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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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용인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역사적 전개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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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8 ㅣ No.1144

용인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역사적 전개와 의미*

 

 

국문초록

 

용인지역에는 1799년 이전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며, 1810년대에서 1820년대에 걸쳐 은이와 굴암에 신자들이 모여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30년대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사목활동을 하자 1830~1860년대에 용인의 산골지역에 많은 공소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양지면 남곡리와 대대리 지역, 이동읍 묵리와 서리 지역, 원삼면의 학일리와 사암리 지역, 수지구 동천동 손골이 용인 신앙공동체의 중심 지역이었다.

 

1876년 선교사의 재입국을 계기로 용인지역에서 신앙공동체가 재건되었는데 1866년 이전부터 확인되는 신앙공동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소가 증가하고 교세가 확장되면서 왕림본당에서 미리내본당(1896년)과 하우현본당(1900년)이 분리 신설되었다. 1913년에는 미리내본당에서 분리된 압고지본당이 최초의 용인 지역 본당이 되었고, 1927년 양지본당이 미리내본당에서 분리되었다. 1930년 압고지본당과 하우현본당이 폐쇄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양지본당과 북수동본당에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천주교회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용인 중심지에 용인본당(1959년)이 신설되었다. 1963년 수원교구 설정으로 용인지역은 수원교구에 편입되었다.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외부에서 신자들이 많이 유입되자 수원교구는 많은 본당을 신설하여 2018년 현재 용인지역에 30개 본당이 자리 잡게 되었다.

 

용인지역에 신앙공동체가 뿌리내리기까지 온갖 우여곡절과 시련이 있었지만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노력으로 신앙의 터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 신앙의 유산과 유적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Ⅰ. 머리말

 

현재의 용인시 지역1)에는 많은 천주교 성당과 수도회, 사회복지기관들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천주교 신앙의 전파와 사회사업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조선후기부터 개항기, 일제강점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천주교의 신앙과 문화를 유산으로 계승하고 있는 성지, 유적지들이 용인지역에 산재해 있다. 이와 같이 용인 천주교는 한국천주교회뿐 아니라 용인지역의 역사, 종교, 사회문화 방면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향토문화의 한 담당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요람 역할을 했던 수원교구에 속한 용인 천주교회는 한국천주교 초창기부터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고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와 사제들, 지도자들을 배출해 왔다. 현재 용인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성당과 성지, 유적지들은 천주교가 금압(禁壓) 받던 시기에 신자들이 모여 생활하면서 신앙을 실천했던 신앙공동체, ‘교우촌’(敎友村)-공소(公所)2)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향토문화재(향토유적)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처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용인 천주교의 유산을 이어받고 향토문화재(향토유적)로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용인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역사적 전개와 그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급선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러한 주제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용인지역 천주교의 역사에 대해 천주교 ‘본당사’ 입장에서 편찬된 저서가 있었고,3) 교회사연구자가 용인 지역의 교우촌과 공소에 대해 정리한 글도 있었다.4) 그러나 본당사의 경우 전문적인 자료 정리와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교우촌과 공소 연구도 용인 전체가 아니라 일부 지역에 국한되고 자료 활용도 충분하지 못했다.

 

용인의 행정기관 차원에서 정리·편찬된 저작물에서도 천주교에 관련된 내용이 주로 ‘종교’ 분야에 소개되기도 했다.5) 용인문화원에서 기획, 간행된 읍면지 저작물에도 읍면 단위로 그 지역 천주교의 약사와 현황 등이 정리되어 있다.6) 또한 온라인으로 구축된 ‘디지털용인문화대전’(yongin.grandculture.net)에서도 다양한 항목의 천주교 관련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인천주교회사의 체계적인 정리와 자료 활용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천주교회사의 전체 흐름 속에서 용인 천주교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특히 용인지역 신앙공동체의 형성 배경과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교회 측, 관변 측 자료들을 분석, 비교하면서 교우촌-공소의 양상과 특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겠다.

 

이러한 문제 인식 아래 Ⅱ장에서는 조선천주교회의 성립과 천주교의 용인지역 전파 과정을, Ⅲ장에서는 조선천주교회의 시련 속에서 용인지역에 형성된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양상을, Ⅳ장에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용인지역 천주교회의 발전을 살핌으로써 조선후기, 개항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용인 천주교회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Ⅱ. 천주교의 용인지역 전파와 신앙공동체의 형성


1. 용인지역의 천주교 전파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 천주교를 접했던 조선의 지식인들[남인 성호학파 계열] 중 이벽(李檗)은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의 틀에서 벗어나 종교로서 천주교[서교(西敎)]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의 권유로 북경 천주교회를 찾아갔던 이승훈(李承薰)은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과 함께 1784년 서교 신앙공동체를 설립하게 되었다.7)

 

천주교 교리를 진리로 받아들인 이벽은 1784년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 약 1년간 서울과 광주·양근(현재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일대) 등 남한강 인근 지역에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폈다.8) 특히 당대 명망가였던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입교는 남한강 인근 지역 전교뿐 아니라 전국적인 천주교 전파에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양근 권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적 관계망(혈연, 혼연, 학연)을 통해 여주, 이천, 포천, 충주, 내포(內浦)9), 전주에 천주교가 전파되었고 몇 년 만에 남한강 인근 지역과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많은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세워졌다.10)

 

초창기 경기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핵심은 남한강 인근의 양근, 여주, 광주, 이천 지역이었다. 특히 양근지역은 한국천주교회의 요람이라 불릴 정도로 천주교 전파의 중심지였다. 1791년과 1795년의 두 차례 시련11) 속에서 남한강 일대 신앙공동체는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서울로 이주한 신자들을 연결고리로 하여 주문모 신부를 중심으로 한 교회지도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고, 지연, 학연, 혈연 등을 매개로 주변에 천주교를 전파해 나갔다.12)

 

광주, 이천 지역과 경계를 맞닿아 있는 용인지역에도 이른 시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도나 전파 과정, 신앙공동체가 세워진 지역을 자료에서 확인할 수는 없다. 대신 1801년(신유) 교옥(敎獄)13) 이전에 용인지역에서 천주교 신자(가족)가 살았다는 것은 확인된다.

 

박(후재) 요한은 죄인[증언자 백 안나]의 장부(丈夫, 남편)요 본래 시골 용인(龍仁) 사람으로 태중교우(胎中敎友)요 어려서 대세(代洗)하였으나 보례(補禮)는 중년에 하옵고, 그 부친의 사정은 모르오나 모친은 타당히 수계(守誡)하다가 기해년(1839) 정월에 선종(善終)하고 (박후재) 요한은 기미생(1799)이온데 41세에 치명하옵고 36세(1834)에 죄인과 혼배하와 노모(老母)를 모시고 감은돌(현재 서울 마포구 현석동)서 여섯 간 초가집에서 구차하게 살림할 제[때] 미투리를 (신으로) 삼아 생애(生涯, 생계 유지)하여14)

 

1839년 서울에서 순교한 박후재(朴厚載, 요한)는 용인 사람으로 기미년(1799)에 태어난 ‘태중교우’(胎中敎友,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신자)였다. 즉 1799년 당시 용인에 천주교 신자였던 박후재의 부모가 거주했고, 거기서 박후재가 태어나 얼마 동안 살다가 최종적으로 서울로 이주했던 것이다. 서울 출신인 백 안나와 1834년에 혼인한 것으로 보아 늦어도 1834년 이전에 서울로 올라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연히 나[신태보]는 순교자 집안의 유족들이 용인(Niong in) 고을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족을 찾으려고 나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상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른이라고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젊은이들도 모두 아직 성숙한 편은 아니었다. 다 합쳐서 세 집이었고 모두 친척관계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 그들은 기도서 몇 권과 복음 해설서를 잘 간직하고 있었지만 모두 깊이 감추어 두었다. … 나는 그곳에서 40리(Ly) 떨어진 곳에 머물렀으며 그날 이후로 여드레나 열흘에 한 번꼴로 양쪽에서 서로 왕래를 하였는데, 그 결과로 우리의 결속은 매우 긴밀해져서 가까운 친척에 못지 않았다. 우리는 독서를 하고 주일과 축일을 지내는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 사람들은 예전에 (주문모) 신부님에게 성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 하지만 우리는 양쪽 다 비신자들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었다. 사방에서 그들의 눈초리가 쉬지 않고 우리를 주시하였고, 나는 비신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에 40리 길을 걸어야 했다. 차츰 이웃에 사는 비신자들이 내 이름과 내가 사는 곳을 알려고 하였고, 결국 이런 것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 그래서 모두가 함께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어떤 곳에 가서 별도의 작은 마을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내가 책임지고 있는 식구라야 아들 하나와 딸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다섯 집을 합치면 그 숫자가 40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각자가 가진 전 재산이라고는 빚밖에 없었으니, 집을 팔아도 빚을 갚고 나면 여행에 필요한 노자조차도 대지 못할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고려하던 장소는 인적이 거의 없는 강원도(la province de Kang Ouen)의 깊은 산속이었기 때문이다. 일이 성공하든 그렇지 못하든, 어쨌든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 8일 동안 어렵게 겨우 걸어서 우리는 드디어 고대하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 (이사올 때 빌린) 말들을 돌려보낼 수 있게 되었으며, 돌아오는 길에 남아 있던 가족도 데리고 왔다.”15)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작성한 수기(手記)에서도 1802년 초 당시 용인에 천주교 신자 가족들이 거주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801년(신유) 교옥이 끝난 후 신태보는 기도서를 모두 잃어버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는데 우연히 몇몇 순교자 집안의 유족들이 용인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과 40리 떨어지는 곳에 머물면서 8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만나 천주교 서적을 읽고 주일과 축일의 의무를 지켰다. 그런데 신태보나 용인 신자들 모두 비신자들 가운데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피해 밤을 틈타 몰래 왕래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신자들의 의심을 사게 되자 그들은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1802년 초 신태보 가족과 용인 신자 가족들은 모든 재산을 팔아 빚을 갚고 나서 겨울에 험한 산길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신태보와 함께 피신했던 신자 가족들이 언제부터 용인지역에 거주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정부의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에서 용인으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동시에 1801년 교옥 이전부터 용인지역에 거주하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6)

