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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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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23 ㅣ No.924

[경향 돋보기 -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1837년 정월 어느 날. 중국의 변방 지역인 내몽고 마가자(馬架子) 교우촌 뒷산에 있는 한 무덤 앞에 무릎을 꿇은 세 명의 청소년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1836년 12월 3일에 서울을 출발한 조선 신학생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였다. 무덤의 주인공은 1년 3개월 전에 선종하신 초대 조선교구장 소 바르톨로메오(B. Bruguiere) 주교님.

 

그때 최양업 신학생의 생각은 온통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닮은 소 주교님의 삶과 신앙으로 가득했다. 조선의 양 떼들을 만나려고 쇠잔해진 몸을 이끌고 중국 대륙을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던 그분. 그 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없었고, 알려진 길도 하나 없었다. 가는 곳마다 고통과 고뇌의 강물이 넘실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당신 아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던 하느님뿐이었다.

 

최양업 신학생은 자신의 앞길에도 고통과 고뇌의 강물이 놓여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비에르 성인이나 소 주교님을 닮으려 하였다. 하느님께서 손길을 뻗어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 강물을 건너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숨은 그리스도인과 믿음 · 희망 · 사랑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

 

1821년 청양 땅의 다리골 새터(현 다락골)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난 뒤 부모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숨어 다니면서 성가정의 신앙을 먹고 자랐다. 다리골 새터에서 서울 낙동(현 회현동 일대)으로, 다시 강원도 김성으로, 그리고 부평 땅 접프리 교우촌으로 ….

 

그때는 모두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 희망 · 사랑이 있었고, 이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등불이 되었다.

 

최양업 신부에게도 아버지 하느님은 지극히 전능하신 창조주요, 지극히 자비롭고 선하시며 영원하신 주님으로, 모든 것의 희망이었다. 박해의 위험이 닥칠 때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그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곤 하였다. 하느님은 언제나 ‘위로요, 희망이요, 원의’였고, ‘모든 신앙인은 그분 안에서 살고 죽는’ 하느님 섭리의 지체였다. 그래서 하느님 분노의 그릇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아들’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부제 시절인 1847년 8월, 홍콩에서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으로 왔다가 고군산군도의 신치도(현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에서 좌초하여 다시 돌아가야만 했을 때도 최양업 신부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모든 것을 의지하였다. 1860년의 경신박해로 경상도 남동쪽 끝에 있던 죽림공소(현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의 간월산중)에 숨어 지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저희의 잘못과 죄과를 기억하지 마시고, 저희의 죄악대로 저희를 벌하지 마소서! 저희는 죄를 지었고 너무나 많은 불의를 행했습니다. 당신이 만일 저희의 불의를 헤아리신다면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저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옛 자비를 기억하시어, 저희와 모든 성인들의 기도를 어여삐 들어 허락하소서”(최양업 신부의 1860년 9월 3일자 서한).

 

최양업 신부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늑방 안에서 순명과 사랑과 일치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고귀한 피로 당신 백성을 속량하심으로써 그 백성을 당신의 유산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 그분을 닮으려 하였다.

 

 

공동 상속자를 지향하는 신심 함양

 

최양업 신부의 소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도 안에서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1846년 12월 22일자 서한)라고 기원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신앙 안에는 예수 성심과 성모 신심, 성인 ·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특별히 결합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 나무 조각[보목]을 스승 신부에게서 얻어 늘 지니고 다녔으며, 조선의 순교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사업을 완성하는 후배 전우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영광을 나누어 갖는 공동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 때문이었다.

 

1847년 초, 홍콩에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한 뒤,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마무리 기도를 바쳤다.

 

“순교자들의 왕이신 주님! 영원으로부터 감추어진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를 제 마음 안에 부어주시어, 저로 하여금 거룩한 십자가의 종들과 함께 당신의 거룩한 마음과  지극히 복되신 성모님의 사랑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통해, 현세에서는 전우가 되게 하시고 후세에서는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최양업 신부는 한결같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 · 순교자들에게’ 구원을 청하곤 하였다. 성모님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굳게 결합되어 있으며, 하느님과 성인 · 순교자들 사이의 중재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생 시절인 1843년 성모성심회에 가입한 이래 더욱 성모 신심을 함양하는 데 노력하였다.

 

조선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처음으로 묵주기도를 가르친 분이라면, 최양업 신부는 묵주기도를 널리 보급하고, 성모 신심을 장려한 으뜸 목자였다. 이를 위해 그는 스승 신부님에게 묵주를 만드는 도구를 청해 받았고, 솜씨 있는 신자들에게 묵주를 만들어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아울러 그 자신도 위험이 닥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모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성모님의 보호 아래 달려들었다.

