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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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을 따라 이해하는 해외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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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06 ㅣ No.429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을 따라 이해하는 해외선교


구세주의 사명이요, 교회의 사명인 선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공의회와 함께하신 성령을 통해 제시했다. 공의회 교부들은 선교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에게 보편교회의 선교사명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 주었다. 따라서 1965년 12월 7일에 공포된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인 ‘만민에게’(Ad Gentes)를 이해하는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따라 수원교구가 보편교회와 일치하며 실행하고 있는 해외선교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풍요롭게 비춰줄 것이다.

 

 

하느님의 한 백성

 

만민에게 파견되어 ‘구원의 보편 성사’(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의 눈에 보이는 징표)가 되도록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교회는, 창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노력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세워졌기에, 세상 어디서나 하느님의 말씀과 나라가 선포되고 건설되는 일은 그 후계자들의 영원한 직무다. 세상의 소금이며 빛인 교회는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도록 더욱 다급하게 부름 받고 있다.

 

이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고 또 그분 안에서 사람들이 한 가족을 이루며 하느님의 한 백성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이다(「선교 교령」, 1항 참조). 선교사에게 선교지의 민족은 하느님의 한 백성이요 한 가족이며 새로운 가족이기에 선교지의 아픔과 가난, 슬픔과 고통에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신앙의 보편성 안에서

 

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이고, 교회의 선교는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심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성부의 계획으로 흩어진 당신 자녀들이 한 백성이 되어 당신과 더불어 평화와 친교를 나누는 형제적 사회를 이룩하게 하시려고, 성자를 파견하시는 새롭고 결정적인 방법으로 인간 역사에 개입하셨다. 이러한 계획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아들’로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셨다.

 

구세주이신 주님께서 선포하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하신 일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선포되고 전파되어야 했다. 교회는 많은 사람 앞에 공공연히 나타나 설교를 통하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신앙의 보편성 안에서 모든 언어로 말하고, 사랑으로 모든 언어를 알아듣고 받아들임으로써, 바벨의 분열을 이겨낸다.

 

성령께서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온 교회가 친교와 봉사 안에서 일치하게 하시어 그리스도를 재촉하신 선교정신을 부어주신다. 성령께서는 사도들의 활동에 뚜렷이 앞서시며 여러 가지 모양으로 끊임없이 그 활동을 함께 하시고 지도하신다(「선교 교령」, 2-4항 참조). 따라서 현대의 선교사들 또한 성부의 계획을 따른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받아 세상 끝까지 나아가 만나는 선교지 민족들에게 ‘파견된 사도’로서 평화와 친교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새로운 언어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성령께서 지도하시고 재촉하시는 구원의 참된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삶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신앙과 구원을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는 생활의 모범, 설교, 성사와 또 은총의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앙과 자유와 평화로 모든 사람을 이끌어 그리스도의 신비에 온전히 참여하게 한다. 이러한 사명의 수행은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며 걸어가신 가난과 순명과 봉사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로 죽음의 승리자가 되셨기에 모든 사도는 절망이 아닌 희망 속에서 거닐며,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 결국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복음의 씨앗이 되었다(「선교 교령」, 5항 참조).

 

우리는 교회의 선교사명이 과거가 아닌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구세주의 사명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삶이란 그리스도의 가난과 봉사, 죽음에 이르는 자기희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임을 알고 있다. 선교사들은 오직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희망으로 그리스도께서 남겨주신 고난을 채움으로써 지금 볼 수 없는 열매를 위한 씨앗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외침, 2018년 1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한만삼 신부(광교1동본당 주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을 따라 이해하는 해외선교


교회의 ‘해외선교 활동’이라는 임무

 

 

보편교회가 말하는 ‘선교’라는 단어를 우리 입장에서는 ‘해외선교’라는 의미로 헤아려 볼 때 문헌을 더욱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보편교회의 선교는 개별 지역교회를 향해 열려 있기 때문에 개별교회의 입장에서는 해외선교로 이해해야 문헌에서 말하는 선교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활동을 ‘해외선교 활동’으로 바꾸어 읽어보자. 