 

박후재에 대한 증언과 신태보의 수기를 통해 적어도 1799년 이전부터 용인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경기 이천(利川) 출신인 신태보17)가 용인지역 신자들을 찾았다는 점에서 용인지역의 천주교 전파를 서울-남한강 인근 지역과 연계해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신앙공동체의 중심지인 남한강 인근 지역(양근, 여주, 광주, 이천)에서 용인으로 천주교가 전파되었을 것이고, 작은 규모이지만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국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용인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는데 본격적인 신앙공동체의 형성은 1801년 교옥 이후의 일이며, 이는 각 지역에서 천주교회가 재건되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2. 용인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형성

 

1801년 천주교 옥사[교옥]가 끝나고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각지로 흩어졌던 신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거나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신앙공동체를 재건했다. ‘사학(邪學)’이자 반역자의 무리로 낙인찍힌 신자들은 고향 땅에 계속 살기가 어려워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신자들은 당시 하층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각지를 유랑하거나 도시의 빈민층으로 유입되기도 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 옹기, 숯굽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관원과 포졸들의 감시와 추적을 피하기 위해 깊은 산골로 들어갔고, 특히 군현과 도의 경계지역에 정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고유의 자기 관할 구역이 있는 관원과 포졸들은 자기 구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위험한 상황이 오면 바로 군현, 도의 경계를 넘어 다른 산골로 피신했던 것이다.18)

 

한강 이남 경기지역(현재의 수원교구지역)에서는 1801년 이전 남한강 일대가 중심이 되었던 것과 달리 서울과 가까운 지역, 산골에 위치한 중부지역, 내포지역과 교류가 활발한 서남지역 등에 신앙공동체[교우촌]가 형성되었다.19) 이들 신앙공동체들은 1830년대 중반 선교사가 다시 입국하면서 공소가 되었고 1860년대까지 천주교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신자들은 미신 행위에 참여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 비신자들과 섞이는 것을 피합니다. 그들은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대여섯 가구씩 모여서 담배농사를 짓고 살아갑니다. 선교사는 각 마을에서 마치 자기를 하늘에서 보낸 천사나 되듯이 맞이하는 저 순박한 사람들 속에서 보통 이틀 내지 사흘을 묵고 갑니다.20)

 

서울이나 내포, 다른 경기 지역의 신자들이 이주해온 용인의 신앙공동체[교우촌]는 대부분 산골에 자리를 잡았는데, 1801년 이후 평야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탄압을 피해 산골로 이주하여 화전(火田)을 일구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비신자들 속에 숨어서 살아야만 하는 서울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가능한 산골짜기가 신자들의 거주지로 선호되었다. 또한 신자들의 이주와 왕래가 잦아지면서 산골 ‘교우촌’ 사이의 인적 지역적 연락망이 형성되었고,21) ‘교우촌’들을 잇는 산길을 통해 선교사들이 사목방문을 할 수 있었다.22)

 

신앙공동체[교우촌]가 용인지역에 분명하게 그 모습이 드러난 것은 1820년대 이후인데, 가장 이른 시기에 확인되는 교우촌은 ‘양지 은이’[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23)와 ‘용인 굴암’[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이다.

 

장주기(張周基, 요셉)의 조카 장치선(張致善, 1820년생)은 5세 때인 1824년에 양지 은이[언리(彦里)]에 사는 오자현(吳子賢)에게 교리를 배워 대세를 받았다.24) 한편 오 바실리오[1812년생]는 17세 때인 1828년경에 오 페르페투아와 혼배하여 ‘양지 응이’에 살았다.25) 이를 통해 볼 때 적어도 1824년 이전에 은이 마을이 형성26)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10년대 북경 밀사로 활약한 이여진이 말년에 거주하다가 1833년에 선종한 곳도 은이였다.27) 1828년 이후 은이에서 거주하던 오 바실리오는 1834년 유방제 신부 입국 이후 서울로 올라가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을 대부로 삼아 세례를 받았다. 또한 현석문은 매년 가을 은이로 내려와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신자들을 가르쳤다.28) 1839년에 순교한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회장도 현석문과 마찬가지로 매년 가을에 은이로 내려와 한 달 이상 머물면서 교리를 강론하고 신자들을 격려했다.29)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보면, 1830년대 은이 교우촌은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서울 교회와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서는 맨처음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당시 신자들의 보고를 토대로 신자들이 거주하는 지역[교우촌]과 신자 수 등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1836년 4월 4일자 모방 신부의 서한30)에 언급된 지명 중 용인지역과 관련된 곳은 굴암(kouram, 130~140명), 양지(yang gin, 140~150명)이다. 여기서 양지는 은이 교우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적어도 1830년대까지 용인지역을 대표하는 교우촌이 용인 굴암과 양지 (은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 은이 교우촌은 선교사의 사목방문을 받는 ‘공소’가 되었다. 1836년에 소년 김대건이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뽑힌 곳이 ‘은이 공소’라고 알려져 있다.31) 1836년 1월에 입국한 모방 신부가 부활절[양력 4월 5일] 이후 연말까지 경기와 충청도 16~17개의 교우촌을 순회했는데 김대건이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올라온 것이 양력 7월 11일이므로 그 이전 4월~7월 초에 은이 공소를 방문했을 것으로 보인다.

 

1846년 순교자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은 앵베르 주교에 의해 은이 공소회장으로 임명32)되었는데, 1838년 12월에서 1839년 1월 사이 어느 날 앵베르 주교가 은이 공소를 방문했을 때33)의 일일 것이다. 1839년(기해)의 교옥에도 은이 공소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34) 한이형 회장을 중심으로 주변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용인 굴암도 은이 못지않게 유서가 깊은 곳이다. 1810년대생인 최인서(崔仁瑞, 요한) 회장35)은 굴암 태생으로 7, 8세 때부터 부친에게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36) 이로 볼 때 최인서 가족이 1810~1820년대에 걸쳐 굴암에 살면서 가족 단위로 신앙공동체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굴암 교우촌의 존재는 1836년 4월 4일자 모방 신부의 서한에서도 확인된다. 즉 1830년대까지 굴암이 용인지역의 핵심 신앙공동체였다고 보여진다.37)

 

1836년 부활절[4월 5일] 이후 모방 신부가 본격적인 지방 사목방문에 나서게 되자 굴암에도 신부가 방문하게 되고 이때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이 굴암 공소회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회장에 임명된 김제준은 자기 집을 공소로 만들고 주일이나 축일에는 신자들을 모아 공소예절을 하고 교리를 가르쳤다고 한다.38)

 

이와 같이 1810년대에서 1820년대에 걸쳐 은이와 굴암에 신자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고, 1830년대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적극적으로 사목활동을 하자 이후 1860년대까지 양지 · 용인의 산골 지역에 많은 공소(교우촌)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은이를 중심으로 한양지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형제봉(459m)과 독조봉(432m)으로 이어지는 산골짜기의 북쪽에 자리 잡게 되었고, 굴암을 중심으로 한 용인[현재 이동읍]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부아산(402m)과 함박산(350m)의 남쪽, 시궁산(514m)의 북쪽 골짜기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중 1839년 이전 모방 신부가 방문한 공소로는 양지의 배마실[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과 넙실[현재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이 확인되고 있으며, 용인의 한덕골[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1845년 말 김대건 신부가 은이 상뜸이39)로 내려와 1846년 부활절 전까지 주변지역 공소를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40)했는데, 이때 방문한 공소는 양지 터골, 응다라니[이상 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 용인[굴암으로 추정]41)이다. 그 밖에 공소라고 확증할 수 없으나 당시 신자들이 거주한 마을(교우촌)로는 양지 정쇠[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정수리]와 무쇠막[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용인 산의실[현재 지명 불명], 더욱골[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서리] 등이 확인된다.42)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연관되어 은이 공소가 포졸의 습격을 받고 김대건 신부와 한이형 회장이 순교했지만, 그후에도 선교사들은 지속적으로 용인지역을 사목방문 했다.43)

 

1861년 말, 서울과 경기지역을 담당하던 베르뇌 주교는 경기 남부의 42개 공소를 칼레(Calais) 신부 신부에게 넘겨주었다.44) 칼레 신부는 1861년 말부터 1863년 말까지 약 2년간 이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했는데, 관할 지역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양성 미리내[현재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와 그 인근의 용인, 양지, 이천, 안성 지역으로 추정된다.45) 전임 칼레 신부를 대신하여 경기 남부구역을 맡게 된 선교사는 오메트르(Aumaître) 신부였다. 그는 1864년 11월부터 1866년 초까지 사목활동을 했는데, 공소를 방문하면서 여러 통의 서한을 작성했기 때문에 당시 공소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46)

 

지리적으로 양지 · 용인 산골지역과 가깝고, 1860년대 경기 남부 지역 전담 선교사들의 거점이 된 미리내47)를 중심으로 그 인근지역에도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양성 약산골[현재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양지와 죽산 경계에 위치한 고초골[현재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은 1860년대 이후 기록에서 확인되며, 뒤에 미리내본당이 설립, 발전할 때 주요 공소로 또다시 확인된다.48) 이 지역 신앙공동체는 문수봉(404m)과 쌍령산(502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1850년대 이후 수원, 광주와 경계를 이루면서 용인 서북부 지역에 위치한 손골[현재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신앙공동체가 확인된다. 바라산(428m), 백운산(567m), 광교산(582m) 동쪽 산골 깊숙이 위치한 손골은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은거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갓 조선에 입국한 신임 선교사들이 몇 달 간 머물면서 조선말과 조선풍습을 익히고 사목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는 곳이 되었다. 동시에 주변지역의 교우촌과 연계하여 사목활동을 하거나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선교사들이 손골에 들러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49)

 

처음 손골이 언급되는 것은 다블뤼 신부의 1853년 9월 18일자 서한인데,50) 이를 통해 손골 신앙공동체[공소]가 1853년 이전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1) 손골 공소가 본격적으로 조선 언어와 풍습을 배우는 장소가 된 것은 1857년 이후이다. 1857년에 입국한 페롱(Féron) 신부와 1861년 입국한 조안노(Joanno) 신부와 칼레 신부, 1863년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조선말을 배우고 사목 준비를 위해 손골로 보내졌다. 1865년에 입국한 도리(Dorie) 신부와 볼리외(Beaulieu) 신부도 시골로 보내졌는데 도리 신부는 손골로, 볼리외 신부는 좀 떨어진 교우촌인 뫼루니(현재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로 내려갔다.

