우리의 안내자이다. 성서는 계시된 진리의 깊이와 인간 생활의 깊이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주제 선택이 강론자의 몫으로 남겨지다 보면, 가장 근본적인 진리 가운데 어떤 것들은 너무 분명하거나 어렵기 때문에 소홀히 다뤄질 수 있다.


이에 대해 오랫동안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근본 진리들, 곧 하느님과 성령 그리고 구원과 은총에 대해서는 설교하지 않는다. 얼마 전 필자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주님의 탄생, 기적 그리고 그분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셨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느님이신지에 대해 물어보자, 놀랍게도 대부분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 책임을 종교교육 프로그램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강론은 어떠했는가?


오늘날 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여자 복사를 허용할 것인지, 하느님을 어머니라 부르면 안 되는지, 누구를 사목자로 부를 수 있는지 등에 관한 논쟁에만 집중한 채,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핵심 진리인 복음을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8. 이러한 강론의 효과는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강론은 개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지는 않을 것이며, 혁신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처럼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점점 더 쌓여 그 모습을 갖출 것이며, 대체로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서 성서 말씀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강력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성서를 더 잘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강론 자체보다 그들 영혼에 흐르는 깊은 통찰에 더욱더 열중할 것이다. 신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일시적인 희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게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건강식의 효과는 바로 다음 날이나 그 주에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며, 좋은 음식이라고 하여 모든 음식을 섭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을 통해서만 우리는 잘 먹은 효과를 느낀다. 이것은 강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맺음말

 

교회와 각 신자들을 이루는 것은 강론자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힘이다. 강론자의 기술이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이는 강론자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봉사하는 데 사용되는 기술이다.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목자들은 자신들의 설득력이나 영리함 또는 프로그램이나 정책 그리고 조직적 능력으로 봉사하지 않는다. 바로 ‘성사’가 그 빛을 공동체에 쏟고 생명을 비추도록 할 것이며, 사목자는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에 진실되이 봉사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할 것이다.


전 세계 교회에서 하느님 말씀이 그 힘을 잃는 일이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악령에게 소리치시며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으셨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서로 수군 거렸다. ‘그분의 말씀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분의 말씀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그분의 말씀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하는 은총의 말씀이다.

 

* 출처__ Kenneth E. Untener, Preaching Better, Paulist Press, 11-17면, 한길자 편역.

 

 

각주


1) 전례에서 선포된 성서의 “살아있는” 글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 「거룩한 공의회」와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 당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전례 헌장, 7항).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복음을 선포하신다”(「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9항).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구원의 신비의 문을 열어두신다. 또한 그들의 영혼을 풍부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을 통해 신자들에게 나타나신다”(같은 곳, 33항).


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6,51 참조).


3)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강론이 있어야 하는가?” “그냥 하느님의 말씀만 선포하고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가?”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행동하신다고 믿는다. 이런 경우 강론자가 이에 해당된다. 따라서 강론자는 우리의 전례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4) 살아있는 말씀의 충실한 임무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의미와 함께 나타난다.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1993년에 발표한 문서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은 현실화(예를 들어, 성서가 현대 시대에 말해야 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와 토착화(예를 들어, 특정 공동체 안에서 그 문화에 맞게 성서를 놓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현실화에 관하여: “사실 교회는 성서를 단순히 자신의 기원을 다루는 역사 문헌들의 모음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는 성서를 자신과 현대세계 전체에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 현실화가 필요한 이유는 성서 본문의 메시지가 비록 항구적 가치를 지닌다 할지라도 그 본문이 과거의 환경에 맞게 그리고 다양한 시대적 조건들에 한정된 언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이를 위하여 본문의 의미를 밝히려면, 본문의 메시지를 현대의 환경에 적용시키고 그 메시지를 우리 시대에 맞는 언어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 토착화에 관하여: “토착화는 분명히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부유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 다양한 문화 안에 포함되어 있는 보화는 하느님의 말씀이 새로운 결실을 맺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말씀의 빛은 각 문화가 내놓는 것들을 취사선택하여 해로운 요소들은 제쳐놓고 유익한 요소들은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도와준다.”

 

[사목, 2005년 5월호,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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