 

교회의 ‘해외선교 활동’이라는 임무(Mission)는 온 교회의 기도와 협력으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주교단이 앞장서 수행하는 것이며, 오직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의 집단인 민족들을 단계적으로 만나고 스며들어 그들을 가톨릭 교회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에서 파견된 복음 선포자들이 온 세상에 가서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과 집단에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 자체를 심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활동을 일반적으로 ‘해외선교’라고 한다. 이 활동의 고유한 목적은 아직 교회가 뿌리 내리지 못한 민족과 집단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를 심는 일이다.

 

 

해외선교는 이어져야

 

복음 선포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로 난 사람들이 세례로 교회와 결합하게 하셨다. 강생하신 말씀의 몸인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찬의 빵에서 영양을 얻고 살아가기에 교회를 심는 초기 신생교회나 젊은 교회의 상황이 지났다고 해서 교회의 해외선교 활동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설립된 개별 교회들은 아직도 교회 밖에 있는 모든 민족과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해외선교를 계속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어떤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 복음 선포의 가능성이 없어질 지라도 선교사들은 인내와 지혜, 그리고 커다란 신뢰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증언함으로써 주님께 이르는 길을 닦아야 한다. 해외선교 활동의 이유는 하느님의 뜻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신앙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 해외선교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자기 발전을 위한 힘을 끊임없이 모으고 조직하여 나아간다. 이러한 해외선교 활동을 수행하도록 교회의 지체들은 사랑으로 재촉받는다. 결국 교회의 해외선교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충만한 찬양을 받으시며, 하느님의 계획이 완성된다. 창조주로부터 인간성을 나누어 받은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새로 태어나 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다

 

해외선교 활동은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인간의 조건과 온전한 소명에 대한 참 진리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애와 진실과 평화의 정신으로 차 있는 이 새로운 인간의 기원이시고 그 전형이시며 또 모든 사람이 이 새로운 인간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인종과 민족의 온갖 특이성을 초월하며,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이방인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진리이시며 길이시다. 모든 사람의 귀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주는 복음의 선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진리와 길을 열어 준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은 심판과 은총의 말씀인 동시에 죽음과 생명의 말씀이다. 참으로 복음은 인간 역사 안에서 현세적으로도 자유와 진보의 누룩이 되었으며 또 언제나 형제애와 일치와 평화의 누룩으로서 드러난다.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 되어야 한다. 해외선교 활동은 세상과 그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해외선교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명백히 완성하신다. 해외선교 활동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를 그 중심과 정점으로 하는 성사들의 거행을 통하여 구원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를 현존하시게 한다. 이렇게 하여 해외선교 활동은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한다. 해외선교 활동을 통하여 성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신 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백성은 확장된다. 이 영적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요긴한 모퉁이 돌로 하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삼아 건축되고 증축된다(「선교 교령」, 6-9항 참조). 따라서 수원교구의 해외선교 활동은 그리스도의 명령인 사도들의 임무를 수행하는 하느님의 뜻이며 구원을 위한 교회의 종말론적 신앙고백이다. [외침, 2018년 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한만삼 신부(광교1동본당 주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을 따라 이해하는 해외선교


세상 속에 사는 사랑의 현존’인 선교사

 

 

작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내 친구 정일우’에서 70년대 청계천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시며 복음자리 공동체를 설립하신 예수회 선교사 故 정일우 신부는 생전에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라고 늘 말했다. 한국사회가 차별과 폭력으로 내몰 뿐 사랑으로 돌보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을 가족처럼 여기시며 세상 속에 함께 사신 정 신부의 삶은 복음화의 새로운 가르침이다. 마찬가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은 교회가 세상 속에 살며 복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를 이루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에서나 삶의 모범과 말로써 세례 통하여 변모된 새 사람이며 견진을 통하여 굳세어진 사람임을 드러냄으로써 인간 사회 안에 현존해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며 인간 생활의 진정한 의미와 인간 공동체의 보편적 연대를 더욱 온전히 깨닫게 해야 한다. (중략)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나누어 주신 보화들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고 해방시켜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통치 아래로 돌려 드리도록 힘써야 한다”(11항 참조).