 

 

 

이처럼 1860년대 손골은 신임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사목준비를 하는 교육 장소이자 관할 선교사가 방문하는 공소로 존재했다. 또한 선교사들이 모임을 갖고 휴식을 취하는 재충전의 장소 역할도 했다. 다른 동료 선교사들이 손골을 찾아온 것은 무엇보다 손골이 서울에 있는 베르뇌 주교를 만나러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었다.

 

1866년부터 1873년에 걸친 교옥 중에 용인 출신이거나 용인에 거주했던 신자들이 서울이나 수원유수부, 광주유수부, 죽산도호부, 남양도호부 등지로 끌려가 순교했다. 이러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도 당시 용인지역 신앙공동체[공소 · 교우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표를 보면, 병인교옥 당시 순교한 신자들의 출신 지역, 거주하다가 체포된 지역,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에 거주했던 지역이 확인된다. 출신지로는 더욱골, 배마실, 병목골[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손골, 하동촌[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남서부 지역]이, 신자가 체포된 거주지로는 고초골, 굴암, 남성골[현재 지명 불명], 더욱골, 삼배울[삼배일, 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서리], 손골, 읍내 신평리[현재 지명 불명], 은이, 응다라니, 정쇠, 지방골[현재 지명 불명], 한터[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가 확인된다.53)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의 거주지로는 고초골, 국수봉[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와 화산리 사이에 있는 시궁산], 굴암, 넙실, 더욱골, 배마실, 삼배울[삼배일], 송동[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적어도 1820년대부터 용인지역에서는 산골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1860년대까지 여러 차례의 천주교 탄압과 시련 속에서도 교우촌 · 공소로서 존속하면서 사제와 순교자들을 배출했다. 또한 내포나 충북 지역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반대로 양지와 용인 지역에서 타 지역으로 이주, 왕래하는 현상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러한 용인 신앙공동체를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크게 네 지역이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예전 양지현 지역에는 은이, 배마실[이상 남곡리], 사기점, 응다라니, 무량골, 터골[이상 대대리], 외에 무쇠막[평창리], 송동[송문리], 신평리[지명 불명], 정쇠[정수리], 한터[주북리] 등이 확인된다. 즉 현재의 양지면 남곡리와 대대리 지역을 중심으로 그 인근에 교우촌 · 공소들이 모여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54)

 

예전 용인현 지역에는 굴암, 국수봉, 병목골, 한덕골[이상 이동읍 묵리], 더욱골, 삼배울[이상 이동읍 서리], 남성골, 산의실, 안의실, 지방골[이상 지명 불명], 하동촌[이동읍 남서부]에 신앙공동체가 존재했다. 현재의 이동읍 묵리와 서리 지역에 교우촌·공소가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예전 죽산도호부 지역에는 1860년대 선교사들의 거점이 된 미리내와 가까운 고초골[원삼면 학일리]과 넙실[원삼면 사암리]에 신앙공동체가 확인된다. 이 지역은 현재 용인 원삼면에 해당된다.

 

예전 광주부[현재 성남, 의왕 포함]에 가까운 용인 손골은 인근 신앙공동체의 구심지였으며 신임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사목준비를 하는 교육 장소였다. 현재 용인 수지구 지역에 해당된다.

 

1801년 교옥 이후 조선천주교회는 온갖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고 신앙공동체[교우촌·공소]를 재건해 나갔다. 특히 1830년대 이후 1860년대에 이르기까지 경기지역의 신앙공동체는 서울을 중심으로 남쪽지역, 특히 산간지역에 자리를 잡는 경우가 많았다. 1820년대부터 형성된 양지 은이와 용인 굴암 일대, 1850년대부터 신임 선교사들의 거주지로 활용된 용인 손골, 1860년대 이후 사목방문의 거점이 되는 양성 미리내 같은 산골 교우촌이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Ⅲ. 용인 천주교회의 발전과 신앙유산의 계승


1. 개항기 용인 천주교회의 재건

 

1866년 교옥 때 조선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고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그러나 1876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다시 입국하고 1886년 조불조약(朝佛條約) 체결을 계기로 천주교 신앙은 허용되기 시작하자 유서 깊은 교우촌[공소]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재건될 수 있었다.

 

1876년 블랑(blanc) 신부55)의 서한에 재건된 신앙공동체 지역이 언급되는데, 경기 지역에서는 중 용인(Ryong-in), 양성(Yangsyeng), 안성(An-syeng)이 확인된다.56) 1877년 드게트(Deggette) 신부는 4개월간 용인 공수동[현재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으로 추정] 이병교 레오 회장의 집에 머물렀으며, 그해 4월, 용인 우명동[현재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소리]을 사목 방문했다.57)

 

1878년에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Ridel) 주교가, 1879년에 드게트 신부가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공사의 요청을 받은 청국의 중재로 조선 정부는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추방했지만 선교사들과 같이 잡힌 신자들은 풀어주지 않아 옥중에서 순교했다. 이때 리델 주교 · 드게트 신부와 관련하여 용인 지역에 살았던 신자들도 잡혀가 순교했다.58)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계속 조선에 입국했고, 사목활동이 점차 자리잡게 되면서 체계적인 교세통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881~1882년도59)부터 선교사들은 담당구역의 공소별로 성사집전, 교세현황 등을 정리해서 교세통계표와 사목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때부터 공소별 교세통계표가 현존하는 1936년까지 ‘공소’ 지역과 교세를 확인할 수 있다.60)

 

경기 남부지역[현재 수원교구지역]에서 1880년대 초부터 유서 깊은 공소가 재건되었는데 배마실(1883년에 신설)과 미리내, 수리산이 확인된다.61) 1885~1886년도 블랑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경기 지역의 교세가 빠르게 늘어났는데 수도 인근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먼 지방에서 신자들이 이주해 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1866년 교옥 이후 신앙을 포기했던 옛 신자들도 점차 교회로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양성과 용인이었다.

 

특히 용인 더욱골(Toui-kol, 1885년 신설)은 20년 전 12개 교우촌이 자리잡았던 골짜기로 새로 중부 지방의 신자들이 와서 살고 있었다.62) 이처럼 1880년대 용인지역에서는 양지 배마실과 용인 더욱골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재건되고 천주교가 전파되고 있었다.63)

 

한강 이남의 경기도 지역의 교세가 확장되자64) 이 지역만을 전담할 선교사가 필요했다. 이에 1888년 7월 초 앙드레(André) 신부가 수원 갓등이(현재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로 내려갔고,65) 이로서 ‘수원교구지역’에 실질적인 첫 본당인 ‘갓등이’(왕림)본당이 세워졌다. 이후 왕림본당은 수원교구지역 신앙공동체(본당, 공소)의 모(母)본당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왕림본당 신설되고 주임 신부가 부임하면서 천주교 전파가 더 활발해졌고, 용인지역에도 많은 공소가 설정되었다. 1888년부터 1895년까지 용인 수지·기흥구 지역, 처인구 동부동, 양지면, 이동읍, 원삼면, 남사면 지역에 공소가 신설되었는데, 은이, 한덕골, 손골 같이 1866년 교옥 이전부터 확인되는 신앙공동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서 깊은 교우촌·공소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천주교가 계속 전파되었다.

 

신설 당시 왕림본당은 양평, 이천 동부, 인천, 부평 지역을 제외한 한강 이남 경기 지역을 관할했는데, 관할 영역이 넓고 공소 및 교세 확장이 계속 진행되면서 몇 년 만에 본당 분리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66) 1896년 4월 26일자로 미리내본당이 왕림본당에서 분리 신설되고 5월 20일에 초대 주임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가 미리내에 부임했다.67)

 

본당 신설 이후 미리내본당의 주요 관할구역은 미리내와 인접한 용인 남부(이동읍, 남사면, 원삼면), 용인 동부(양지면)와 이천 서부, 광주 동남(도척면)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천주교 금압시기’에 많은 신앙공동체가 자리 잡았던 ‘경기 중남부 산골’지역에 해당하며, 1860년대에는 미리내를 중심으로 칼레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가 사목방문을 하던 곳이었다.68)

 

미리내본당의 신설 이후 공소 수는 큰 변화가 없지만 신자는 꾸준히 증가했으므로,69) 주임 강도영 신부는 원활한 사목을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강구했다. 1904년에서 1905년 초까지 본당을 은이 공소 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으나 성사되지 못했다.70) 대신 강도영 신부는 제8대 대목구장 뮈텔(Mutel) 주교에게 본당 분할을 건의하면서 1906년에는 용인 도사리골[현재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삼계리]과 광주 미륵댕이[현재 광주시 도척면 유정리] 중 하나를 새 본당 중심지로 선정해 주도록 요청했다.71) 1910년에는 광주 시어골[현재 광주시 도척면 상림리] 공소나 도사리골 공소에 선교사를 파견해 주기를 요청했다.72) 그러나 이러한 본당 분할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1900년 하우현본당(현재 의왕시 청계동)이 신설되자 미리내본당 관할 공소 중 본당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인 현재의 성남 분당구 지역(둔토리)과 용인 수지구 지역(대지, 동막골, 머내)이 하우현본당으로 이전되었다. 1906년에도 현재 광주 오포읍 지역과 함께 용인 모현읍 일부 지역과 기흥구 지역 공소가 하우현본당으로 편입되었다.

