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통일사목] 한국 개신교의 북한선교, 그 평가와 전망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85

한국 개신교의 북한 선교, 그 평가와 전망

 

 

개신교가 민족 화해를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해 왔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경우, 민족 갈등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를 먼저 상정해야 할 것이다. 최근의 갈등은 물론 남북 분단과 전쟁에 따른 갈등 속에서 어떻게 남과 북을 화해시키려고 했는가 하는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민족 화해와 겨레의 하나 됨을 위한 개신교의 노력

 

1) 1885년부터 1910년까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온 1885년부터 1894년 사이 한반도에서는 농민들, 천민들, 소작인들의 민중 봉기가 있었다. 1862년 진주 민중 봉기로부터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적어도 93회의 민중 봉기가 일어났는데, 그 주요 원인은 정부의 부당한 착취 곧 세금 제도의 악용과 양반 계층들의 소작인들, 상민들, 천민들에 대한 사회 신분적 천대와 경제적인 착취이다. 개신교가 이런 사회적 약자들의 민중 봉기에 직접 관여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아마도 초기 개신교의 세력이 미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가 명성황후 살해를 비롯한 살상과 무력 시위, 허위 문서 조작 등으로 1910년 한반도를 합병할 때, 개신교 측에서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생겨났다. 상동 교회의 전덕기 목사, 이준 열사, 김구 등이 친일파 세력들과 투쟁하여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실패했고, 이동휘 등은 일본군과 직접적으로 전쟁하기 위해 만주에 군사 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 직접 항일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세력들은 주로 북한(조선)의 사회주의 혁명을 기치로 하는 사회주의적인 기독교인들과 연합하여 북한 정권을 형성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북한 기독교(조선 그리스도교 련맹)의 핵심을 이루게 되어 북한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과 결탁하는 세력이 발생하고, 상당한 정도의 남한 권력 핵심과 교회가 친일적인 집단과 혼합하거나 결합된 형태로 구성이 되면서, 친일 친자본주의, 친미적인 남한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는 일본에 직접 항거해서 순교하는 개신교들이 나타났다. 개신교의 많은 학교들은 신사 참배에 항거해서 문을 닫게 된다.

 

2)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친일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한 개신교 세력들이 발생했고, 또한 사회주의적으로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단이 생성되었다. 1928년 장로교 목사인 강량욱 목사는 김일성과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하고, 1946년 토지 개혁 위원회의 서기로 활동하였으며, 북한 부주석으로 나름대로 민족 화해를 목표로 일했다. 또한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던 감리교 신학교 교수 김창준 목사는 1948년의 월북 이후 북한 혁명에 참여하고, 최고 인민 위원회의 부위원장을 지냈다. 그들은 민족 모순과 갈등을 해소시키는 길을 로동당과 사회주의에서 찾으려 했다. 반면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한 신의주 제1장로 교회 윤하영 목사와 신의주 제2교회의 한경직 목사는 1945년 9월 기독교 사회 민주당을 세우고, 민족 문제를 사회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고, 공산주의는 반드시 독재를 필요로 한다고 전제하고, 결국 사회 민주주의를 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1950년의 전쟁 이후 사회 복지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고아원, 모자원(어머니와 자녀들만 남은 가정을 돌보는 시설) 운영으로 자본주의의 폐해에 도전하면서, 반공적인 입장을 세웠고, 5만 명이 출석하는 영락 교회를 형성하면서 91세로 소천했다. 윤하영 목사는 미군정 아래에서 충청북도 도지사를 하면서, 미군정이 분단 정책을 버리고 통일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으나, 미군 장성들은 그를 외면하고, 그의 설득은 실패했다. 그들이 반공과 사회 민주주의적인 교회 운동을 통해서 민족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신군부가 등장한 후 한경직 목사의 연령으로는 직접 현장에 참여하기 어려운 건강 상태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김화식 목사와 고한규 장로는 자유당을 조직하고, 자유 자본주의로 민족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으나, 김화식 목사는 공산당에 의해서 순교를 했다.