 

또한 선교사의 삶은 ‘사랑의 현존’으로 세상 속에 사는 사랑의 증인이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인간 사회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당신과 같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미쳐야 하며, 인종 차별도 사회적 종교적 신분의 차별도 없으며 어떠한 이득이나 감사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표징으로 어떠한 처지에 있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과 결합되어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 더 나아가 기아와 무지와 질병을 극복하여 더 나은 생활 조건을 만들고 세계 평화를 다지려고 노력하는 민족들의 노력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선교사들은 자신의 활동과 생활에서 사람들과 밀접히 결합됨으로써, 그리스도를 온전히 선포할 수 없는 곳에서도 그리스도에 관한 진정한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순전히 인간의 물질적인 진보와 번영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존엄과 형제적 일치를 증진하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빛으로 밝혀 주신 종교적 도덕적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이웃들에게 하느님께 이르는 더욱 완전한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도움을 받으면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가 환하게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새 인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가 나타나고, 하느님의 사랑이 계시된다”(12항 참조).

 

따라서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파하도록 하느님께서 말씀의 문을 열어주시는 곳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에게 담대하고 끊임없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선포하고, 또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파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비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그 마음이 열려 주님을 믿고 주님께 자유로이 돌아서며 주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므로 그들의 영적인 기대를 모두 채워주시고 또 그 기대를 끊임없이 넘어서신다. 개종은 입교로 이어져 스스로 죄를 끊어버리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 자신과 인격적인 교류를 갖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작용으로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새 인간으로 건너간다. 이 건너감은 사고와 생활의 방식의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와 하느님 백성의 신앙과 전례와 사랑의 생활로 들어서게 된다(13-14항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사제든 평신도이든 세상 어디에서나 그 사회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랑의 빛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비추어 사람들이 새로운 인간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변화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가 찾는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보다 더 거칠고 험난하며 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복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해외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자. [외침, 2018년 3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한만삼 신부(광교1동본당 주임)]

 

 

[해외선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을 따라 이해하는 해외선교


하느님의 협력자인 선교사

 

 

해외 선교사의 파견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파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열어주시는 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것은 숨 막힘을 참으며 폭포를 거슬러 오르고 가시덩굴로 가득찬 정글을 헤쳐 나아가며 불타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인내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뿌릴 씨를 들고 밭으로 나아갈 때 기뻐하듯, 씨 뿌리는 사람은 수확하는 기쁨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희망의 행위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선교사들은 온갖 형태의 시련을 겪지만, 그 시련이 품고 있는 미래의 기쁨이 현재의 행복임을 믿는 가난함이 선교사들의 진정한 행복이 된다. 선교사들의 기도와 열정을 체험한 비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그 마음이 열리고 믿음으로 주님께 자유로이 돌아서서 주님을 충실히 따르게 된다면, 스스로 죄를 끊어버림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격적인 교류를 갖도록 부르시는 사랑을 체험하고 깨닫게 된다. “실제로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으로 새 개종자는 영적인 여정에 들어서, 신앙으로 이미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새 인간으로 건너간다”(「선교 교령」, 13항). 이 건너감을 통해 인간은 사고와 생활방식의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그 변화의 사회적 귀결로 죄와의 단절과 격리를 체험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해 신앙을 갖도록 강요하거나 부당한 술수로 유인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며,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신앙에서 멀어지도록 불의한 박해를 받지 않을 권리를 강력히 주장한다. 그것이 교회가 주장하는 종교와 양심의 자유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협력자인 선교사들을 통해 부르심에 응답한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된 민족이요,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로서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상에 살아있는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 되어 성찬의 희생제사로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께로 건너가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 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써 마침내 사랑을 위해 파견되는 사도가 된다. 이 모든 일을 성취하는 데에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다. 평신도의 고유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충만히 받아 마치 누룩처럼 세상을 내면에서부터 변화시키고 질서를 바로잡아 현세의 질서가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창립과 현존의 목적은 비그리스도인 동포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또 그들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협력자인 선교사들은 세상 어디에서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부르고,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은 살아계신 하느님 현존의 표징인 교회가 된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은 아직도 마음이 어려서 세상 속에 잠겨 살아가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기에 선행에서 멀어지고 끊임없이 악으로 기울어진다. 개발된 국가들이든 저개발 국가들이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인간이 살아가는 경제, 정치, 사회 구조와 질서에는 인간의 오만과 이기주의에서 생겨난 혼란으로 끊임없이 사회질서가 부패되고 어지럽혀 진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악에 기울어져 있고 자라면서 죄에 대한 새로운 충동에 사로잡히기에 줄기찬 노력과 은총의 도움 없이는 이를 이겨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을 자기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당연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마저도 깨버렸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남수단이든 아시아의 한국이든 인간의 무지인 오만과 탐욕인 이기주의에 뿌리를 둔 죄의 보편성은 늘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는 모든 인류를 향한 구원에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외침, 2018년 4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복음화국 해외선교부]