 

 

 

 

이와 같이 1876년 선교사의 재입국 이후 용인지역의 유서 깊은 교우촌과 공소들이 재건되었고, 미리내본당과 하우현본당 관할 아래 인근지역 천주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손골, 골배마실 · 은이 · 배마실, 무량골 · 사기점, 한터, 고초골, 병목골 · 한덕골, 더욱골, 소내실은 천주교가 금압 받던 시기에 신앙공동체로 형성되었고, 계속되는 시련을 겪어내고 공소로 재건된 후 인근지역 천주교 전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다.

 

 

2. 일제 강점기 용인지역 본당의 설정과 변화

 

미리내본당의 본당 분리 요구는 마침내 결실을 맺어 1913년 5월 17일, 압고지본당(현재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이 신설되었다. 용인지역에 최초로 신설된 압고지본당은 용인 북부와 광주 동남부 지역[현재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과 모현읍, 광주시 도척면 일대]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1880년대부터 공소가 자리 잡았을 정도로 신앙공동체의 역사가 깊은 산골 교우촌 지역이었고 지속적으로 신자가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 강제합병 이후 일제의 종교통제 정책은 천주교의 발전에 방해가 되었고, 특히 담배전매 정책은 담배 농사를 주로 짓던 산골 교우촌 신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20년대에는 가난과 빚에 쪼달리게 된 신자들이 일자리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가까운 도시지역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향이 높았다. 그 결과 화전을 일구어 담배농사를 짓거나 옹기를 구워 팔던 전통적인 교우촌들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점차 축소되거나 사라지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본당의 교세 역시 약화되었다.73) 이런 추세는 미리내, 하우현, 압고지 등 산골 교우촌에 기반을 둔 본당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압고지본당에는 경제적 빈곤, 도시생활에 대한 동경 등으로 산골 교우촌 신자들의 이주와 냉담 현상이 나타났고, 비신자들에 대한 전교도 부진했다. 교세 성장세는 1920년을 고비로 급격하게 반전되어 하락세로 돌아섰다. 본당 인근지역의 토질이 급속히 나빠지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신자들이 냉담해지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74) 게다가 1929년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여75) 결국 1930년에 본당이 폐쇄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부분 공소는 양지본당에 편입되었고, 현재 용인시 기흥구 지역 공소들은 양지본당을 거쳐 북수동본당 관할로 넘어가게 되었다.

 

1920년대에 산골 교우촌을 기반으로 한 본당들은 경제적 빈곤과 신자들의 이주 등으로 교세 부진을 면치 못했고, 용인 중남부지역을 주로 관할하던 미리내본당 역시 전반적으로 신자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양지면 지역은 유서 깊은 배마실,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잘 유지하고 있었으며 본당 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76)

 

1927년 미리내본당 주임 강도영 신부는 본당 창설을 준비하기 위해 보좌 박동헌 신부를 남곡리에 파견했으며,77) 1928년 ‘남곡리본당’(양지본당)이 신설78)되면서 용인 양지면 일대와 원삼 · 이동읍 일부지역, 이천지역 공소가 미리내본당에서 분리되었다.

 

양지면 남곡리가 양지본당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벌터에 새로 건립한 본당은 신설과 동시에 은이와 배마실 공소를 통합했고, 1929년경에는 별미 공소 신자들도 흡수했다.79) 또한 본당의 동남쪽에 위치한 원삼면 사암리의 모래실과 용바위 공소를, 본당 서쪽에 위치한 이동읍 서리의 더우골 안터와 사리티 공소를 관할했다.

 

1930년 압고지본당이 폐쇄되고 그 관할 공소들이 편입되면서 양지본당은 용인 양지면뿐 아니라 용인 모현읍·포곡읍, 광주 도척면과 그 일대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광주 남부, 용인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은 미리내본당에서 양지본당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북수동본당과 함께 ‘수원교구지역’에서 가장 교세가 큰 본당으로 성장했다.

 

전통적인 신앙유산을 잘 간직한 양지본당은 광주 남부, 용인 중북부 지역뿐 아니라 천주교가 전파되지 않았던 지역까지 교세를 확장시켰다. 1935년경 이전까지 신자가 없었던 용인 읍내에 김량장동 공소가 신설되었는데, 이는 장차 용인본당의 기반이 되었다.80) 또한 이천 지역 중심부로 교세를 확장하여 1941년에 양지본당에서 이천본당이 분리 신설되었다. 이후 이천본당은 이천지역과 광주 도척면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81)

 

1930년 관할구역 개편에 따라 양지본당에서 원삼 · 이동읍과 이천 지역 공소가 다시 미리내본당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미리내본당은 안성 양성면[미리내], 용인 남사면[새미롱이], 원삼면[용바위, 모래실, 고초골], 이동읍[쇠재, 먹방이, 한덕골, 더우골, 사리티], 이천지역 공소를 관할했다. 제3대 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는 1941년 이천본당 신설 때에 이천지역 공소[단내, 배티]를 인계해 주었다.82)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리내본당은 점차 관할구역을 줄이면서 용인 남부와 안성 양성면 일대를 관할하는 산골 본당으로 변모했다.

 

1920년대 이후 점차 신자가 줄어들었던 하우현본당도 1930년에 폐쇄되었고, 유서 깊은 산골 교우촌이었던 용인 수지 지역 공소들은 북수동본당에 편입되었다. 하우현은 1937년 다시 본당으로 복구되었지만 이후 의왕시를 거점으로 그 서쪽에 위치한 군포, 시흥, 안산, 안양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삼게 되면서 용인지역과는 관련이 없게 되었다.

 

1923년 수원 시내에 자리를 잡고 신설된 북수동본당은 1930년 11월 압고지본당 관할 공소를 인계받았다. 1930년대 이후 일제 말기까지 북수동본당의 주요 관할구역은 현재 북수동을 중심으로 동북쪽으로는 용인 수지와 성남 분당, 용인 모현읍 지역,83) 동쪽으로는 용인 기흥지역, 서남쪽으로는 수원 권선구 지역, 남쪽으로는 화성 병점동 · 안녕동과 오산 지역이었다.

 

용인 수지·기흥 지역과 성남 분당지역은 원래 하우현본당과 압고지본당 관할이었다가 1930년, 북수동본당으로 편입된 곳이었다. 1937년에 하우현본당이 부활했지만 이들 지역 공소들은 계속 북수동본당에 남아 있었으며, 특히 용인 수지 · 기흥 지역 공소들은 1980년대까지도 북수동본당의 관할 아래 있었다.

 

 

 

 

 

 

1913년 용인지역 최초로 압고지본당이 신설되어 미리내본당과 함께 용인지역 신앙공동체를 관할했다. 1920년대 이래 일제의 종교통제와 경제정책으로 산골 교우촌이 쇠락하면서 1930년 압고지본당과 하우현본당이 폐지되었지만, 양지본당과 북수동본당이 압고지와 하우현본당 관할 공소들을 흡수하면서 용인지역 신앙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일제강점기까지 확인되는 용인지역 신앙공동체는 위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61개 공소[현재지명으로 34개 지역]에 이르며 기흥·수지 지역과 양지·이동면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해방과 수원교구 설정 이후 용인 천주교회의 발전

 

1945년 해방을 통해 한국천주교회는 일제의 종교통제정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비록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혹독한 시련과 희생을 겪어야 했지만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위안과 물질적 도움을 줌으로써 천주교의 교세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양지본당은 양지지역과 인연이 깊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아 19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각’을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947년 여름에 성당 옆 공지에 육각형의 조선식 지붕을 얹은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각을 건립하고 그해 9월 6일에 축성식이 거행되었다.84) 이 기념각은 1948년 8월, 성당을 배마실로 옮긴 후 관리 소홀로 퇴락해져 제4대 주임 조인환 신부 재임시(1950~1959)에 철거되었다.85)

 

유서 깊은 농촌 교우촌에 기반을 둔 양지본당은 용인지역 대부분을 관할했는데, 읍내지역에는 교세가 미약했다. 그에 따라 장래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읍내지역에 본당 신설을 추진했으며 1959년에 당시 군청소재지였던 김량장동에 용인본당이 신설되었다.86) 이때부터 남곡리본당은 양지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2개의 본당이 더 신설되는데, 1960년 미리내본당에서 천리본당이 분리되었고 1962년에는 백암본당이 양지본당에서 분리 신설되었다.

 

양지본당 주임 정주성 신부는 1962년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 집터 부근 땅 천여 평을 신자 명의로 분할받아 김대건 신부상과 제대를 설치하여 교회사적지로 만들었다. 이것이 골배마실 성지의 단초가 되었다.87)

 

196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농촌사회에서도 변화와 발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고, 이러한 시대 배경 속에서 농촌 본당과 농촌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농촌 발전과 전교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88) 이러한 농촌사회 운동은 양지본당과 용인본당 등 용인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가톨릭농민회 운동의 기반으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 1960년대 초까지 교세 성장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서울대교구(1962년 교계제도 확립)의 분할이 급선무로 떠올랐고, 그 결과 1963년 10월 7일 수원교구가 분리 설정되었다. 교구 분리와 함께 용인지역 천주교 본당과 공소는 수원교구에 편입되었다.

 

수원교구 설정 당시 용인지역에는 양지, 용인, 천리, 백암본당 등 4개 본당이 있었고, 미리내와 북수동본당이 용인지역 일부를 관할하고 있었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조선후기와 개항기를 거치는 유서 깊은 공소(교우촌)와 함께 새롭게 천주교가 전파된 공소가 함께 확인된다.

