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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연구 불모지 일군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최석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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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1-28 ㅣ No.157

과거는 미래를 여는 열쇠

 

 

"가톨릭 교회는 과거와 전통이 현재의 대부분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다른 어떤 존재보다 '역사적'이지요. 과거에서 현재의 의미를 찾는 노력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한국교회의 원로 사제이자 한국 천주교회사의 토대를 구축한 성농(誠農) 최석우신부(안드레아, 79,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사제 생활 50년의 대부분을 한국교회, 그 고난과 역경의 역사를 더듬어온 집념의 학자이다.

 

"과거의 잘못도 엄연한 역사입니다. 연대성과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과거의 과오까지 떠맡아 보속할 때 현재가 의미를 갖고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이자 사제로서 최신부에게 과거는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현재를 이루는 토양이며 미래를 여는 열쇠이다. 최석우 신부는 특별히 자료수집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강조하고 그것을 학문적 탐구의 가장 중요한 토대로 삼아왔다.

 

지금까지도 역사 의식이 희박한 한국교회가 당시 역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각종 사료들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최신부의 사료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이미 교회사를 공부하던 유학 시절부터 다져진 것이다. 루뱅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1955년 독일 본 대학에서 만난 예딘(H. Jedin) 교수의 지도가 그 바탕을 이뤘다.

 

예딘 교수의 권고대로 그는 교황청 포교성성,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한국교회사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들을 발굴하고 수집했다.

 

최신부는 이 기회를 "원사료의 소중함과 그에 따른 올바른 교회사 연구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철저한 사료 발굴 노력을 바탕으로 최신부는 1959년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의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했다. 이 논문은 새로 발굴한 원사료에 근거했다는 점, 그리고 이용한 사료들의 풍부함으로 좬새로운 선교사 중에서 첫 자리를 차지할 저서" 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원사료에 대한 이러한 자세를 바탕으로 후일 한국교회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던 교회사 관련 사료들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업적을 이뤘고 특히 주교관 지하실에 남아있던 뮈텔문서를 발견하고 편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소명이란 이런 것"

 

최석우 신부는 교회사 연구에 몸담게 된 것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했다고 말한다.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부산 영도의 임시 대신학교에서 성서강의를 하던 선종완 신부님께서 대뜸 유학을 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사를 전공할 것과 이를 위해 루뱅 대학교로 가라고 구체적으로 지시를 했지요.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혹감 속에서도 '소명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였으며 훗날 자신이 교회사 연구를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스승 신부의 은덕'이라고 대답해왔다.

 

최신부는 그래서 1953년 12월 루뱅대학에 도착했다. 55년 6월 석사학위를 마친 최신부는 독일의 본 대학으로 옮겨 평생의 스승 예딘 교수 밑에서 박사 학위를 준비했고 57년 1월부터 강의를 듣기 시작해 61년 학위 논문의 출판과 함께 박사 학위를 받는다.

 

 

교회사연구소 창립

 

그해 말 귀국하자마자 대신학교에서 교회사 강의를 시작한 최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창립 300주년이 되는 64년 한국교회사 연구의 한 전기가 되는 사건을 맞는다. 역사학자인 이원순 교수를 만나 기념행사를 논의하던 최신부는 한국교회사의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제안에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즉시 노기남 주교에게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고 흔쾌히 허락한 노주교는 8월 17일자 공문을 통해 창립을 공식 승인했다. 올해 창립 35주년을 맞은 한국교회사연구소는 그야말로 한국교회의 교회사 연구에 있어 엄청난 업적을 이룬 젖줄이었다.

 

"연구소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뭐니 해도 자료 수집이지요. 자료를 발굴하고 수집하고 해독해 자료집으로 간행하는 것이 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가들의 연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연구소가 64년 창립 기념으로 실시한 교회사 자료 전시회에는 204점이 전시됐는데 대부분이 주교관에 소장된 것들이었다. 66년에는 뮈텔 주교의 문서들이 발굴된다. 그해 교구 당국의 허락을 받고 연구소로 이관된 방대한 문서집은 뮈텔 주교가 1881년부터 1920년까지 수집한 것으로 서류함의 수만 100여 개였다. 교구장 문서이며 대부분이 원사료라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았다.