 

 

[해외선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을 따라 이해하는 해외선교


본토인 성직자 육성

 

 

한 교구가 다른 교구에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사제의 파견을 청하였다거나, 선교회 혹은 선교 수도회 등의 진출을 요청했다면 이는 대체로 그 교구 내에 본당 사목을 맡을 사제의 수가 부족하거나, 어떤 사도직 활동이 중대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사제나 수도자들의 수가 충분치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상황이 보다 나은 교구에서 그보다 조금 더 어려운 교구로 사제를 파견하는 것은 우리 교회가 진정 형제적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선교 사제들을 파견하는 것과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교는 그들의 역할 자체를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는 사목자의 부족으로 홀로 자립할 수 없는 어려운 여건의 교구에 씨앗과 같은 보탬이 되어 언젠가는 그 교구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렇기에 본토인(방인) 성직자 육성은 파견된 선교사들이 추구해야 할 제1의 목표이기도 하다. “신생 교회들은 자기 성직자들을 갖는 교구 구조를 차츰 갖추어 가는 것이다”(16항). 더 나아가서 「선교 교령」은 현실적인 문제 또한 짚어주고 있다. 교회의 재정에 대한 교육(훗날 이루어질 재정적 자립을 위해), 학업 능력이 훌륭한 사제들의 로마나 해외 유학(그 지역의 신학적 발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보편 교회와의 지속적이고 건강한 형제적 관계 형성), 그리고 민족적 정서와 그곳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보다 넓은 지역에서 본당 사목구 주임을 도울 수 있고 사회사업과 자선활동과 같은 봉사직무를 수행할 종신부제직 제도의 도입까지 고려될 수 있다고 열어놓고 있다(지역 상황에 맞는 교회 제도의 토착화).

 

아직 걸음마 단계의 교구에서 사제 성소를 키우고 양성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좋은 본보기가 되어줄 선배 사제의 부재뿐만 아니라, 가톨릭 성직자의 존재가 그들 역사와 문화 안에 자리 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제 생활이 그들 민족의 고유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신학생들은 교회의 선교 활동의 역사와 목적과 방법을 배우고 자기 민족의 특유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16항).

 

현재(2017년 기준) 남수단 룸벡교구에서는 스무 명이 넘는 사제(교구 및 선교수도회 사제 포함)들 중 4명의 본토인 사제만 있으며, 여러 명의 신학생들이 있으나 신학교 공부를 마친 뒤 서품을 받기 전 성소의 길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교육의 기회가 부족한 이들이 교회 내 기관을 통해 고등 교육을 받고자 했던 원의 때문이기도 하고, 성소를 품고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막상 성직자가 되기에 그들 고유문화와 교회의 제도 사이의 갈등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 우리나라도 초기 교회시절 외국 선교사 신부님들이 한국인 사제를 육성하기 위해 들였을 노력이 어떠했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남수단 룸벡교구를 빗대어 살펴보건대, 본토인 사제 양성은 단지 성사를 집전할 사제 양성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훨씬 뛰어넘는다. 사제성소를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모범이 되어줄 선교사제들의 성덕을, 사제성소의 씨앗을 심어줄 수 있는 건강한 평신도 가정 공동체 형성을 위한 독려를, 또 본토인 성직자 배출을 간절히 원하는 지역 공동체의 노력 등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지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본토인 성직자 육성은 그 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제1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가 자립을 위해 스스로 품어야 할 핵심 목표이지 않을까 싶다. 이 둘은 함께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훗날, 「선교 교령」이 고백하듯 남수단 룸벡교구와 이와 상황이 비슷한 모든 곳에서 이런 감사의 고백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래에 그리스도께 개종한 민족들 가운데에서 그토록 많은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사제 성소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대하여 교회는 크게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16항).

