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세상의 희망인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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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63

세상의 희망인 사제

 

 

이끎 말

 

사제들은 예외없이 신학생으로서 가톨릭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학교의 모든 과정을 마친 후에 서품된 자들이다. 사제들은 수품 후 주어진 성무를 기쁘게 수행하면서 아무 어려움 없이 성실히 살고 있는가? 사제들은 세상에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 사제 자신이 주님 안에서 만족과 평화를 느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틀림없이 사제와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들은 참 진리와 희망을 발견할 것이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사제들의 삶이 위기를 겪는다면 세상에 주는 희망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신학교에서는 정해진 규율에 따라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으로 만사가 해결되지만, 서품을 받고 사목 현장에 나가게 되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사제들이 성사 집전, 교리 교수, 신심 및 활동 단체 지도, 가정 방문, 성당과 교육관 신축과 개보수 등 사목 활동을 통해 괄목할 만한 업적과 결과들을 내고 있지만, 신심(身心)이 지쳐 기력을 잃기도 한다. 육체적인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신적인 피폐 상태를 겪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사제가 처해 있는 전반적인 사회 여건을 점검하고, 사제의 신원과 정체성, 영성, 역할 등을 살펴보면서 세상이 요청하는 참 사제의 모습을 제시하려고 한다. 사제가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고 주님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할 때 사제는 분명히 세상에 희망과 용기, 화해와 평화를 선사하는 도구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1. 현대 사회와 사제의 위치

 

현대 사회는 과학 문명이 주도하는 사회이다. 과학적 사고 방식은 사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현재 정보 혁명, 광전자 혁명, 광섬유 혁명, 생명 공학 등의 비약적 발전이 진행되고 있다. 과학 기술은 인간들에게 생활의 편리와 안락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 기술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헤어날 수 없는 마력에 젖어 들 수 있다. 이 때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정신적, 윤리적, 종교적 가치는 사라지고, 결국 인간은 삶의 궁극적 의미를 상실하고 방황하게 된다.

 

오늘날 특수 방송국, 광파(光波) 통신 케이블, 케이블 TV, 컴퓨터, 통신 위성 등 탈획일화 미디어를 주도하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무제한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인간의 정신도 개성을 강조하며, 사회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불변하는 체제와 제도, 고정된 사고, 기존의 윤리 규범을 거부하고, 개인의 정서와 감정을 우위에 놓거나 절대시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성적 탈선과 이혼이 일상화하고 있고, 혼인 제도 자체의 무의미와 무가치를 주장하기도 하며, 동성애를 기본권으로 요청하는 움직임도 노골화하고 있다. 가시적인 세계가 전부라는 전제하에 종교적, 정신적 가치와 활동이 퇴조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권력, 부(富), 지식을 의미하는 정보는 현대인의 필수적 구비 요소이며, 이것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이른바 인터넷 활용이 극대화하는 정보화 시대는 전세계의 시간적, 공간적 간격을 없애고 실시간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교류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집에 앉아서 모든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동산과 부동산을 매매하고, 물건을 사고 팔고, 주문하고 발송하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면 여가 시간이 늘어나 가족과 대화하고 시간을 많이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편리한 삶의 이면에는 기계에 불과한 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어 그 중독 현상으로 정신적 공허와 방황, 삶의 비인간화가 초래되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인간 관계가 인정과 인간미를 상실하여 극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추구하게 되면 비인간적 사회를 촉발하게 되어 폭력, 살인, 자살 등이 만연하거나 광적인 스포츠, 폭력적이고 선정적 영화, 마약, 비정상적 섹스와 음란 문화, 퇴폐적이고 외설적인 문화 등을 조장하는 물질만능주의와 쾌락만능주의 사회를 지향하게 된다.

 

현시대의 공해 문제는 아주 심각하여 인류의 생존과 행복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공해 유발 방지 운동을 벌이고 공해 제거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겠지만, 여전히 미래는 어둡다. 공해를 생산하는 과학 기술 발전 속도를 차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개발되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화학전 재료, 세균 무기 등은 지구의 멸망과 파괴, 인류의 대량 학살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한편 과거 70여 년 간 지속되었던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동서 대결 구도는 깨어져 더 이상의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를 고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유럽, 북미주,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지역별로 뭉치는 경제권이 형성되고 있다. 이들 지역 경제권의 여건과 분위기에 따라 최첨단의 기술을 소유한 국가, 기업, 집단, 개인 등이 다수의 인류를 통제하고 지배할 공산이 크다.

