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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유럽 성지순례: 아이히슈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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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82

[유럽 성지순례] 아이히슈테트


1260년 교회 전통,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1. 아이히슈테트 주교좌 대성당에 있는 예수성심상. 부활한 예수가 자기 성심을 꺼내 들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2. 아이히슈테트 주교좌 대성당 중앙 제단에 설치돼 있는 날개 제대. 14세기 나무로 만든 이 제대는 여닫이가 가능한 날개 양편에 부조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해 놓았다.


3. 중세풍 분위기가 물씬 나고 있는 아이히슈테트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순례단.


4. 아이히슈테트 주교좌 대성당 전경. 14세기에 신축된 이 성당은 고딕·바로크·로코코 양식이 혼합돼 있다.

 

 

뮌헨을 중심으로 바이에른주 남쪽 알퇴팅 성모성지, 동쪽 오틸리엔대수도원, 서쪽 알프스 산록 에탈수도원과 피눈물을 흘리신 예수상이 있는 비스성지를 순례한 순례단은 마지막 순례지로 뮌헨에서 북쪽으로 약 100여km 떨어진 국립공원 알트밀 계곡에 위치한 '아이히슈테트'교구(교구장 발트 믹사 주교)를 찾았다.

 

아이히슈테트는 1억5000만년전 쥐라기시대 때 살던 '시조새'의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현재 독일 · 오스트리아 · 스위스 등 독일어권에서 유일하게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종합대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종합대학교로는 유일한 사립학교인 아이히슈테트대학교는 트리엔트공의회 직후인 1564년 독일 최초의 신학교로 개교했다. 이후 철학 등 인문학과가 개설돼 종합대학교로 승격했으며 신학과 교육학, 사회학 분야는 유럽에서 명문학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대학교의 자랑거리는 이것만이 아니다. 150만권 장서를 갖춘 도서관은 아이히슈테트대학교에서 최고로 꼽는 자랑거리다.

 

우리말로 '꿀밤나무골'인 아이히슈테트는 741년에 교구가 설립됐다. 교구 역사가 1260년이 넘는 곳이니 200년을 겨우 넘긴 한국교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초대교구장이었던 성 빌리발트 주교와 그의 삼촌인 '독일의 사도'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그리고 그의 아버지 잉글랜드의 왕 성 리차드, 동생 성 부니발트와 성녀 발부르가는 지금도 이곳 지역민들뿐 아니라 유럽인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다.

 

아이히슈테트 인구 90만명 중 가톨릭 신자는 46만여명. 교구내 성당은 281개가 있고, 신자들 주일미사 참례율이 50% 가 넘는다고 한다. 교구장 주교의 반대로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인 '맥도날드'가 지난 2002년에서야 이 지역에 겨우 입점할 만큼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우세한 곳이다.

 

또 신학생들은 항상 수단을 입고 다녀야 하며, 1주일에 한번씩 '트리엔트 전례'에 따라 라틴어 미사를 드리고, 본당 주일미사 복음도 그레고리오성가로 노래하는 등 보수적이라 할 만큼 교회의 전통성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히슈테트는 중세 도시의 고풍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아름다운 곳이다. 지표면보다 낮은 단층 협곡지대에 형성된 도시여서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연합군 폭격을 면한 곳이다. 순례단이 이곳에 도착했을때가 저녁 6시경이었는데 무거운 안개가 깔려 제법 어두웠다.

 

버스로 아우디 자동차 공장이 있는 인골슈타트를 지나 도나우 강을 건너 알트밀 계곡으로 내리막길을 20여분 달리자 밤하늘을 가르는 불빛이 나타났다. 유명 전구회사인 아이히슈테트 오스람 공장에서 쏘아올린 조명이었다. 이 조명은 달에까지 닿는다고 했다.

 

아이히슈테트에 도착한 순례단은 주교좌성당과 신학교에 인접한 쿡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러시아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묵어 유명해진 이 호텔은 명성과 달리 로비조차 없는 아담한 호텔이었다. 70이 넘은 노부부와 아들 내외가 운영하고 있는 이 호텔은 내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고 아늑했다. 온돌바닥과 복도에 마련된 무인판매대, 가족 모두가 나와 식탁을 차리는 것 등 호텔이 아니라 독일의 한 가정에 초대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히슈테트 신학교에서 성서학을 전공하고 있는 수원교구 이승환 부제 안내로 주교좌 대성당을 찾았다. 주일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였다. 교구장 주교가 주례하는 교중미사가 아닌데도 1000여명의 신자가 성당을 가득 채웠다.