 

 

정처없이 떠돌던 세월

 

최신부는 67년 신학교를 떠나 절두산, 가회동, 명동, 삼각지 본당으로 그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니며 8년간의 세월을 허송(?)한다. 75년 은경축을 앞두고 74년 4월 가톨릭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그는 신학교를 떠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제생활 25년이라고 하지만 목자 생활이라고 해야 겨우 7년…적어도 양들에게 필요 불가결이라고 판단되는 봉사만큼은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연구 생활에 대한 나의 미련이랄까 그러한 것이 최소한의 봉사에 필요한 시간마저 할애하는데 인색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떠난 둘째 이유는 본당에서는 연구소가 필요한 재정적인 뒷받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75년 79위 복자 시복 50주년이자 사제 서품 25주년을 맞으면서 최신부는 비로소 교회사 연구라는 자신의 소명에 온전히 헌신하게 된다.

 

그해 5월 연구소를 전담하라는 발령을 받고 합정동의 30평 개인 주택으로 자리를 옮기고 바야흐로 연구소의 재출범이 시작됐다. 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해 광화문에 편찬실을 마련했다가 86년 12월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이 개관함에 따라 지금의 연구소 자리에 터전을 잡았다. 하지만 최신부는 지은지 수십년 돼 낡을대로 낡은 합정동 집에서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교회사에 대한 계몽

 

연구소가 합정동에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본격적인 공동 연구에 들어간다. 강습회와 월례발표회를 시작했고 '교회사연구회' 를 발족했다. 발표된 논문들은 '교회와 역사' 에 실렸다. '교회와 역사' 는 5월호로 통권 300호를 맞았다.

 

본격적인 학문적 탐구와 함께 신자들을 대상으로 교회사에 대한 계몽과 교육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내의 연구 기관은 일반 대학의 연구기관과 다릅니다. 연구 작업 자체가 하나의 사목에 속하기 때문에 계몽, 교육, 신심운동을 모두 포괄합니다. 객관적인 학문적 성과에 바탕을 두고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해나가자는 것입니다."

 

74년 가톨릭신문에 연재한 '순교혈사' 는 바로 이러한 신자 계몽의 가장 대표적인 역작이었다. 79위 순교 복자 전원의 생애와 신앙을 서술한 이 연재는 당시 일반 신자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관심과 호응을 얻어 신앙 선조들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순교신심을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연구소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 '한국가톨릭대사전' 역시 학술과 계몽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신부는 교회사의 대중화와 교회사 연구의 저변 확대를 강조한다.

 

"전에 비해서는 여건이 많이 개선됐지요. 연구소가 여럿 설립됐고 본당이나 교구에서 책들이 많이 나와요. 하지만 한국교회가 높은 역사 의식을 갖고 있다고 보기에는 아직 멀었어요."

 

 

현대 교회사에 관심

 

"이제는 현대 교회사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 수집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물론 현대사를 서술하는 작업은 아직 시기상조입니다. 하지만 하나라도 자료가 유실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현대 교회사 자료들을 수집해 정리하도록 서둘러야 합니다. 서두를수록 그만큼 성과도 클 것입니다."

 

최신부는 "교회 전통을 계승해 발전시키고 동시에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시켜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게 한다는 교회사의 사명감은 비단 연구소의 사명만은 아니고 한국교회 전체의 공동 과제" 라고 강조했다. [가톨릭신문, 2000년 5월 7일, 박영호 기자]

 

 

교회사 연구 불모지 일군 ‘농부’


새달 1일 금경축 축하미사 · 기념논총 봉정식 갖는 최석우 신부

 

 

평생을 하루같이 한길을 걸어왔다. 때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이 덮쳐 힘이 들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소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고 '고집쟁이'라고 부른다.

 

한국 교회사 연구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지난 1964년,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설립해 교회사 연구의 밑거름을 깔고 또 그 위에 확고한 체계를 마련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석우(78)신부. 지난 4월 15일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지낸 노 사제지만 그는 오늘도 '교회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부설로 설립돼 혜화동 신학교내에 있던 교회사 연구소를 합정동, 명동 가톨릭 회관 등으로 끌고 다니면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중단하지 않고 교회사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과 순교 성인의 도움 덕분입니다. 좀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연구소 설립 이후 36년간 교회사 연구 및 지원, 연구 자료 편찬·간행 등 교회사 연구 분야에 탁월한 성과를 올린 최 신부지만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할 정도로 교회사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남다르다.

 

“30년 전부터 연구소 운영자금을 마련할 생각으로 매주 복권을 구입했었지요. 그런데 최고로 많은 돈을 받은 것이 고작 1만원이야. 그래서 지난해부터 복권 구입을 그만두었지. 하느님께서 돈은 주시지 않고 그 대신 연구소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들을 보내 주셔서 그나마 지금껏 운영할 수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과 순교 성인의 도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회사 연구에 대한 최 신부의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스승 신부의 은덕'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난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났을 무렵,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 교수로 계시던 고 선종완 신부님이 불러서 갔더니 대뜸 '벨기에 루뱅대학에 가서 교회사를 공부하라'는 겁니다. 역사의 '역'자도 모르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뜻밖의 말이었지. 그러나 '이것이 소명이려니'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했고, 일생 동안 '스승' 때문에 교회사와 함께 살았네요.”