 

현대 사회는 극도로 긴장해야 하고 피곤하며 불안한 사회이다. 쉴 사이 없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적응해야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새 상품과 기계의 구매와 활용은 자동화, 간소화, 편리함 등을 제공하여 시간을 단축시키고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늘 긴장해야 하기에 인간적인 여유와 휴식을 박탈당하게 된다. 여가 산업의 발전이 고요함과 정신적인 안락함을 빼앗고, 오히려 소란함, 부산함, 긴장과 불안을 증폭시키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대 사회에는 생활 방식과 의식 구조의 변화로 이에 부응하려는 신흥 종교들이 출현하고 있다. 신흥 종교 중 건전하게 발전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많은 경우 말세 임박설, 교주 신격화, 기존 사회 질서 거부와 관련한 직장, 학업, 재산, 가정 생활의 포기, 집단 히스테리와 성 문란 행위, 공동 생활과 집단 폐쇄성이 낳는 폭력 행위, 노동력 착취 등의 문제를 갖고 있다. 세계화와 개방화의 물결의 영향으로 미확인 비행 물체(UFO)나 외계인을 신봉하는 신흥 종교, 집단적이고 공간적인 장소를 이용한 집단적인 예배 의식 없이 컴퓨터 네크워크만으로 연결되는 '인터넷 종교'(cyber religion)가 젊은층을 공략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연령층, 지적 수준, 직업에 관계없이 확산될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신비스런 측면이 많다. 자연과 인간과 우주는 과학과 기술이 밝힐 수 없는 신비 현상을 담고 있다. 인류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과학과 기술은 핵무기, 생태계 파괴의 주요 원인인 화학 물질의 합성 등으로 인류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 세상이 경제적 가치, 황금의 위력, 물질적 가치, 육체적이고 감각적 쾌락의 추구, 취미와 오락의 극대화 등을 숭상하고 지향하는 사회로 달려가고 있어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와 규범이 실종되고, 정신적 유산, 종교적 신심이 고갈되어 가고 있다. 이런 세태와 풍조 속에서 사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세상을 위해 어떻게 이바지 할 것인가? 진정으로 사제는 세상에 희망을 주고 있는가?

 

 

2. 사제의 정체성과 영성 생활

 

사제는 누구이며 무엇 하는 자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고, 성스럽고 거룩한 일을 하는 자이다. 그러기에 사제직 수행을 신앙 없는 자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한평생을 오직 주님 사업에만 헌신하면서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과 욕망인 성욕을 절제하고 가정을 이룰 것을 포기하면서 독신 생활을 할 수 있는가? 보통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목적을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가르치고 부양하면서 행복과 보람을 찾는 것으로 보는데, 사제들의 모습은 세상의 사고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사제는 세상이 주는 재미와 안락, 행복을 포기하는 대신 사제직 수행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 선물과 기쁨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사제직을 거룩한 직무로 이해하는 것은 신앙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사제직은 이런 면에서 일반인의 직업이나 생계 수단, 호구지책과 동일선상에서 기술될 수 없다. 사제직은 성직이기에 언제나 성실하고 거룩하고 진실되이 수행해야만 한다. 사제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정신 사조와 풍조에 얽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정신에 따라 세상을 복음화하는 일에 투신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이다. 이와 같은 사제의 모습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변질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닌다.

 

사제들이 본연의 사제직을 정도(正道)에 맞게 이행한다면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평온한 가운데 주어진 사도직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제들은 힘겨움, 피곤함을 겪어야 하며, 때로는 사제직 자체의 정체성 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제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구원과 은총을 전달하는 도구로, 목자적 사랑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헌신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느님과의 내적 대화만이 사제의 신원을 유지시켜 주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바로 사제의 삶에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리를 잡는 영성이 요청된다.

 