 

신설 교구로서 사제가 부족했던 수원교구는 1964년 7월에 4개의 본당을 폐쇄했는데, 양평 용문본당과 함께 미리내본당이 이때 폐쇄되어 관할 공소 일부는 용인본당에 편입되고 미리내와 4개 공소는 안성본당에 편입되었다.90) 폐쇄된 천리본당은 용인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고, 백암본당도 원래 본당인 양지본당의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91)

 

미리내본당은 산골 교우촌의 쇠퇴와 교세 부진으로 본당이 폐쇄되었으나 대신 순교자 현양운동의 중심인 미리내성지로 변모했다.92)

 

1968년에 병인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거행되자 복자 도리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북수동성당과 손골 공소 신자들이 힘을 모아 손골에 도리 신부 ‘복자기념탑’을 건립했다. 이후 신자들의 순례가 이어지면서 손골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93)

 

1976년에는 무명순교자 묘역조성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이 사업은 용인지역에 흩어져 있는 순교자들의 유해와 묘소를 수습하여 현양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수습된 유해는 미리내로 옮겨졌고, 현재까지 미리내 성지에는 16기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있다.94)

 

김대건 신부의 사목지였던 양지 골배마실도 1984년 시성식 이후 김대건 신부 성인 관련 성지로 부각되었다.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인 1996년을 맞아 수원교구에서는 순교기념관 건립을 계획하고 은이공소 터를 기념관 부지로 선정했다. 1997년 본당 설정 70년을 맞아 양지본당도 골배마실성지 개발에 착수했다. 그해 7월 6일에 최덕기 교구장의 주례로 ‘성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식을 하고 골배마실성지 봉헌식을 거행했다.95)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이 2001년 3월 30일에 도시계획으로 철거되자, 수원교구는 김가항성당을 은이성지에 복원하는 계획을 세웠다. 은이와 골배마실 성지 개발을 본격화하기 위해 2003년 9월 30일에 전담 신부가 파견되었다. 주교회의의 승인을 거쳐 수원교구는 2016년 9월 24일 은이성지에 김가항성당을 복원 건립했다. 복원된 성당에는 중국에서 철거된 부재 중 성당 안 기둥과 들보, 기둥, ‘천주당’(天主堂) 현판이 사용되었다.96)

 

교구 차원의 성지 개발과 함께 천주교회 유산이 용인지역 문화재로 인정받기도 했는데, 1891년에 지어진 고초골 공소 한옥이 2018년 3월 9일에 등록문화재 제708호로 등록되었다.97)

 

이와 같이 용인지역 천주교는 조선후기 이래 이어오는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여 후대에게 물려주는 사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지역사회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교통의 발달과 본당 중심의 사목이 정착되면서 공소는 폐지되었고, 1990년대 후반 용인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많은 본당이 신설되었다. 그 결과 2018년 현재 용인지역에 3개 지구, 25개 본당이 자리잡고 있고, 수원지역 일부와 관할 영역을 함께 영통지구의 본당까지 합치면 모두 30개가 된다. 본당이 용인 지역 이외에 위치하면서도 관할구역에 용인 지역이 일부 포함된 경우[3개]까지 합치면 33개이다.

 

 

 

 

 

 

처인지구에 속한 본당들은 그 뿌리가 양지본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서 깊은 교우촌에 뿌리를 둔 양지본당에서 용인본당과 백암, 원삼본당이 분리 신설되었으며, 용인 중심지에 자리잡은 용인본당에서 송전, 모현, 삼가동, 천리요셉본당이 분리 신설되었다. 이들 본당들은 양지본당뿐 아니라 과거 미리내본당과 압고지본당 관할 시기에 신앙공동체의 구심점이었던 공소의 신앙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기흥, 수지지구와 영통지구의 본당들은 1990년대 이해 진행된 급격한 도시화에 발맞춰 신설되었고 소속 신자들도 외부에서 유입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기흥, 수지지구에 속한 본당들의 역사적 뿌리는 신갈본당으로 올라가는데 신갈본당은 북수동본당에서 분리된 지동본당을 모본당으로 두고 있다. 북수동본당이 용인 서북부지역을 관할하게 된 것이 1930년 하우현, 압고지본당 폐쇄 이후라는 점에서 볼 때 기흥, 수지지구 본당들의 연원을 손골 공소를 중심으로 조선후기와 개항기에 자리를 잡았던 공소·교우촌들에 둘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본당들에게는 전통적인 공소·교우촌의 신앙 유산을 현재에 되살리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다.

 

또한 현재 용인지역에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부친 김제준, 한이형 회장을 현양하는 은이·골배마실성지와 선교사 도리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현양하는 손골성지, 전통적인 한옥 경당의 변천을 잘 보여주는 고초골 공소가 천주교와 지역 향토문화의 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Ⅳ. 맺음말

 

초창기 경기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핵심은 남한강 인근의 양근, 여주, 광주, 이천 지역이었다. 광주, 이천 지역과 경계를 맞닿아 있는 용인지역에도 이른 시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박후재에 대한 증언과 신태보의 수기를 통해 적어도 1799년 이전부터 용인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1801년(신유) 교옥으로 조선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삶의 터전을 잃은 채 각지로 흩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이전까지 신자가 없었던 지역까지 천주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강 이남 경기지역(현재의 수원교구지역)에서는 1801년 이전 남한강 일대가 중심이 되었던 것과 달리 서울과 가까운 지역, 산골에 위치한 중부지역, 내포지역과 교류가 활발한 서남지역 등에 신앙공동체[교우촌]가 형성되었다. 이들 신앙공동체들은 1830년대 중반 선교사가 다시 입국하면서 공소가 되었고 1860년대까지 천주교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용인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확인되는 신앙공동체[교우촌]는 ‘양지 은이’와 ‘용인 굴암’이었다. 1810년대에서 1820년대에 걸쳐 은이와 굴암에 신자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고, 1830년대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적극적으로 사목활동을 하자 1830~1840년대에 양지 · 용인의 산골지역에 많은 공소(교우촌)가 자리 잡게 되었다. 1845년 말에는 김대건 신부가 은이 상뜸이로 내려와 1846년 부활절 전까지 주변지역 공소를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했다.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연관되어 은이 공소가 포졸의 습격을 받고 김대건 신부와 한이형 회장이 순교했지만, 그후에도 선교사들은 지속적으로 용인지역을 사목방문 했다. 지리적으로 양지 · 용인 산골지역과 가깝고, 1860년대 경기 남부지역 전담 선교사들의 거점이 된 미리내를 중심으로 그 인근지역에도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50년대 이후 용인 서북부 지역에 위치한 손골은 갓 조선에 입국한 신임 선교사들이 몇 달 간 머물면서 조선말과 조선풍습을 익히고 사목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는 곳이 되었다. 또한 1866년부터 1873년에 걸친 교옥 중에 용인 출신이거나 용인에 거주했던 신자들이 서울이나 수원부, 광주, 죽산, 남양 등지로 끌려가 순교했다.

 

병인교옥 이전에 형성된 용인 신앙공동체를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크게 네 지역이 구심점 역할을 했다. 양지면 남곡리와 대대리 지역[예전 양지현], 이동읍 묵리와 서리 지역[예전 용인현], 미리내와 가까운 원삼면의 학일리와 사암리 지역[예전 죽산도호부], 서울 · 광주와 가까운 수지구 동천동[용인 서북부]이 용인 신앙공동체의 중심 지역이었다.

 

1876년 선교사의 재입국과 1886년 조불조약 체결을 계기로 유서 깊은 교우촌[공소]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재건되었다. 용인지역에서도 양지 배마실과 용인 더욱골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재건되고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이후 용인 지역은 왕림본당(1888년 신설)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용인 수지·기흥구 지역, 처인구 동부동, 양지면, 이동읍, 원삼면, 남사면 지역에서 공소가 신설되었다. 여기에는 은이, 한덕골, 손골 같이 병인교옥 이전부터 확인되는 신앙공동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소가 증가하고 교세가 확장되면서 왕림본당에서 미리내본당(1896년)과 하우현본당(1900년)이 분리 신설되었고, 모현면 · 포곡읍 이하 용인 남부 지역은 미리내본당으로, 서북부 지역은 하우현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1913년에는 미리내본당에서 분리된 압고지본당이 모현면 · 포곡읍 지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최초의 용인 지역 본당이 되었다.

 

1920년대 이래 일제의 종교통제와 경제정책으로 산골 교우촌이 쇠락하면서 용인지역의 교세가 약화되었지만, 양지면 지역은 신앙공동체를 잘 유지하면서 본당 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7년 양지본당이 설정되면서 용인 양지면 일대와 원삼·이동읍 일부지역, 이천지역 공소가 미리내본당에서 분리되었다. 1930년 압고지본당과 하우현본당이 폐쇄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양지본당과 북수동본당에 편입되었고, 이후 두 본당은 한강 이남 경기지역[현재 수원교구지역]에서 가장 교세가 큰 본당으로 성장했다.

 

1945년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천주교회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용인지역에서도 장래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용인본당(1959년)이 신설되었다. 1963년 수원교구 설정으로 용인지역은 수원교구에 편입되었고 1964년 사제의 부족으로 천리본당(1960년 신설)과 백암본당(1962년 신설)이 폐지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양지본당과 용인본당은 농촌 발전과 전교 활동에 나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90년대 이래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외부에서 신자들이 많이 유입되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지역사회에서 천주교를 전파하고 본당을 신설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18년 현재 용인지역에 3개 지구, 25개 본당이 자리잡고 있고, 수원지역 일부와 관할 영역을 함께 영통지구의 본당까지 합치면 모두 30개가 된다.

 

동시에 용인지역 천주교는 조선후기 이래 이어져 오는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용인지역에서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부친 김제준, 한이형 회장을 현양하는 은이·골배마실성지와 선교사 도리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현양하는 손골성지, 전통적인 한옥 경당의 변천을 잘 보여주는 고초골 공소가 천주교와 지역 향토문화의 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용인지역에 신앙공동체가 뿌리내리기까지 온갖 우여곡절과 시련이 있었지만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노력으로 신앙의 터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 신앙의 유산과 유적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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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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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용인시 지역은 조선 후기 당시 용인현과 양지현, 죽산도호부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즉 현재 용인시 지역 중 양지면과 동부동 일부[이상 양지현], 백암면, 원삼면 지역[이상 죽산도호부, 일부는 양지현에 소속]은 조선시대에는 양지현과 죽산도호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1895년에 현과 도호부가 일괄적으로 군으로 바뀌었고,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양지와 죽산이 해체되면서 일부 지역이 용인군으로 통폐합되었다.