 

손정도 목사는 1945년 이전 만주에서 목회할 때, 자주 찾아온굶주린 한 독립군 김일성을 도왔으며, 김일성이 일본군 감옥에 갔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 간수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탈출을 성공시킨다. 이로써 그는 김일성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그는 서울 동대문 감리 교회와 정동 감리 교회의 목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손원일은 해군 제독으로 김일성과 전쟁을 했으나, 김일성은 손 목사의 아들 손원태 의사를 미국에서 초청하고, 그의 사후 김정일 현 국방 위원장은 1994년 8월 조문 기간에 손원태 의사의 생일 잔치를 평양에서 마련하고, 그 집안의 손자인 쌍용 회사 사장단을 1994년 12월에 초청한다. 남북의 냉전 구조를 녹여 내는 촉매 역할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손정도 목사가 한 것이다. 김일성은 사망 직전 1992년에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를 쓰면서 제2권 2장의 제목을 '손정도 목사'로 붙이고, 그의 은혜를 자세히 기록한다. 그리고 1988년 평양에 봉수 교회를, 1992년에 어머니 강반석의 신앙을 기념하는 칠골 교회(또는 반석 교회)를 세운다. 이 두 교회의 예배와 제도가 장로교 형식이라는 것을 필자는 방문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3) 1950년 이후-멸공 통일 교회

 

6 · 25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개신교는 막지 못했다. 개신교는 남쪽에서, 멸공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정동 교회 장로)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민족 화해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이승만 장로는 친일 기술 각료들과 친일 재벌들을 중용하고 친미 정권을 형성하면서, 친자본주의적인 정치를 구사하였고, 교회 통일 운동의 대부분은 이승만 노선에 포로가 되거나, 이에 자발적으로 지지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4) 1961년 박정희의 반공 국시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로 함으로써 민족 화해보다는 분단 고착화 입장을 취했고 개신교는 그를 지지하는 집단과 그를 반대하는 집단으로 갈라졌다. 1972년 7 · 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면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 따른 화해와 통일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화해의 이론적인 바탕은 7 · 4 공동 성명이 이루었으나 대부분의 개신 교회는 반공주의적이고 분단 지향적인 목회를 그대로 가지고 있음으로써 민족 화해와는 거리가 먼 입장에서 오히려 이를 강화시키기까지 하였다.

 

5) 미국으로 간 이승만 목사(현 미국 장로교 총회장)는 1978년경 평양을 방문하고, 그후 미국 장로교의 김인식 목사는 방문과 더불어 북한에 국수 공장을 세우고 밀가루 등을 공급하면서, 미국 교회가 분단의 책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성명을 1986년에 발표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 감리 교회의 함성국 목사 역시 1987년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식량 보내기를 하면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 제재와 북한 압박 정책을 제거하고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을 해 오고 있다.

 

6) 1983년 통일 위원회 구성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1983년 통일 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정부가 경찰을 동원해서 집회를 봉쇄함으로써 모이지를 못했다. 여기서 통일 논의 자체를 용공 또는 친공적인 것으로 몰아 탄압하던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 대결 구도가 형성되는 일면이 나타났다. 

 

1984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국제부 주최로 일본의 도잔소에서 동북아 평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제 회의를 소집하고, 1986년에는 북한 교회 대표인 고기준 등을 포함하여 5명을 스위스 글리온에 초청하고 남한 교회 대표와 여러 나라 대표들을 초청하여 최초로 남북 교인들이 성만찬과 협의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후 글리온 3차 회의까지를 주도하였다.

 

1987년부터 활성화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 위원회는 6개월의 작업을 통해서 1988년 2월 29일 한국 교회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먼저 분단의 죄책을 기독교인들이 고백하고, 7 · 4 남북 공동 성명의 3대 원칙을 수용하고, 인도주의 우선의 원칙, 민주 민중 우선의 원칙을 천명하고, 이산 가족 상봉, 거주 이전의 자유 보장을 요청하였으며, 분단으로 피해를 당해 온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말 것과 군비를 축소해서 복지비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한반도에 배치되었거나 한반도를 겨냥한 핵무기를 철거하고 비핵화할 것을 주장했고, 평화 체제가 완전히 국제적으로 보장되었을 때는 미군이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분단에 따른 어떠한 인권 유린도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희년을 1995년, 곧 분단의 50년을 통일을 향한 희년의 시작으로 그 과정을 선언한다. 이 선언문은 오재식(현 한국 월드 비전 회장), 이삼열, 박종화, 민영진, 김창락, 서광선, 필자 등 총 9명이 초안을 작성했다.

 

이 선언으로 극우 반공 단체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건물 앞에서 시위를 하고, 검은 지프차들이 확성기로 용공 집단으로 모는 방송을 하였고, 예장 통합 교단은 2년 동안 교단 입장을 보류하고, 연구 후에 이를 수용하는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 초안 위원이 되어 문제를 푸는 과정에 참여했다.

 

도쿄 회의에서는 북한 그리스도교 련맹에서 고기준 목사, 김남혁, 황시천 목사, 김혜숙 통역, 엄영선 등 5명이 참석하고 남한의 교회 대표들과 미국 등 국제 대표들이 참석해서 한반도의 화해, 평화, 정의 통일을 협의했다.