 

* FIDEI DONUM : ‘신앙의 선물’이란 뜻의 라틴어로 1957년 4월 21일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신앙의 선물」에서 유래되어 사제의 수가 부족한 교구에 - 특별히 아프리카 교회 - 다른 지역의 교구가 교구 사제를 선교사로 파견하는 양식. [외침, 2018년 5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복음화국 해외선교부]

 

 

[해외선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을 따라 이해하는 해외선교


교리교사 양성

 

 

전 세계의 많은 지역교회들이 사제 수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특히 아프리카 교회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는 것은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신앙의 선물」(Fidei Donum)을 통해서 이미 지적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신속히 더 많은 본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교회가 정한 양성 기준을 바꾸거나 낮출 수는 없는 것이 교회의 정신이기도 하다(“비록 사제가 부족하여 안타깝다 하더라도 [중략] 언제나 확고한 기준을 적용하여야 한다”, 「사제양성교령」, 6항). 그렇기에 더더욱 성직자의 역할을 도울 수 있는 봉사자의 양성은 필수적이고 시급하다. 이에 대해 「선교 교령」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현대에는 이토록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사목 계획을 수행할 성직자들이 부족하므로 교리교사들의 직무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리교사의 양성은 문화 발전에 부응하여 교리교사들이 사제 품계의 유능한 협력자로서 새롭고 더 광범위한 중책을 맡은 그들의 임무를 제대로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한다.”(「선교 교령」, 17항)

 

수원교구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사제들이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남수단 룸벡교구는 이러한 교령의 가르침에 따라 교리교사 양성에 큰 힘을 쏟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교리교사는 본당사목구에 소속된 각 마을 공소에서 공소회장으로서 활동하며 공소예절을 주관하고 교리교육을 하는 이들을 뜻한다. 본당사목구가 보통 반경 40~50킬로미터가 넘는 곳이 대부분이고, 그에 속한 공소의 수가 30~40개는 족히 넘기 때문에 교리교사의 존재와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선교사제는 교리교사들을 정기적으로 본당으로 소집하여, 지난 활동과 공소 상황 등에 대한 보고를 듣는다. 또한 이를 통해 선교사제는 교리교사들의 공소예절 진행을 위한 전례지식과 교리교육을 위한 교리지식 등을 다시금 점검하고 필요시 재교육을 하며, 교리교사에 대한 지원과 마을 공소 공동체의 건의 및 요청 등을 들어준다(한편, 마을 주민들의 문맹률이 매우 높은 곳에서의 교리교육은 교회의 공식적인 교재나 인쇄물을 통해서가 아닌, 이를 이해한 교리교사의 지도와 수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리교사들의 소양과 자질에 대한 선교사제의 검증은 매우 중요하다).

 

본당과 공소 간의 거리가 먼 곳이 많고, 대부분의 공소는 차량이 아닌 오토바이, 자전거 혹은 도보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숲속 공소들이기 때문에, 선교사제의 방문은 그 회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선교사제와 교리교사들은 논의를 통해 공소방문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며, 공소방문 시 선교사제는 준비된 예비신자들의 찰고와 세례성사, 첫 영성체, 고해성사 등을 집전하며 마을 공동체와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교령은 선교지역의 교리교사들을 위한 교육기관과 교리교사 기구의 설립을 제시하며, 교리교육 활동에만 ‘온전히 헌신하는’ 전임 교리교사들에 대해 정당한 보수를 통해 생활을 보장해 줄 것을 제안하고 있지만(「선교 교령」, 17항), 아프리카의 가난한 교구의 재정적 상황으로 이루어지기엔 아직 갈 길이 먼 현실이다. 그러나 이미 반세기전 반포된 교령이 교리교사라는 역할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 넓은 선교지역을 갖고 있는 교회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현실적인 방법을 재성찰 하게끔 이끌어준다. 더불어 선교지 현장에서 의외로 적지 않은 수의 현지 그리스도인들이 존경받는 교리교사가 되고자 자원한다는 점에서 교회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교리교사는 선교사제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협력자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본토인 성직자 육성에 힘을 쓰면서도 동시에 비교적 단기간에 교회에서 요구하는 일정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교리교사 양성에 조금 더 노력한다면 선교지역 현지인들의 선교 참여와 평신도로서 현지인들의 역할 증대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는 합당하게 양성된 교리교사들에게 공적으로 거행되는 전례 예식 안에서 교회법적 사명을 부여하여 백성들 가운데에서 더욱 큰 권위로 신앙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선교 교령」, 17항) [외침, 2018년 6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복음화국 해외선교부]