 

2) 공소는 본당 사제가 상주(常住)하지 않는 작은 교회[신앙공동체]를 말한다. (사제의 숫자가 부족한) 선교 지역에서는 본당 신부가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자기 본당 구역내 교우촌을 찾아가 교리를 가르치며 성사(聖事)를 거행하고 미사를 봉헌한다.[봄 · 가을 판공] 그때 신자들이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일정한 장소[주로 회장이 살던 집]에 모이게 되는데 그 집을 ‘공소’라고 불렀다. 한국천주교회는 1980년대 중반까지 공소의 비중이 높았고, 교회조직도 교구 → 지구 → 본당 → 공소 순으로 되어 있었다.

 

3) 조성희 편저, 《용인천주교회사》, 용인천주교회사편찬위원회, 1981. ; 용인성당50년사 편찬위원회, 《용인성당 5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용인대리구 용인성당, 2013.

 

4) 차기진, 〈용인 일대의 교우촌과 공소〉 1~2, 《교회와 역사》 193~19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한종오, 〈순교자 출생지 ‘함박이’와 은거처 ‘싯골’ 그리고 그 후손에 관한 연구(2)〉, 《교회와 역사》 28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5) 용인군지편찬위원회, 《용인군지(龍仁郡誌)》, 용인군, 1990. ; 용인시사편찬위원회, 《용인시사(龍仁市史) Ⅰ 역사와 문화유산Ⅰ》, 용인시편찬위원회, 2006. ; 《용인시사(龍仁市史) Ⅵ 현대사회Ⅱ》, 용인시편찬위원회. 2006년도 용인시사는 총8권으로 간행되었는데 천주교 관련 내용은 1권 역사 부분과 6권 중 종교 부분에 실려 있다.

 

6) 용인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에서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9종의 읍면지를 편찬했다. 기흥읍지(2000년), 양지면지(2001년), 수지읍지(2002년), 모현면지(2003년), 원삼면지(2005년), 포곡면지(2005년), 백암면지(2006년), 이동면지(2007년), 남사면지(2008년)가 그것이다.

 

7) 이원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한국사 35 조선 후기의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1998, 101~102쪽.

 

8) 이벽은 먼저 서울의 중인계층에 속하는 의관과 역관들에게 복음을 전파했고, 이어 음력 4월에 경기도 광주 마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정약전 · 정약용 형제에게 천주교 교리를 상세히 설명해서 정씨 형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해 가을(9월)에는 양근 한강개의 안동권씨 가문을 찾아가서 천주교를 알렸다.

 

9) 내포는 ‘내륙의 포구’, 즉 서해로 연결된 물길로 배가 드나드는 고장이란 뜻이다. 지금의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인 서산, 예산, 홍성, 태안, 당진 전 지역과 아산, 보령 일부지역이다.

 

10) 초창기 조선천주교회 지도자들은 1786년경부터 자발적인 교계제도를 조직하고 각종 성사(聖事)를 베풀었으나 몇 년 후 이것이 교회법에 어긋남을 알게 되자 중지했다.[가성직(假聖職)제도] 대신 북경천주교회와 접촉하여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사제의 파견을 요청했다. 1789년과 1790년 2차에 걸친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의 북경 방문으로 조선의 천주교공동체가 자생적으로 생겨난 사실이 중국교회는 물론 로마 교황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로마 교황청은 구베아 주교에게 개인적으로 조선천주교회를 맡김으로써 조선교회는 북경교구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이석재, 《중국천주교회와 조선 천주교회의 연계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학술정보(주), 2006, 106~107쪽.

한편 세계 천주교회(로마가톨릭)의 일원이 된 조선 천주교회는 교황청의 선교 방침, 특히 공자 존경 의식과 조상 제사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보유론’(補儒論)을 바탕으로 천주교와 유교를 겸행할 수 있다고 여겼던 양반층 신자들이 대거 탈락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중인층, 평민층 중심의 신앙공동체로 변모하게 되었다. 趙珖,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8, 82쪽 ; 이원순, 1998, 앞의 논문, 104쪽, 124쪽.

 

11) 1791년 겨울, 전라도 진산(현재 충청남도 금산)에서 양반 신자인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의 폐제분주(廢祭焚主,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태워 없앰) 사건[일명 ‘진산사건’]이 유학자들 사이에 거론되면서 마침내 최초의 공적인 천주교 옥사(1791년 ‘신해교옥’)가 일어났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참수형을 당했고,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천주교 지도자들도 대거 체포되었다. 결국 배교를 하고 풀려났지만 천주교 지도자들은 지속적으로 선교사 영입을 시도했고 그 결과 1794년 말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1795년 6월 27일(음력 5월 11일)에 체포령이 내려졌다. 다행히 미리 통보를 받은 주 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지만 신부를 피신시키고 집에 남아 있던 최인길(崔仁吉, 마티아)과 신부의 입국에 관여했던 윤유일과 지황(池潢, 사바스)은 다음날인 6월 28일에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전반적인 천주교 옥사로 번져 정쟁이 일어나는 것을 꺼려한 정승 채제공(蔡濟恭)과 국왕 정조(正祖)는 급히 윤유일, 지황, 최인길을 포도청에서 심문하고 그날 바로 매를 쳐서 죽였다. 이 사건과 연루되어 각지에서 신자의 체포와 심문이 이어졌고, 체포된 신자들은 배교를 함으로써 풀려날 수 있었다.

 

12) 1795년 사건 이후 주문모 신부는 안전을 위해 신자들과의 직접적 접촉을 최대한 자제했고 대신 각 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앙활동과 전교를 맡게 되었다.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주문모 신부와 교회지도자들은 힘을 합쳐 신앙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써서 1800년 무렵에는 1만 명의 신자를 헤아릴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수원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 수원교회사연구소,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천주교 수원교구, 2017, 60~61쪽.(이하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로 약칭함)

 

13)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판결 · 집형[사형 · 유배]한 옥사 사건을 가리킬 때 사옥(邪獄), 교난(敎難), 박해(迫害)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했던 정부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사옥’이나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천주교회 측의 ‘박해’ 개념[선악 이분법. 피해자-가해자 구도]은 객관적인 역사용어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좀 더 가치중립적인 ‘교난’이란 용어[趙珖, 1988, 앞의 책]도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는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천주교 옥사라는 의미가 반영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금압 정책(법령)에 따라 정부가 천주교에 대해 공식적으로 처리한 옥사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교옥(敎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李能和, 《朝鮮基督敎及外交史》, 新韓書林, 1928(1968년 복인본)에는 서교옥(西敎獄, 서양종교의 옥사)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14) 수원교회사연구소 판독역주,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천주교 수원교구, 2011, 385~387쪽. 29회차[2권 12상~12하] 백 안나의 증언(1883년 6월 12일) 참조. 증언자 백 안나는 박후재의 아내였다.

 

15) 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사 비망기(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214~217. ; 조현범,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80〉, 《교회와 역사》 435, 2011.8, 6~9쪽.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81〉, 《교회와 역사》 436, 2011.9, 4~9쪽.

 

16) 용인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 가족들은 1801년 이전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들이 성사를 받았던 지역이 용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17) 다블뤼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ff.78~79)에 의하면, 신태보는 이천 동산밑[현재 이천시 호법면 동산리]에 사는 양반집 출신이었고, 1791년에 입교한 이후 1801년까지 친척인 이여진 요한[1833년에 은이에서 사망]과 함께 서울을 여러 차례 왕복했다.(다블뤼 주교,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123쪽).

 

18) 한국교회사 학계에서는 천주교가 금지되고 탄압을 받던 시기에 형성된 교우촌[공소]의 전형을 ‘산골[산간] 교우촌’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연구가 진전되면서 신앙공동체가 산골만이 아니라 도심지와 평야지대에도 적지 않게 분포되어 있었고 생업도 다양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서울과 개성과 같은 도심지에서 신자들은 수공업, 상업, 임노동자, 뱃사공, 군졸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라는 특성상 점조직으로 비밀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심지의 인근 지역에도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데 경기 고양이나 하남 구산 같은 지역이 대표적이다. 반면 초창기부터 가족, 마을 단위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내포 지역은 지속적인 탄압으로 신자들의 출입이 많기는 했지만 1860년대까지 천주교 교세가 강했던 곳이다. 이곳은 평야에 위치했고 논농사를 위주로 생업을 유지했으며, 인근의 경기 화성, 충청 내륙(공주), 전라북도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다. 산골 교우촌도 입지조건에 따라 밭농사(특히 담배농사)를 위주로 하는 곳, 옹기 가마를 중심으로 형성된 곳[옹기제작용 흙과 땔감이 풍부한 지역], 숯을 굽는 곳[숯막, 임시 처소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됨] 등이 있었다. 토질의 하락과 옹기 재료의 소진으로 몇 년 거주 후 딴 곳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신자들의 노력으로 상주하는 마을로 정착한 곳도 있었다. 서울과 가까운 산골 지역에 자리잡은 교우촌[공소]들은 용인 산골 신앙공동체와 유사하다고 보여진다. 이들 지역은 서울과 교류가 활발하고 선교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1860년대 이전 신앙공동체는 크게 도심지[인근]와 지방, 지방에서는 평야지대와 산골지대로 나뉘며, 산골지대 중에서도 서울 인근 지역의 특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차기진, 〈교우촌의 형성과 신앙 생활〉, 《교회와 역사》 246,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2~9쪽 ;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99~126쪽 ; 이석원, 《19세기 동서양 충돌과 조선 천주교》,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166~168쪽.

 

19) 방상근, 〈수리산 공소와 최양업 신부〉, 《한국사회와 천주교》, 흐름, 2007, 112~118쪽.

 

20) 베르뇌 주교가 1863년 2월 20일에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서한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베르뇌 주교 서한집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377쪽.

