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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복자 124위 열전50: 최해성, 최 비르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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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28 ㅣ No.1437

[복자 124위 열전] (50) 최해성 · 최 비르지타


기해박해에 체포된 조카와 고모, 고문과 회유 유혹 이기고 순교



한국 천주교회 신앙의 뿌리를 찾다 보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집안이 있다. 경주최씨 최양업(토마스) 신부 일가다. 최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복녀, 최 신부와 동생들로 이어지는 신앙의 맥으로, 최 신부의 둘째 동생 최의정(야고보)과 넷째 동생 최우정(바실리오)은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에 뿌리를 내렸다. 이 중 최우정의 아들 최상종(빈첸시오)은 1888년 강원도 첫 성당인 풍수원성당을 세웠고, 50년간 사도회장을 맡아 공동체를 일궜다. 그 일가 중 최경환 성인과 7촌 사이로, 성인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최해성(요한, 1811∼1839) 복자는 1839년 9월 6일 원주 강원감영 인근 원주천변 형장에서 순교함으로써 원주 교회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됐다. 최해성 복자의 고모 최 비르지타(1783∼1839) 또한 같은 해 12월 8일 강원감영 옥에서 목이 졸려 순교함으로써 집안에 뿌리내린 신앙의 아름다운 증거가 됐다.

복자 최해성 요한


‘양박’이라고도 불린 최해성은 충청도 홍주현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일대) 출신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조부가 다락골에 유배되면서 온 가족이 조부를 따라 살게 됐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 성장한 그는 온순하고도 정직한 성품을 보였으며, 훗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원주 서지(현 강원 원주시 부론면 서지길 일대)로 이주해 작은 교우촌을 이뤘다.

당시 그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 뛰어난 열성을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데 전심했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잊지 않았고, “천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이야기하면서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선교사들이 서지 교우촌에 와서 성사를 베풀 때면 그는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충만했다. 이같은 덕행 덕에 교우촌 회장에 임명된 그는 견진성사까지 받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회장 직분을 성실히 수행해 나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그는 교회 서적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체포돼 무려 21차례에 이르는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다리뼈 두 대가 부러져 두세 치 되는 뼛조각이 두 개나 땅에 떨어지고 몸에 더는 몽둥이를 댈 곳이 없을’(다블뤼 주교,「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만큼 고통을 받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에 올라가시는 모습을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 살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하느님 사랑에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뻐 뛰었다. 그해 7월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님을 배신할 수 없다”고 말했고, 두 달 뒤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복녀 최 비르지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해 남편 유씨와 함께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최 비르지타 복자는 남편이 황사영(알렉시오)을 숨겨줬다는 혐의로 체포돼 유배를 가게 되자 남편 따라 유배지로 갔다. 그러나 남편이 임종하자 그는 오빠(최해성의 부친)가 살던 서지 교우촌으로 와서 정착했다. 그가 체포된 것은 1839년 9월의 일로, 원주 감옥에 갇힌 조카 최해성을 보러 간 게 빌미가 됐다.

원주 영장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하느님을 배반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그를 감옥에 가둬 두고 굶어 죽게 내버려뒀지만, 4개월이나 버티자 다시 명령을 내려 교살시켰다. 목에 차고 있던 칼을 조여 죽이는 방법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도대체 이들 두 복자가 만난 하느님은 어떤 분이었기에 계속되는 관헌들의 배교 유혹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신의 나약함을 억누르고 충만한 기쁨 속에서 용기 있게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오롯이 일심으로 구세주의 수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구세주의 사랑을 순교로 되갚은 두 복자의 기쁨에 찬 신앙은 부족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신앙에 새로운 싹을 틔우는 힘이 있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1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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