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선교ㅣ복음화

코이노니아*디아코니아*마르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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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14 ㅣ No.16

교회에 내린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역시

"네 하느님을 공경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첫째의 것은

모든 우상을 파괴함과 동시에

현실의 모든 것에 초월적 의미를 부여해

현실이 하느님과 함께 하도록 하라는 것이고,

둘째의 것은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를 찾아가 항시 함께 하며

자신의 몸처럼 그의 아픔을 깊이 새겨 보듬어 주라는 것이다.

 

곧 교회의 목적은 그를 통해 모든 걸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교회는 봉사하고 복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그리고 가장 먼 곳으로부터 비롯되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코이노니아는 디아코니아와 마르티리아의 목적이 되니,

그 친교란 타향적(他向的)인

곧 가장 낮은 곳과 가장 먼 곳으로부터의 것이어야 한다.

친교란

하늘을 찌르는 바벨탑을 쌓아 올리듯

끼리끼리 똘똘 뭉쳐 즐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걸 연상하는 까닭에

대개 친교를 봉사와 증거의 목적으로 앞세우는데 꺼리나,

봉사란 이타적인 것이요,

증거 역시 우리의 것을 모르는 자들을 향해 이뤄지는 것이니,

결국 목적은 친교가 된다.

 

그런데 앞의

"네 하느님을 공경하라"에 비추어 볼 때

교회 자체가 그러한 바벨탑을 쌓거나

더 나아가 우상적 존재로 되어 있진 않는가.

겨자씨 속에 깃들인 큰 나무를 보지 못하고

오직 외형적인 것만으로

초월을 현란하게 표현하려고만 하고 있진 않는가.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하는 것일까.

거기에다 초월은

단순성 안에서만 그 빛을 참되게 발할 수 있다.

이렇게 초월의 내재성을 잊어버릴 때

종교의 모든 것은

그 근본 곧 본질적인 것을 잃고 만다.

 

또한 뒤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 비추어 볼 때

교회는 그들과 과연 함께 하고 있는가.

아니 도체 그들이 누구인지나 알고 있는가.

그분께선 복음선포를 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교회의 참된 모습이 그러해야 한다.

말씀의 선포와 동시에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교회의 역할이

"빛과 소금"으로 상징되는 것도 그러하다.

빛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니

말씀의 선포에 해당한다면,

소금은 관계 속에서만 제 맛을 나타내는 것이니

헌신적인 봉사를 말한다.

 

참으로 교회가 영적 실체를 그대로 현존시키려면,

조직의 경직성을 탈피해야 한다.

아니 교회만큼은

인간 외적인 요인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묶어 두는 경우에서

최대한 벗어나도록 힘써야 한다.

우선 그리스도 정신 자체가

모든 걸 떠나 인간 그 자신을 만나는 것이 아닌가.

교황이 걸인과 하나로 참된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적 만남을 이룰 수 있으려면,

조직은 가장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작은 교회는 절실히 요구된다.

또한 10여명 단위의 자율적인 신앙모임이

우리 10억 그리스도교회의 참된 활성인이 되어야 한다.

레지오는 어느 정도 그러하나

좀 더 자생적이고 자율적일 필요가 있다.

결국 교회의 물량주의는 결국

물질로서 영적(靈的)인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따라서 그렇지 않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가난해져야 한다.

도그마에로부터의 탈피,

교회건물의 소형화 내지 간소화,

가난한 이 위주의 선교활동,

조직의 단순화와 교리나 예절의 근본화 등등의

구체적 실천이 시급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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