 

21) 당시 천주교회의 거점인 서울과의 교류가 비교적 수월하다는 점이 용인지역에 신앙공동체가 자리 잡게 된 배경 중 하나이다. 아래에 언급했듯이 1830년대 서울의 회장[박종원, 현석문]이 은이로 내려와 교리 교육을 했다는 점이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22) 이석원, 〈수리산 교우촌(공소)의 변화 과정과 역사적 의의 - 서울 인근 ‘산골 교우촌’의 한 유형으로서 -〉, 《교회사학》 6, 수원교회사연구소, 2009, 50~51쪽, 60쪽. 아래에 언급했듯이 지방[충청, 전라, 경상]에서 사목하던 선교사가 서울을 왕복할 때 용인지역을 거쳐 가면서 신자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23) 신자들의 증언에는 은이, 응이, 어니, 어은이로 나오고, 관찬기록인 《좌포도청등록》 ‘조사현(曺士賢) 공초’[영인본 449쪽]에는 언리(彦里)로 나온다. 또한 《팔도군현지도》(정조연간)와 《대동여지도》(김정호, 1861년 간행)에는 어은산(御隱山)이 나오는데 여기서 마을 이름 어은리(御隱里)가 나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24) 《우포도청등록》, 1868년 4월 18일, ‘장치선[49세] 공초’[영인본 704~706쪽]. 한편 장주기[1803년생]가 20세[1822년경] 또는 26세[1828년경] 때에 위독한 병에 걸려 양지에 사는 최용린이라는 신자에게 대세를 받았다고 한다. 〈칼레 신부가 1867년에 작성한 장주기 요셉의 순교 보고서〉(A-MEP, Vol. 579, f.1236) 여기서 언급된 양지가 구체적으로 양지 은이 마을일 가능성이 있다.

 

25) 오 바실리오는 목천(木川) 씨아골[현재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 살던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그 뒤 여러 번 이사를 했는데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은이에서 사목할 때 만나 보았다고 했다.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17쪽, 329쪽. 69회차[3권 89상]와 70회차[3권 93상] 오 바실리오의 증언(1884년 4월 23일과 24일)

 

26) 다블뤼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f.20)에 의하면, 덕산 출신으로 은이 공소회장이었던 한이형 라우렌시오[1799년경 출생]가 21세 때[1819년경] 신자와 결혼하여 산으로 이주해 살았는데 외진 곳이었는데도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고 한다.(다블뤼 주교,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37쪽) 한이형이 이주한 산에 대해 양지 은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韓國天主敎會史》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128쪽, 각주 23번)[이하 ‘《달레교회사》’로 약칭함] 한이형이 결혼 후 이주한 곳이 ‘은이’가 맞다면, 은이 교우촌의 형성 시기는 1819년 이전으로 소급할 수 있다.

 

27) 《달레교회사》 중, 46쪽에는 1830년으로 나온다. 달레의 원본에 해당되는 《다블뤼 비망기》(f.226)에는 1833년으로 나와 있고 지명은 Eugi(윽이)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다블뤼 주교의 원본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확인할 수는 없으나, 필사본에 나온 Eugi(윽이)는 응이(Eungi)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28)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29쪽. 70회차[3권 93하] 오 바실리오의 증언(1884년 4월 24일) 참조.

 

29)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21쪽. 69회차[3권 90하] 오 바실리오의 증언(1884년 4월 23일) 참조.

 

30) 조현범, 〈모방 신부의 조선 선교〉, 《교회사연구》 2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21쪽 ; 방상근, 2007, 앞의 논문, 115쪽 ;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67~68쪽. 이 서한에 언급된 교세[지명과 수치]는 체계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짐작에 의존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특히 군현 이름과 마을 이름이 혼재되어 있고, 모방 신부가 조선 신자에게 들은 지명을 알파벳으로 바로 표기했기 때문에 정확한 지명 비정이 어렵다.

 

31) 통설에 의하면,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부모를 따라 1827년경 한덕동으로 이주했고, 골배마실에 거주할 때인 1836년에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김대건 신부 연보’, 19쪽 ; 하성래, 〈성 김대건 신부와 굴암 및 은이 – 그 주변 교우촌들〉,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186~187쪽.

 

32) 다블뤼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f.21)에 의하면, 주교가 한이형을 회장으로 임명했다고 나오는데 어느 주교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역주본), 38쪽. 반면 달레 신부는 ‘앵베르 주교’가 한이형을 회장으로 임명했다고 명기했다. 《달레교회사》 하권, 129쪽.

 

33) 앵베르 주교의 지방 사목 순회는 단 한 차례로 1838년 12월 21일~1839년 1월 30일에 이루어졌다. 최초 방문지인 수리산[12월 21일 방문]과 최후 방문지인 갓등이[1월 25일 방문] 사이에 은이를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4) 흉년이 든 기해년(1839)에 한이형이 사정이 어려워 굶주리던 과부 가족을 1년 이상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03쪽. 68회차[3권 85상] 임 루치아의 증언(1884년 4월 21일) 참조.

 

35) 최인서 회장은 1866년에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1867년 귀국했고, 1868년 4월(음력)에 체포되어 7월 11일(음력 5월 22일)에 강화도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36) 교회측 기록[《치명일기》(36번)와 《박순집증언록》(1권, 29하)]에는 나이가 58세로 나오는데, 관찬 기록인 《우포도청등록》 무진년(1868) 4월 29일 ‘최인서 공초’[영인본 706쪽]에는 50세로 나온다. 관측 기록에 따르면 1819년생이 되고 교회측 기록에 의하면 1811년생이 된다.

 

37) 모방 신부의 1836년 4월 4일자 서한에는, 유방제 신부가 그해 사순절 시작 무렵에 ‘굴암’(kouran)으로 가서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려 했다고 나온다. 유방제 신부가 실제로 방문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38)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775쪽. 99회차[5권 63하~64상] 최 베드로의 증언(1886년 11월 2일)

 

39) ‘은이 상뜸이’는 은이의 윗마을을 뜻하는데, 통설에서는 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골배마실을 가리킨다.

 

40)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01~303쪽. 68회차[3권 84상~84하] 임 루치아의 증언(1884년 4월 21일)

 

41) 김대건 신부가 방문한 ‘용인’ 공소가 굴암 회가마골[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223쪽. 62회차[3권 55하] 김 도로테아의 증언(1884년 3월 20일)

 

42)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93쪽.

 

43)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페레올 주교는 용인 산의실[현재 지명 불명]을 방문하여 심능석(沈能錫, 스테파노)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했고, 1849년에는 다블뤼 신부가 은이를 방문하여 조사현(안드레아)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44) 베르뇌 주교가 구획한 8개 지역 중 ‘성모취결례’ 구역이다.

 

45) 1863년경 리델 신부가 양지 은이에 사는 서여심(徐汝心)의 집에서 서군집(徐君集)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했다. 당시 은이는 리델 신부의 관할구역[공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내륙과 전라도 지역]은 아니었고, 리델 신부가 서울 등의 다른 지역으로 왕래할 때 은이를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좌포도청등록》 1868년 윤4월 7일 ‘서군집 공초’[영인본 452쪽]

 

46) 오메트르 신부는 1864년 12월 양지 응다라니에서 서한을 작성했고, 1865년 11월에는 용인 소내실[현재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금어리], 양지 무량골과 사기점[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 등에서 서한을 작성했다. 이석원, 〈미리내 본당의 변모와 역사적 의의〉,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240쪽.

 

47) 미리내 지역은 선교사들이 은거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서북쪽으로 용인시 이동읍 지역, 북쪽으로 용인시 양지면 지역을 거쳐 광주 도척면 지역, 동북쪽으로 용인시 원삼면을 거쳐 이천시 호법면 · 마장면 지역, 남쪽으로 안성시 · 평택시 일대까지 연결되는 사목활동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48) 미리내와 그 인근 지역 공소에 대해서는 이석원, 2008, 앞의 논문 참조할 것.

 

49)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79~80쪽.

 

50)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블뤼 신부는 다시 사목방문을 시작하겠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당시 신부가 여름을 손골에서 보내면서 휴식을 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소연 역,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179~190쪽.

 

51) 다블뤼 신부는 1851년 11월부터 1853년 여름까지 조선인 신학생 교육을 전담하고 있었는데, 1850~1851년 무렵 손골에 머물면서 예비 신학교를 운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청주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양업교회사연구소, 《청주교구 50년사》 1, 천주교 청주교구, 2013, 124~133쪽 참조.

 

52) 병인교옥 시기 용인지역과 관련된 순교자에 대해서는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131~164쪽의 내용을 정리하여 도표화했다.

 

53) 용인 지역의 신자 체포지 중 양지 은이와 응다라니는 여러 차례 포졸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가족이나 이웃 단위로 많은 신자가 체포되어 순교했다.

 

54) 소내실[현재 포곡읍 금어리]은 행정구역상 예전 용인현에 속하지만 양지면에 가까운 지역이다.

 

55) 1876년 조선에 입국한 블랑 신부는 1883년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1884년 제7대 조선대목구장이 되어 1890년 병사할 때까지 재직했다.

 

56) 블랑 신부가 서울에서 리델 주교에게 보낸 1876년 10월 10일자 서한(A-MEP, Vol. 580, f.154) 참조.

 

57) 《우포도청등록》 1878년 1월 10일 ‘이선일 공초’[영인본 797~798쪽] ; 같은 책 1878년 1월 27일 ‘이큰아기, 이어린년 공초’ [영인본 799쪽], 같은 책 1879년 4월 1일 ‘이병교 공초’[영인본 837쪽] 참조.

 

58) 우명동에 살던 이석교, 이선일, 이덕순은 리델 주교와 관련하여 1878년 초에 서울 우포도청으로 잡혀갔고, 1879년에는 용인 한터에 살다가 드게트 신부와 함께 공주로 이주했던 이부여도 체포되었다.

 

59) 당시 선교사들은 매년 부활 축일을 지낸 다음 4월 중순 이후에 자신의 사목활동을 보고하는 ‘연말보고서’와 함께 교세통계표를 작성하여 주교(대목구장)에게 제출했다. 따라서 통계작성의 기준일자는 전년 5월 1일부터 당년 5월 1일까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세통계표의 제목도 ‘1881~1882년 교세통계’식으로 되어 있다. 《본당별 교세통계표》, 서울 경기지역1 : 1882~1911년, 서울 경기지역2 : 1911~1924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 참조.