 

최양업 신부는 ‘성인들의 열렬한 기도와 크나큰 희생과 힘들고 지루한 극기와 보속 행위’를 본받으려 했으며,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신심을 함양하도록 가르쳤다. 스승 신부님으로부터 얻은 성패나 상본을 신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도 성인 유해나 상본들을 지니고 다니면서 교우촌 순방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애달픈 조국애와 민초 사랑

 

최양업 신부는 신앙의 진리를 통해 조국과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마카오에서의 신학교 생활, 귀국로 탐색 과정, 만주 소팔가자(小八家子)와 상해에서의 마지막 수업 중에도 늘 조국애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는 1842년 7월 프랑스 함대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기 직전에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님에게 올린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저의 동포들이 마침내 시온성(예루살렘의 거룩한 신의 도시)으로 회귀하여 우리의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송할 날이 언제쯤 올 것인지?”(1842년 4월 26일자 서한)

 

최양업 신부에게는 조선 민족이 시온성을 찾아가는 이스라엘 민족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무리 안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양떼를 찾아 헤매는 목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귀국로를 탐색하는 데 청년기를 다 소비하였다. 1842년 이래 7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조선 입국로를 찾아 헤매면서 갖은 고난을 겪은 그였다. 그럼에도 기회가 올 때마다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의 문턱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을 때는 애달픔과 함께 조국의 구원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함께 느껴야만 했다.

 

최양업 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이 그리스도교 국가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원정의 목적이 무력 개교(開敎)나 조선 멸망에 있어서는 결코 안 되었다. 프랑스 함대의 임무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박해를 종식시킴으로써 조선을 복음화의 길로 이끄는 데 동참하는 것일 뿐이었다. 귀국한 뒤 스승 신부님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프랑스 정부에서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서한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은 것’을 항변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철저히 복음화를 바탕으로 한 구원사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신앙의 자유가 불평등한 신분구조, 양반 관리들의 착취, 당파로 얼룩져 있는 사회 구조를 쇄신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는 분명 종교보호 정책을 앞세우면서 프랑스 정부가 선교 지역에서 모종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던 선교사들의 생각과는 다른 점이었다.

 

귀국한 뒤에 최양업 신부가 가장 먼저 보고 느낀 것은 억압받는 일반 백성 곧 민초들의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의 복음화와 민초들을 위한 구원사상은 언제나 그 사목 지향 안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양반 계층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견해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양반들의 독선과 오만, 횡포와 부도덕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되고 있으며, 민초들이 겪는 비참한 생활의 원인이 된다고 믿었다. 폭정과 가렴주고, 탐관오리들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백성과 비참하게 지내는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도와줄 능력이 없는 자신의 초라함’에 한없이 가슴이 미어지곤 하였다. 영신의 구원에 굶주리는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줄 수 없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한탄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는 한 발짝이라도 더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였다. 한자를 모르는 신자들을 이해 한글을 교리 공부에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글 천주가사, 한글 기도서, 한글 교리서를 지어 널리 보급하였다. 그뿐 아니라 비위생적인 물을 먹고 고생하는 신자들을 위해 스승 신부님으로부터 정수 방법을 배워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땀의 증거자가 보여준 선교 영성

 

흔히 최양업 신부를 가리켜 ‘백색 순교자’ 또는 ‘땀의 증거자’라고 한다. 백색 순교자가 하느님 · 그리스도 · 성모 신심을 바탕으로 한 삶을 가리킨다면, 땀의 증거자는 그의 선교 열정을 의미한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했을 때 검게 탄 얼굴에 ‘흰 갓끈 자국이 남아있었다’는 전승 또한 땀과 발로 전국의 교우촌을 자신의 안마당처럼 순방하면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신자에게 성사를 주려고 노력한 선교 영성을 잘 설명해 준다. 그는 민초들을 구원하고자 전국을 누빈 위민(爲民) 사상가였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인 1849년 12월 말에 귀국해서 선종할 때까지 최양업 신부가 이동한 거리는 9만여 리나 된다. 마카오 유학길과 마닐라 피신길이 1만 5천 리요, 귀국로 탐색을 위한 125는 여정이 3만 리요, 귀국 후의 교우촌 순방 여정이 도합 4만 5천리였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작은 여정들을 더한다면 최양업 신부가 일생 동안 누벼야 했던 거리는 10만 리가 훌쩍 넘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양 무리에 들어오는’ 새 입교자들은 언제나 그의 희망이었다. 그는 선교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복음적 가난의 삶 안에서 순명과 겸손과 인내의 덕을 실천하였다. 그가 선교 활동 내내 궁극적으로 바라던 것은 신앙의 자유였다.

 

“이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틀림없이 기뻐 용약하면서 그리스도의 양 무리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싹 말라버린 저희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나기를 퍼부어 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목이 타고 있는 저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해주소서”(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신학생 시절에 결심했던 대로 최양업 신부는 자신이 모범으로 삼은 하비에르 성인이나 소 바르톨로메오 주교님의 선교 열정을 이어받아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과로 때문에 장티푸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하느님의 품에 안겼으니, 그와 절친했던 권 스타니슬라오(S. Feron) 신부는 그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토마스 신부님께서 쓰러지신 것은 다름 아닌 과로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지난해의 소요(곧 1860년의 경신박해)는 그분의 성사 집전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분은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으며, 밤에는 고백을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했습니다. 그분이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기지 못했다고 합니다”(페롱 신부의 1861년 7월 26일자 서한).

 

고통과 고뇌의 강물을 수없이 건너던 최양업 신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하느님이셨다. 1861년 6월 15일, 그의 나이 만 40세였다.

 

* 차기진 루카 -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전문위원.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차기진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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