 

 

[해외선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을 따라 이해하는 해외선교


수도 생활의 증진

 

 

우리나라 또한 요즘은 성소자가 감소추세라고는 하지만, 다른 지역 교회들과는 달리 사제 수의 증가와 수도자 수 증가에 있어서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순교의 씨앗에서 자란 교회이기에 더 크신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특별히 수도 생활의 증진에 관해 「선교 교령」이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수도 성소와 선교가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교회가 심어질 때부터 수도 생활을 힘껏 증진하여야 한다. 수도 생활을 선교 활동에 귀중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 바쳐지는 더욱 내밀한 봉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소명의 깊은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가리켜 준다.”(「선교 교령」, 18항)

 

우리나라 교회가 박해시대를 이겨내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 더 많은 수도회들과 선교회들이 해외로부터 진출하였고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더불어 한국 안에서 방인 수도회들과 선교회 설립 등도 이루어졌다. 여전히 선교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는 교회이면서도 이미 많은 수의 선교사들과 수도자들을 해외 선교사로 파견하고 있는 특별한 상황이기도 하다. 특별히 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에 많은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있는데, 수원교구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사제들이 활동 중인 아프리카 대륙에만 해도 100여명이 넘는 한국 선교사들이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수도자들이다. 다시 말해, 수도 생활의 증진은 새로이 시작하는 신생 교회의 핵심 동력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성장을 의미하는 ‘다른 교회로의 선교사 파견’이라는 열매까지 맺게 하는 매우 중요한 사명이다.

 

남수단 룸벡교구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은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사제들이 아니라 선교 수도회의 수도 사제들과 여성 수도자들이다. 특히 유럽과 중남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성소를 키우고 있는 콤보니(COMBONI)수녀회 수녀님들이 많은 역할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데, 선교 사제들이나 남자 수도자들의 역할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여성 교육과 여성인권 신장을 위한 활동에 많은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룸벡교구 안에서 선교 사제들과 남자 수도자들 그리고 여자 수도자들 각각의 역할로 이루어지는 조화는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현지에서 여자 수도회의 성소자 발굴은 무척이나 어려운 현실이다. 남수단 딩카 문화 안에서 여자들이 혼인을 할 때 신부 측 가족은 신랑 측 가족으로부터 많은 소를 지참금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가족 공동체에서 여자 아이들을 수도자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마도 세대가 여러 번 바뀌고 혼인 지참금 문화가 사라지고, 일부다처제의 문화가 사라져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나먼 일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는 단순히 수도 성소에 대한 아쉬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수도 성소의 증진은 「선교 교령」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신생 교회가 더욱 튼튼하고 단단한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위해, 교육과 여성 인권 개선을 위해서 지금도 선교사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믿음만큼은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더 나아가 「선교 교령」은 활동 수도 생활뿐만 아니라 관상 수도생활에 대한 지적도 잊지 않고 있다. 수도 생활 자체가 봉헌 생활이며, 우리의 봉헌이 곧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축성을 의미하기에(Vita Consecrata), 활동을 위한 수도 생활뿐만 아니라 관상을 위한 수도 생활도 신생 교회에게 무척 필요한 일이다. 이 관상 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이 더더욱 잘 드러날 수 있고, 또 새로 시작하는 교회가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고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언젠가 분명 아프리카의 이 오지 교회가 충만한 활동 수도생활과 관상 수도생활을 이루고 이를 통해 더 튼튼한 교회가 되어 이웃 교회에 보탬이 될 날이 오기를 꿈꾸어본다.