 

갓난 아기를 안고 아이들 손을 잡고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데 허리가 구부정한 한 독일 할머니가 "매일 이 자리에 앉아 기도하고 미사 참례를 하는데 비켜줄 수 있냐"며 미안해 했다.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 드렸다.

 

미사가 시작되자 초잡이를 비롯해 남녀 어린이 복사 8명이 앞장서 나왔다. 그 다음으로 부제와 주례자인 주임 신부가 입장했다. 주임 신부는 미사에 앞서 신자들에게 우리를 소개해 주었다.

 

지금의 주교좌 대성당은 14세기에 지은 성당이다. 이후 증축을 거듭해 고딕·바로크·로코코 양식 모두를 갖춘 성당이 됐다. 제단 중앙에는 1480년에 나무로 제작한 '날개 제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날개처럼 여닫이 문을 펼치게 돼 있는 이 제대는 가운데에 아이히슈테트 주교좌 대성당의 수호성인인 성모 마리아가, 왼편에는 초대교구장인 성 빌리발트와 그의 아버지 성 리차드 성상이, 오른편에는 성녀 발부르가와 성 부니발트의 성상이 서 있다. 날개 제대에 있는 성인 모두가 아이히슈테트교구의 수호성인들이다. 또 펼쳐진 날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묘사한 부조물들로 장식돼 있다.

 

미사가 끝나 성당문을 나서자 독일인 신자들이 순례단 주위로 몰려와 악수를 청하며 환대해 주었다. 순례 일정을 자세하게 묻고는 "부럽다"며 "좋은 순례가 되길 바란다"고 격려해주었다. 또 시내를 걷다가 마주치면 먼저 손을 흔들며 반겨줬다.

 

순례단은 성녀 발부르가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발부르가성당 등 시내 일원을 돌아본 후 도나우강 협곡에 자리잡은 벨텐부르크 수도원으로 향했다.

 

 

아이히슈테트 초대 교구장 성 빌리발트 주교의 가족력

 

아이히슈테트 초대 교구장인 성 빌리발트(700~786) 주교는 가족 대부분이 성인품에 올라 신자들로부터 각별한 공경을 받고 있는 성인이다. 그러나 8세기 인물들이어서 안타깝게도 성인전인 <로마 순교록>에도 이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생애를 알 수 없다.

 

성 빌리발트의 부친은 영국 웨섹스가 출신의 잉글랜드 왕 성 리차드(?~720)이다. '독일의 사도' 성 보니파시오 주교(순교자, 675~754)의 동생인 리차드는 아들 빌리발트와 부니발트와 함께 720년경 로마를 순례하면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었다. 리차드는 순례 도중 병을 얻어 이탈리아 루가에서 사망했다.

 

부친상을 당한 후 빌리발트는 예정대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고, 동생 부니발트(701~761)는 로마에 남아 공부를 했다.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을 순례한 빌리발트는 기행문 <오도에포리콘>을 저술했다. 이 기행문은 영국 최초의 여행 안내서로 기록돼 있다. 730년 이탈리아로 돌아온 빌리발트는 동생이 먼저 입회한 성베네딕도회 몬테카시노수도원에 입회했다.

 

738년 동생 부니발트가 사제품을 받은데 이어 740년 사제품을 받은 빌리발트는 삼촌인 성 보니파시오(675~754) 주교를 따라 독일 선교를 떠났다.

 

보니파시오 주교는 교황 그레고리오 2세로부터 "게르만족 이방인들을 개종시켜라"는 명을 받고 718년 독일로 갔다. 바이에른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보니파시오는 수도원 설립을 위해 조카들인 빌리발트와 부니발트를 독일로 불러들인 것이다. 보니파시오 주교는 754년 견진성사 집전 중 이방인들의 피습을 받고 순교했다.

 

사제품을 받은 다음 해인 741년에 주교로 서품돼 초대 아이히슈테트교구장으로 임명된 빌리발트는 삼촌과 함께 바이에른 지방 복음화에 앞장섰다.  빌리발트주교는 751년 하이덴하임에 남녀수도원을 설립하고 마인쯔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동생 부니발트를 초대 원장으로 임명했다. 부니발트는 약 10년간 수도원 원장직을 수행하다 761년 병사했다.

 

부니발트가 운명하자 빌리발트 주교는 영국에서 수도원에 입회한 후 750년 오빠들을 도와 선교사로 독일에 온 발부르가(710~779) 수녀를 하이덴하임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다. 발부르가 수녀는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치유해 유명해졌다. 성 베네딕토 수도규칙에 따라 수도원 정착에 힘쓴 발부르가는 779년 사망했다. 빌리발트 주교는 40년간 아이히슈테트교구장으로 재임하다 786년 선종했다.

 

[평화신문, 2004년 4월 18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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