사제의 기본적 모형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 안에서 목자이며 지도자인 사제의 이상형이 나타난다. 착한 목자는 언제나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며(요한 10,11) 양들을 찾아 나선다(요한 10,16). 그러기에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을 철저히 섬기며 온전히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있다. 그런데 사제의 봉사와 희생적 삶은 사제 서품으로 저절로 주어지지 않으며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그분의 정신 안으로 들어갈 때 가능해진다.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제의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와의 일치이지, 사제로 서품되었다는 외적 사실만이 최종 목표를 달성한 것이 아니다. 신학생들은 사제 서품을 최종 목표로 삼고 주어진 과정과 단계에 따라 인성적, 지성적, 영성적, 사목적 교육을 받고 사제 서품을 받게 되는데, 사제 서품을 받는 것으로 이미 최종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의 영성 생활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사제는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하게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십자가 죽음으로써 사제직을 완벽하게 수행하셨는데, 그 활동은 늘 기도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분의 열성적인 활동은 언제나 기도와 밀접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른 새벽 몹시 어두울 때에 예수께서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외딴 곳으로 물러가서는 거기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열성적인 사목 활동이 기도와 일치되고 조화된 생활은 사제 생활의 이상적 모형이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돌려보내시고 한적한 곳으로 피하시어 기도하셨고(루가 5,16),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다(루가 23,33-46). 예수님의 공생활은 언제나 기도와 일치하고 조화를 이룬 생활이었다. 사제가 하느님과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잠기면 자연적으로 사목적인 열성이 용솟음친다. 사목 생활에 생기를 주는 것은 외적인 어떤 업적과 활동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이다.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투신하겠다는 열정과 욕망은 깊은 내적 기도에서 발원한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사제들은 그 근거를 깊은 내적 생활에 두어야 하며 정상적이고 수덕적인 삶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생활로써 사제는 백성들을 지도하고,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의 활동이 기도와 조화를 이루었듯이 사제의 사목 활동도 기도와 일치될 때 가장 이상적(理想的) 모습이 된다. 사제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사제직 자체가 영적(靈的) 직무이기 때문이다. 기도 없는 사제직 수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반대되는 방향을 취하게 되고, 단순한 기능적, 기계적 일로 추락하게 된다. 사제의 기도는 사제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직무이며 사도직에 속한다. 영성 생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실천 사항이다. 그런데 신자는 사제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고, 여러 가지 사정이 담긴 내용을 알리며 기도를 부탁한다. 신자 자신과 가정의 고통과 고뇌, 불편한 인간 관계, 직장과 사회 생활의 갈등, 속 썩이는 자식과 교육 문제, 취직 시험과 사업 등의 사안을 들고 와 기도를 청한다. 당연히 사제는 신자의 지향을 거부하지 않고 들어준다. 신자는 사제에게 기도를 청하며 찌든 삶 속에서도 큰 위안과 용기를 얻고, 사제는 신자를 대신하여 기도하면서 사제로서의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사제는 이렇게 신자에게 희망을 주는 꼭 필요한 존재이다.

 

현대 사회는 물질주의와 과학 만능 사조로 활동주의, 업적주의, 실적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런 풍조가 사제들을 오염시키고 있다. 교회가 하느님의 의지, 영적 가치를 경시하고 겉모양이나 외적 활동을 높이 평가한다면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교회의 분별없는 활동 지상주의는 결국 사도직을 기업화하고, 진정한 복음화 사업을 외면하며, 올바른 선교적 지향없이 일반 기업체처럼 표면적 경쟁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사제들은 외적 활동만을 기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서품된 것이 아니다. 기도와 활동의 조화만이 현대의 물질 문명의 병폐와 과학 만능의 사조를 극복하는 지름길이다. 사제가 기도하는 습관을 생활화하고, 이를 활동과 자연스럽게 접목시킬 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위안, 기쁨과 희열을 느끼며 기꺼이 사제직에 일생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세상에 큰 희망을 주는 바람직한 사제의 모습이다.

 

 

3. 사제의 직무와 역할

 

사제는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사제는 하느님께, 그리스도께 그리고 교회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제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부르신다. 그러나 사제 성소를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권한은 제도적인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제들의 몫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며 하느님의 백성을 성화시키고 그들을 돌보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활동하며 서품을 받게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대리하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직무를 이어받는다. 그 직무는 교도직, 성화직, 친교직이며, 이는 구원자이시며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직무를 이어받는 것이다. 이런 고귀한 직무를 부여받는 사제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완덕을 이룰 의무가 있다. 더욱이 성품성사를 통해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합치되었으므로 더욱 완덕에 부름 받고 있다. 사제의 존재와 사명은 예언자요 사제이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직무 수행을 통해 자신을 성화하는 것이다. 사제는 직무 수행에 앞서 근원적으로 성령에 의해 날인되고 제2의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취함으로써 성화와 완덕으로 나아갈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사제는 복음을 전파하고 양 떼를 지도하며 신약의 확실한 사제로서 하느님께 경신례를 드리기 위해 축성되는 것이다. 교구장이 한 교구의 총 책임자이긴 하나, 그는 일반 사제의 협조와 도움이 없이는 사목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교회 공동체의 통상적인 업무와 신자 개개인의 영성 생활 지도는 사제들이 수행하고 있다. 신자들은 자기 삶의 터전에서 그들의 교회를 키워 나가고, 사제와 더불어 하느님께 경신례를 드리며 영적 성장을 꾀하게 된다. 사제의 역할에 따라 교회의 생명, 성장, 성패가 달려 있다.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봉사의 삶이었다. 위에서 본 대로 그리스도께서 사신 모습은 바로 사제의 신원을 말해 준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그리스도(요한 3,17)의 모습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시어 당신 목숨까지 바치신 그리스도의 자아 포기를 강조한다(마태 20,28; 필립 2,7-8). 마르코 복음 1장에 주님의 하루 일과가 잘 나타나는데, 자신을 조건 없이, 온전히 내어 놓으시는 주님의 열성적인 행위에 놀라게 된다. 안식일임에도 온종일 사람들을 위해 일하시는 모습, 곧 오전에 회당에서의 설교, 악령들린 사람의 치유, 베드로 장모의 치유, 저녁 때 집으로 몰려오는 병자들의 치유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먼동이 트기 전 조용한 곳을 선택하여 기도하시고,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마르 1,38)라고 하시며 온 갈릴래아를 다니셨다. 그분께서는 전도 여행에 지쳐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시기도 하셨고(요한 4,6), 거센 파도가 치는 가운데 배 안에서 주무시기도 하시고(마르 4,38),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난하게 사셨다(루가 9,58). 물질, 명예, 권력은 그분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분의 봉사적 삶은 십자가상 고통과 죽음에서 절정에 달한다. 수난과 죽음은 그분께서 인간에게 보여 주실 수 있는 마지막 봉사의 극치이다.