 

“관상 생활은 교회의 충만한 현존과 관련되므로 신생 교회들에서는 어디서든지 관상 생활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선교 교령」, 18항) [외침, 2018년 7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복음화국 해외선교부]

 

 

[해외선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을 따라 이해하는 해외선교


제3장 개별 교회 (상)

 

 

지금까지 「선교 교령」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리원칙과 선교활동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원론적인 부분을 함께 살펴보았다면, 이번 호와 다음 호를 통해 「선교 교령」에서 다루고 있는 제3장 ‘개별 교회’ 부분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가 종종 접하는 개별 교회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자. 개별 교회는 쉽게 말해 우리가 속해있는 지역 교회 즉 교구를 의미한다. 교구는 교구장 주교를 중심으로 통치된다. 반면 보편 교회라고 함은 전 세계 교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지역 교회 교구장 주교가 사도들의 후계자인 것과 상응하는 개념으로 전 세계 교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교황을 우리는 사도들 중 으뜸 사도인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부른다. 물론 세상의 조직체를 구성하는 상하관계의 속성과는 달리, 우리 교회는 개별 교회(지역 교회)를 보편 교회의 하급 조직체로 보지는 않는다. 즉 우리는 모두 각자 지역의 개별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보편 교회에 속해있다. 여기서 ‘보편되다’라는 뜻의 ‘가톨릭’(catholic)이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선교 교령」 3장에서는 이제 막 개별 교회로서 시작된 신생 교회의 발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신자들의 모임이 사회 생활에 이미 뿌리를 박고 또 그 지역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하여 일단 안정성과 견고성을 누리게 될 때에, 이를테면 불충분하더라도, 그 지역의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의 고유 인력을 지니고, 자기 주교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 백성의 생활을 영위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필요한 교역과 제도를 갖추게 될 때에, 교회를 심는 일은 바로 그 인간 사회에서 어떤 목표에 이르는 것이다.”(「선교교령」, 19항)

 

어느 정도 교회의 틀을 갖추게 된다하면 신생교회로서 발전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교령은 이 신생교회 구성원들의 역할을 단지 교회 자체의 성장에 그 의미를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에서 그 역할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러한 개별 교회는 ‘신앙과 전례와 사랑의 살아있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국민 생활과 사도직 활동을 통하여 국가 안에서 사랑과 정의의 질서를 확립하도록 노력’하는 데까지 그 소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신생 교회 평신도들의 가정들은 현지의 사제 수도 성소의 못자리가 되어야하고, 이들의 신앙은 자신들의 민족적 품성에 어울리는 전례 거행을 이끌고, 교회법 규정을 통하여 그 지역의 건실한 제도와 풍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소위 ‘토착화’ 요소 또한 교령은 언급하고 있다.

 

앞서 간단히 다룬, 보편 교회와 개별 교회의 관계 또한 교령은 다루고 있다. “주교들은 각기 자기 사제단과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정신으로 더욱더 젖어들어 보편 교회와 함께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신생 교회들은 온 교회와 긴밀한 친교를 유지하여야 하고, 교회 전통의 요소들을 고유 문화와 결합시켜 서로 힘을 주고받아 신비체의 생명을 증대시켜야 한다.”(「선교교령」, 19항)

 

즉, 이러한 발전 과정을 겪고 있는 교회는 여전히 가난한 지역들이며 사제의 부족과 물질적 지원 결핍으로 고통 받는 곳이 대부분이기에, 온 교회(보편 교회)의 차원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며, 이러한 도움을 받게 되는 개별 교회들은 교구 성직자 성소와 수도회 성소의 증진 및 여러가지 효과적인 노력과 활동을 통하여 차츰 자립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자립’이라는 의미는 또 다른 이들에게(다른 지역교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교회로 성장해나가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선교교령」, 19항).

 

개별 교회와 보편 교회의 관계성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하나의 개별 교회의 탄생과 성장은 결코 개별 교회 혼자만의 몫일 수 없다. 개별 교회 안에서도 가톨릭교회 보편성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 안에서 보편 교회는 그 탄생과 성장에 함께 하며, 세상을 향한 보편 교회의 사명이 신생 개별 교회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외침, 2018년 8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사무처 해외선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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