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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8: 최인길 마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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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20 ㅣ No.976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8) 최인길 마티아(1765~1795년)

조선 땅에 첫 선교사제를 모시는 디딤돌로



- 역관 집안 출신 최인길이 중국말을 하는 시늉을 하며 주문모 신부를 대신해 포졸에게 잡혀가고 있다. 덕택에 주 신부는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독하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첫 세례자 이승훈(베드로)이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던 최인길(마티아, 1765~95). 포도청에 끌려간 그는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이렇게 답변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다.

굳건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그의 굳은 결심과 인내,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혹케 했다. 관장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사제 주문모(1752~1801)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고자 고문을 자행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최인길의 내면엔 천상의 기쁨이 번져 얼굴에까지 넘쳤다.

 

박해자들은 더 이상 최인길과 동료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들을 때려죽이기로 했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이었다. 최인길 등은 그날로 매를 맞아 숨을 거뒀다. 이들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그로부터 2년여 세월이 흘렀다.
 
1797년 8월. 당시 베이징교구장이던 알렉산델 드 구베아(1751~1808) 주교는 조선교회에서 보낸 밀사를 접견한다. 밀사가 들고 온 조선교회 소식은 그에게 큰 아픔과 충격을 안긴다. 다만 자신이 보낸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 그리고 최인길(마티아, 1765~95)과 그 동료들의 용감한 순교만이 위로를 준다.
 
그는 그해 8월 15일자로 쓰촨(四川)성에서 사목하던 디디에르 드 쌩 마르땡 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최인길이 보여준 용기와 활동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이 서한은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와 관련해 쓴 16통 서한 가운데 하나로, 지금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소장돼 있다.
 
최인길. 한양 역관 집안에서 중인으로 태어난 그는 1784년 조선교회가 형성되자마자 입교했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이냐시오)의 형이자 최창현(요한) 회장의 먼 친척이다.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친 사람은 이벽(요한 세례자)이다.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쉽게 접하고 받아들이는 역관 집안이었기에 그 또한 교리를 쉽게 받아들이고 열심을 보였다. 입교 초기부터 그는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섰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마리 니콜라스 안토니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통해 최인길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경위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 길로 이벽은 몇몇 친구 집을 찾아갔는데, 그들은 중인 계층이긴 했으나 학문으로나 품행으로나 모두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가 설교하자 많은 이가 그 자리에서 힘 있고 마음에 파고드는 이벽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 중에는 최창현과 최인길, 김종교(프란치스코) 등이 있었다. 그때부터 이벽은 사방에 복음을 전파해 상당한 성공을 거뒀으며, 자신의 사명에 충실해 휴식을 갖지도 않았다.…"

이렇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영세한 신자 수는 곧 1000명을 넘어섰으며, 1785년 봄에는 이벽이 명례방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비밀리에 종교 집회를 주도하던 중 발각돼 탄압을 받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탄압은 조선교회의 기를 꺾기는커녕 용기를 북돋웠다. 나아가 신앙을 심화시켰다. 동시에 '가성직제도'를 세워 모든 성사를 집전하도록 하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승훈을 비롯한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1786년 봄에 모임을 갖고 우선 고해성사를 집전하기로 했으며 그해 가을 모임에선 이승훈에게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승훈은 같은 권한을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홍낙민(루카),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등 10명에게 주고 그들을 신부로 임명해 함께 성사를 거행했다. 신자들은 열광적으로 성사를 받았지만, 물론 영세를 제외하면 모두 무효였다.

그럼에도 2년간 지속된 가성직제도는 신자들의 열성을 촉진시키고 신앙 전파에 새로운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1794년 12월 최인길 등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한 첫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조선교회 사상 첫 부활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는 장면이다. 이 재현 작품은 2001년 4월 신유박해 200주년을 기념해 절두산순교성지 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시회에 출품됐던 전통 인형 작가 임수현 제노베파씨의 작품이다.
 

그러던 중 유항검이 성사에 관한 교리서(아마도 「성교절요」인듯)를 숙독한 뒤 자신들의 성사 집전이 부당할 뿐 아니라 독성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베이징 선교사들에게 밀사를 보내 필요한 지시를 구하도록 요청했다.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사신의 일행으로 베이징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베이징 선교사들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 영입 운동이 전개되자 최인길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와중에 수난도 없지 않았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인길은 동생 최인철과 함께 체포됐다가 석방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곧 교회로 돌아온 최인길은 이전의 열심을 회복하고 다시 성직자 영입에 나섰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 북악산 아래 서울 계동에 집을 마련한 그는 선교사가 입국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선교사가 들어왔다. 1794년 12월 24일의 일이었다. 최인길은 윤유일, 지황(사바) 등과 함께 의주로 향했다. 그리고 밀사 지황이 중국 책문(봉황성 변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모셔왔다. 비밀리에 차가운 강바람을 안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 초 최인길 집에 들어섰다. 이날부터 그는 주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면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795년 4월 5일 예수부활대축일 미사는 전 조선교회 공동체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처음으로 선교사제를 영입해서 모든 교우들이 함께 봉헌한 첫 예수부활대축일 미사였기 때문이다.

감격스런 미사 봉헌도 잠시였다. 한 밀고자의 제보로 얼마 되지 않아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예비신자였던 한영익의 밀고로 주 신부 입국이 남인 영수 채제공에게 알려지고 곧 체포령이 내려진 것이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대처로 주 신부는 그의 집을 빠져나와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했지만 최인길은 피신하지 못했다. 아니, 주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자신은 신부로 위장하고 포졸을 기다렸다. 포졸들이 들어닥치자 중국말을 하며 속였지만 위장이 오래갈 리는 만무했다.
 
곧 최인길 신분이 드러났고 주 신부 입국 경위와 입국을 도운 밀사들 이름이 낱낱이 드러났다.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최인길과 윤유일, 지황 등은 혹독한 형벌을 받고나서 순교의 화관을 쓴다. 그의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가성직 제도는

초기 조선교회에 가성직 제도, 즉 가짜 성직 제도를 만들어 가짜 성사를 집전했다는 기록은 1874년에 간행된 달레 신부의 역사서에서 비로소 밝혀진다. 근거는 그러나 '그 시대의 기록'이라는 말밖에는 없었다. 국내 자료엔 '함부로 성사를 거행했다' 혹은 '동정을 지키지 못해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됐다'는 단편적 기록만 나와 있을 뿐이다.

그러던 중 1960년대에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서 성사 거행에 관한 이승훈과 유항검의 서한들이 발견됐다. 이 서한들에 따르면 달레 신부의 기록은 대체로 고증됐지만, 바로잡아야 할 대목도 없지 않았다. 즉 신부는 있었지만 주교는 두지 않았고, 신부단의 우두머리도 이승훈이었으며, 성사도 1787년이 아니라 1786년에 시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유항검에 의해 처음으로 성사의 유효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럼에도 이들 자료만으로는 가성직제도에 관한 전모가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또 달레 신부가 만들어낸 '가성직제도'라는 표현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초대 한국교회사연구소장을 지낸 고 최석우 신부는 생전에 "'가성직제도'란 용어가 과연 적절한 표현인가는 문제다"며 "그 이유는 달레의 주장대로 신부 외에 주교가 있었다면 모르되 주교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오늘에까지 그 표현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가는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이고, 동시대인도 '망행성사(妄行聖事)'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그 용어가 적절한지 의문이다"고 밝힌 바 있다.

[평화신문, 2011년 11월 20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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