 

"이방인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2-45). 위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하 관계의 태도를 바꾸신다. 위대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아 타인에게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뿐이다. 세속의 기준과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기준은 차이가 난다. 예수님께서 이 차이를 강조하시는 것은 후대의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교회의 지도자인 사제는 주님께 받은 교회의 사명, 곧 세상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도구로 부름 받았음을 자각하고 주님께서 보여 주신 봉사의 삶을 자기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하느님과 진정으로 일치하고 있는 영혼은 자기 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성령의 충동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남에게 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제가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성무를 집전할 때 사제 자신에게 성화 은총이 증가되고, 내적인 변화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사제의 헌신적인 봉사가 사목적인 사랑에서 나올 때 그 행위 하나하나는 의심 없이 공로와 은총의 근거가 된다. 죄의 고백을 듣고 성사를 집전하며 교리를 가르치고 환자를 방문하며 장례식을 집전하고 본당이나 사회의 일반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 모두가 애덕의 행위이기에 이런 활동을 통하여 사제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흘러 넘칠 것이다. 사제의 모든 활동은 대사제이신 주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 특별히 성체성사 안에 숨어 계시는 주 예수님의 헌신적인 사랑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그분을 본받아 자신의 전생애를 하느님과 인류를 위해 몸바칠 각오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 주신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잘 돌보되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하며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 떼를 지배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 5,2-3). 이는 초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가 제시한 사제상이다. 그는 권위의 근거가 사랑과 봉사이지, 지배하고 억압하는 권력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제직이 섬기는 일이며 봉사직일 때만이 세상에 희망을 주게 된다. 사제직은 사제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와 소속 공동체와 형제들을 위한 것이다.

 

 

맺는 말

 

단편적이나마 이 글에서 사제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환경, 풍토, 시류, 문화, 정신 사조 등을 살펴보면서 사제의 본질적인 모습, 사명, 영성, 직무 등을 기술하였다. 1970년 한국 신자 수는 약 78만 7천 명, 사제 수는 883명(외국인 363명 포함)이었고, 1980년에는 신자 약 132만 명, 사제 1,248명(외국인 346명 포함)이었다. 2000년 말 교세 통계표는 사제 수 3,091명(외국인 200명 포함), 신자 수는 4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교회와 신자 수는 사제 수에 비례하여 성장하고 증가한다. 소수 자녀 시대, 남아 선호 사상 등을 우려하였지만 7개 대신학교에서 큰 변화 없이 사제들이 배출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한국 교회에 내려주신 큰 축복이며 은혜이다. 질적으로 우수한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사제들이 많이 탄생하도록 전교회적인 관심과 기도가 요청된다. 바로 사제들은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며 보루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사들을 집전하며, 육체적이고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따뜻이 돌보며, 신자들을 하늘처럼 받들고 섬기며,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나누고, 백성들을 위해 청춘과 생명, 일생을 봉헌하는 출중한 신앙심과 성덕을 갖춘 사제는 세상과 교회의 희망이자 피난처이며, 보석처럼 빛나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종말론적 증표요 표지이다.

 

[사목, 2002년 3월호, 이용훈(수원 가톨릭 대학교 총장, 신부, 윤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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