 

이때부터 교회사 연구에 뛰어든 최 신부는 루뱅대학과 독일 본대학을 거쳐 사제서품 11년 만인 지난 1961년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한국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였기에 무엇보다 먼저 우리 역사를 올바로 알고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최 신부는 이때 바티칸 고문서고, 유럽에 산재해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예수회·프란치스꼬회 본부의 문서고를 돌아다니며 한국교회사를 정립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들을 수집했고, 이것이 훗날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의 발판이 됐다.

 

“지금은 컴퓨터도 있고 사진기술도 개발돼 다행이지만 그 당시에는 문서고에 들어가 모든 것을 손으로 베껴 쓰고, 또 이를 타자로 쳐서 카드로 정리해야 했어.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것은 언어였어. 워낙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고문서들이라 이를 해독하려면 영어, 독어, 라틴어, 불어를 기본적으로 알아야 했지요.”

 

그래서 최 신부는 지금껏 영어, 독어, 불어, 라틴어, 일본어, 중국어 등 총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언어와 싸우고 역사 자료 수집에 시름하면서 10여년을 이국에서 보낸 뒤 1961년 귀국한 최 신부는 혜화동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소 설립을 준비한다.

 

“한국 교회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시키려면 연구 기관 설립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중 이원순(현 서울대 명예교수)씨가 이를 제안하기에 즉시 합의를 보고 설립을 추진했는데 당시 노기남 대주교도 기꺼이 동의해 1964년 가톨릭대내에 있는 가르멜수녀원 옛건물에 연구소를 세웠어요.”

 

그러나 연구소 운영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절두산 순교기념관장, 가회동·명동·삼각지 본당 주임까지 겸임해야 했던 최 신부는 1975년 합정동에 연구소 건물을 마련하기 전까지 연구소를 '끌고 다녀야' 했다.

 

“합정동 건물은 기껏해야 30여평밖에 안되는 개인 주택으로, 은퇴 사제를 위해 교구가 미리 사놓은 집이었지. 방 4개 중 가장 큰 공간을 연구 발표장으로 사용하고 나니 서고로 사용할 방이 없을 정도였어. 이때부터 연구소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지.”

 

지난 1986년부터는 연구소가 가톨릭회관으로 옮겨와 이제는 제 모습을 갖추었지만 최 신부는 아직도 비가 새는 낡은 합정동 집에 기거한다. 팔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전 11시면 지하철을 타고 가톨릭회관의 연구소를 찾아 오후 6시까지 교회사 연구에 몰두하는게 일과다. 최근 관절염으로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을 때도 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교회사에 대한 열정을 과시한다.

 

50여년 사제생활 동안 교회사 연구에 전념한 그가 큰 보람을 느꼈던 일은 무엇일까. 최 신부는 '뮈텔 문서'를 찾았던 일을 떠올렸다.

 

“제8대 조선교구장인 뮈텔 주교가 1881년부터 192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교회 안팎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한 것은 분명한데 그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웠었지. 그런데 1966년 당시 상서국장(문서담당)이던 김창석 신부에게 들렀는데 그 문서가 주교관 지하실에 있다는 거야. 얼마나 기뻤는지. 자칫 잘못했으면 이 시기에 대한 역사가 날아갈 뻔했지 뭐야.”

 

교회사 연구 원로이자 한국 교회사 연구의 체계를 형성한 최 신부는 교회사 연구 발전을 위한 사랑스런 고언도 잊지 않는다.

 

“역사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료 수집, 자료 비판, 자료 해석인데 현대사에 대한 자료 수집에 무관심한 현실이 안타까워. 또 전문가의 부족으로 제대로 된 사료 비판 작업이 미흡하다는 것과 객관적이지 못한 자료 해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문제예요. 교회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교회사의 사명감은 비단 연구소의 몫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공동 과제임을 인식하고, 보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성농(誠農)'이라는 아호처럼 평생 교회사 분야에 거름주고 물주는 성실한 농부로 살아온 최 신부의 삶이 아름다워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오는 6월 1일 오후 5시 명동 주교좌 성당에서 최 신부의 금경축 축하 미사와 함께 기념 논총 봉정식을 갖는다. [평화신문, 2000년 5월 28일, 박주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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