 

60) 용인지역이 포함된 서울대목구의 교세통계표(공소별 통계)는 1881~1882년도부터 1936년도까지 남아 있으나 그중 1904~1909년, 1924~1929년까지 통계표는 누락되어 있다.

 

61) 1866년 교옥 이후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피신해야 했던 신자들은 대개 옹기를 구워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 선교사의 재입국과 신앙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상황 속에서 점차 논과 밭농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62) 블랑 주교가 서울에서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86년 8월 1일자 서한(A-MEP, Vol. 580, ff.1444~1445) 참조. 더우골 공소의 1885~1886년도 통계에는 신자 수가 45명이었는데, 다음 해인 1886~1887년도 통계에는 배가 넘는 94명으로 증가했다.

 

63) 1888년 왕림본당 신설 이전까지 용인지역에서 확인되는 공소는 배마실, 더욱골 외에 능안(현재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부개울(현재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 도사리(현재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삼계리)가 있다. 다만 능안, 부개울, 도사리 공소는 안정적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몇 년만에 통계표에서 사라졌다. 이후 도사리 공소는 1898년에 부활했다.

 

64) 현재 수원교구 지역에 해당하는 한강 이남 경기지역에서는 1881~1882년도에 132명(6개 공소)의 신자 수가 확인되고 6년 후인 1887~1888년도에는 신자 수가 1,463명(28개 공소)으로 크게 늘어났다.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178~180쪽, (표) 1881~1888년 ‘수원교구지역’ 사목방문 공소와 신자 수[선교사] 참조.

 

65) 코스트 신부가 작성한 앙드레 신부의 부고(1890년 4월 21일 서울) A-MEP, Vol. 581, ff.481~488.

 

66) 이석원, 2008, 앞의 논문, 244~247쪽.

 

67) 천주교 명동교회 편, 《뮈텔 주교 일기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75쪽, 1896년 5월 20일자 참조.

 

68) 이석원, 2008, 앞의 논문, 240~241쪽.

 

69) 미리내본당은 1896년 설정 당시 1,821명의 신자가 있었는데 1904년에는 2,607명으로 늘어났다. 공소는 32개에서 35개로 늘어났다.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188쪽.

 

70) 본당 관할구역에서 볼 때 미리내본당은 최남단에 위치했고, 관할구역 중앙에 위치한 은이로 본당을 옮길 경우 모든 공소가 본당 50리 이내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강도영 신부는 성당 건립을 위한 비용을 모금하기도 했는데 적당한 집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차기진, 〈강도영 신부와 김대건 신부 현양〉,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216쪽.

 

71) 강도영 신부는 자신이 전부터 본당 분할을 건의했다면서 1906년 당시 신자가 2,800명 이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도영 신부의 1906년 2월 2일자 서한[뮈텔 주교 문서 1906-41] ; 최승룡 신부 판독 · 번역,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 천주교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 2016, 93쪽.

 

72) 차기진, 2008, 앞의 논문, 216~217쪽.

 

73) ‘수원교구지역’은 1920년대 전반부터 지속적으로 교세가 줄어들다가 1930년대에 겨우 만회할 수 있었다. 1910~1920년대 20년 기간을 통틀어 교세는 900명 증가에 그쳤다.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234쪽.

 

74) 정규량 신부의 1922년 5월 25일자 서한에 의하면, 20년 전에는 땅이 비옥했지만 지금은 3분 1밖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그에 비해 먹는 것은 3배가 늘었다고 한다. 안학만 신부의 1928년 5월 1일자 보고서에 의하면, 본당 인근지역 신자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데, 매년 신자들이 생계를 위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때문이었다.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286쪽.

 

75) 제2대 주임 안학만 신부가 1929년,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성무집행을 정지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압고지본당의 사목활동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76) 라리보 주교의 1928년도 보고에 의하면, 주교는 경기도 순회 당시 남곡리를 방문한 다음 “여기가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의 옛 본당이었습니다. 이곳 공소에는 상당히 국한된 반경(半徑)에 신자가 상당히 많으며, 열심에 가득 차 있고, 사제의 정착을 위해 그들의 활동과 애긍으로 사제를 즐겨 도우며 신부에 대해 헌신적입니다.” 라고 평가했다. 韓國敎會史硏究所, 《서울敎區年譜 Ⅱ》, 天主敎 明洞敎會, 1987, 232~233쪽.

 

77) 정식 본당 승격은 1928년이지만 초대 주임 박동헌 신부가 주재하기 시작한 시기가 1927년이므로 양지본당의 신설 연도를 관례적으로 1927년으로 보아 왔다. 은이 지역에는 신자들이 본당 부지로 매입한 토지[800평]가 있었으나 산골보다는 교통이 편리하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벌터 지역에 성당을 건립하기로 했다. 박동헌 신부는 부임 직후 은이 공소의 강당 건물을 헐어 벌터에 16칸 목조성당을 건립했다. 《용인천주교회사》, 159쪽.

 

78) 조선총독부의 〈관보〉에 의하면, 1928년 6월 1일자로 ‛남곡천주당(남곡리본당) 담임[주임] 박동헌’이 신고되어 있다.

 

79) 벌터에 본당이 건립되면서 기존의 배마실과 은이, 별미 공소가 폐쇄됨에 따라 신자들이 주일마다 성당에 와서 미사에 참례하게 되었다.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292쪽.

 

80) 《용인성당 50년사》, 76~77쪽.

 

81) 이천본당 70년사 편찬위원회, 《이천본당 7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이천성당, 2012, 134~138쪽.

 

82)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295쪽. ; 《이천본당 70년사》, 139~145쪽.

 

83) 용인시 모현읍에 속해 있지만 거리상 수지 · 기흥구와 가까운 오산소 공소도 북수동본당의 관할에 속해 있었다.

 

84) 《경향잡지》 41권 991호(1947년 10월호), 153쪽.

 

85)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370쪽.

 

86) 1956년 4월 5일에 ‘용인성당 신축기성회’를 구성했으며 양지본당 주임 조인환 신부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그해 김량장동에 부지를 매입했다. 1957년 7월 2일에 성당과 사제관을 기공하고 1958년 12월 3일, 성당 봉헌식을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거행했. 이듬해 조인환 신부가 용인본당의 초대주임으로 부임했다. 《경향잡지》 51권 1090호(1959년 1월호), 32쪽 ; 《용인성당 50년사》, 76~77쪽.

 

87) 수원교구 설정 이후 골배마실은 미리내성지와 함께 교구차원의 김대건 신부 현양대회와 성지순례가 이루어지는 성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경향잡지》 54권 1132호(1962년 7월호), 359쪽.

 

88) 1961년 3월, 제2대 용인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김효신 신부는 지역사회 개발과 전교활동을 결합한 사회사업에 매진했다. ‘미국가톨릭복지위원회’(NCWC) 산하 ‘가톨릭구제회’(CRS)에서 특별지원을 받은 구호물자로 난민을 구하고, 성모병원 의사 세 명과 간호원 다섯 명으로 구성된 의료진을 초청하여 5년간 매월 1회 무의촌을 순회하면서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1962년에는 본당 가톨릭청년회와 함께 용인지역 마을에 물레방아식 발전기를 설치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이러한 사회사업은 수원교구 설정 이후에도 이어져 집 없는 신자들을 위한 주택 건설사업이 추진되었다. 이는 용인본당의 위상을 높이고 교세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372~373쪽.

 

89) 용인지역 본당들의 관할구역과 공소는 〈천주교 서울교구 경기도 내 본당 및 공소 일람표〉(1961.6.30)에 근거했다. 1961년 공소일람표에는 백암본당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데, 양지본당 관할구역 중 백암면 지역 공소들이 1962년에 신설된 백암본당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90) 정행만 신부가 김남수 교구장의 허락을 받고 미리내에 부임하여 1976년 9월 24일에 천주성삼 성직수도회를 설립한 것을 계기로 그해 10월 12일, 미리내는 준본당으로 부활하고 정행만 신부가 본당신부로 임명되었다.

 

91) 이후 1997년에 용인본당에서 ‘천리본당’이 분리 신설되었고, 2003년 9월에 양지본당에서 백암본당이 분리 신설되었다.

 

92) 수원교구 설정 이후 교구 차원에서 미리내성지를 순교신심 함양과 순교자 현양운동의 중심지로 격상시켰다. 교구가 주도하는 현양대회와 성지순례에 교구 성직자와 신자뿐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성직자와 신자가 참여하여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성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93) 1980년대에 파티마의성모프란치스코수녀회에 의해 성지 개발사업이 진척되었고 1990년대에 와서 경당을 짓고 새로운 현양비를 세우는 등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이루어졌다. 2005년 9월 23일에는 성지 전담 신부가 파견되었다.

 

94) 1976년 4월 22일부터 4월 23일까지 용인 양지면 대대리 음다라니[응다라니]에서 무명순교자 무덤을 발굴했는데 발굴된 유해 11기는 4월 24일 미리내로 이장되었다. 1976년 6월 24일에도 음다라니와 용인 이동읍 묵리 한덕골에서 각 1기의 무덤이 발굴되었고, 그해 12월 17일에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시봉골[서봉골]에 위치한 4기의 무덤이 발굴되어 총 6기의 유해가 미리내로 옮겨졌다. 이로써 미리내에는 모두 17기의 무명순교자 묘역이 조성되었다. 이후 묵리 한덕골에 안장된 유해는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12월 21일 순교장소인 대구 관덕정으로 옮겨졌다. 《수원교구 50년사 Ⅰ. 교구사》, 531~532쪽.

 

95) 《가톨릭신문》 2061호(1997.7.13.), 2면.

 

96) 《수원주보》 1702호(2016.10.2.) 6쪽.

 

97) 문화재청 고시 제2018-30호(용인 고초골 공소 등 2건 문화재 등록 예고)

 

* 이 논문은 2018년 7월 13일 용인시 문화예술원에서 용인시와 한국문화유산 연구센터가 주최한 ‘용인 천주교 유적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 보완한 것이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14, 2017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47022&Page=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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