 

1992년 미국 롱아일랜드 호흐스트라(Hofstra) 대학에서 북미주 기독학자 대회가 주최한 회의에 북한 그리스도교 련맹 위원장 강영섭 목사, 주체사상연구소 박승덕 소장, 김근영 전도사 등이 참석하고 남한에서 필자와 기독자 교수 협의회의 이삼열 교수, 김윤옥 등이 참석하여 한반도 평화와 화해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협의하였으나, 통일원이 어떠한 정치적 합의문도 작성하면 안 된다는 조건으로 접촉 승인을 해 주어서, 합의문은 작성하지 않았으나, 민족 화해를 위한 중요한 협의를 하였다.

 

1996년 마카오 국제 회의에서는 약 10여 개국의 대표들과 함께 홍수와 한재로 식량난에 봉착한 북한을 돕기 위한 협의를 했다.

 

1997년 1월 29일에는 미국 뉴욕 유엔 본부의 교회 센터에서 미국, 북한, 남한 교회의 대표들이 '미국-한국 관계'(U.S.-Korea Relations) 협의회를 개최하고 미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즉각 중단할 것, 미국과 북한은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전쟁 행위와 적대 행위를 중단할 것, 미국은 북한을 테러 국가로 규정하는 것을 중단하고, 북한이 국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 평화 교육을 각 교회가 실시할 것 등을 합의하였다.1)

 

미국교회협의회의 빅터 슈 목사 등은 미국 의회와 국무부에 열심히 로비를 했고, 필자를 비롯해서 NCCK 총무 김동완 목사, 오재식 등이 미국 국무부 한국과를 방문하여, 존 메릴 등과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지 말 것,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지 말 것, 평화 체제를 유지할 것 등을 전달하였다.

 

1997년 8월 항가리 두브레첸에서 열린 세계개혁교회연맹총회(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에서 역시 만장 일치로, 한반도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즉각 취소하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북을 테러 국가로 지정하지 말 것과 식량을 2년 동안(1997-1999년)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독일에서 평화와 화해의 성명을 채택하는 등 국제 연대를 통해서 노력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캔버라에서 북한 교회 대표들과 호주 교회, 남한 교회 대표들의 협의가 1999년 3월에 이루어졌다. 호주 교회 역시 이러한 기본 입장을 지원하고, 북한에 수경 재배 지원(월드 비전과 협력), 비디오 지원 등을 실천하였다.

 

1999년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열려, 역시 북한에서 강영섭 목사, 리정로 국제부원 등 5명이 참석하였다. 북한 교회와 남한 교회는 코리아 포럼을 진행하였다. 성만찬과 평화 통일 예배를 드리고 평화, 화해와 통일을 기원했다.

 

김동완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박종화 목사, 김상근 목사, 이재정 신부 등이 북한 교회를 공식 방문하여 합의문을 도출했고, 그후 백도웅 목사(NCCK 부총무), 윤두호 목사(예장 통합 사회부 위원장) 등 여러 교단의 대표들이 식량 지원과 선교 지원을 위하여 방북하였다. 1992년경 여성으로 이우정, 김윤옥 등이 이미 북한의 여성 연대를 통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개신교는 교파 연합으로 후원회를 조직하여 전체 "한국 기독교"의 이름으로 대북 물자 지원을 하고 있다. 김영주 목사가 노력을 해서 48km의 인간 띠 잇기를 서대문의 독립문에서 임진각까지 잇는 행사도 했다.

 

문익환 목사의 불법 방북으로 물의가 되기도 했으나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통일 방안 합의서는 김대중-김정일 공동 선언문에 반영되고 있다. 박용길 장로(문익환 목사 부인)의 방북 후 투옥 역시 개신교의 통일 화해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북한에서는 목사, 신부, 기독교는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요, 부자 편에 서서 불의한 일을 하는 것으로 사전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1992년경부터 이 사전의 정의가 바뀌기 시작하고 있다. 기독교는 회개할 것이 많이 있다. 부자들과 강대국 식민지 세력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서 악용된 일들이 많이 있었다. 물론 약자들과 소외당한 자들의 해방을 위해 일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진정한 화해는 약자들, 착취당한 자들 편에서 평화와 정의와 평등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 역할을 외면하고, 강자들과 신식민지 세력들, 특정한 부자 집단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이용당하고, 악용당하는 개신교의 일부 집단들은 회개하고, 중생 체험을 하고 자캐오처럼 구원의 길에 서야 할 것이다.

 

필자는 올해 3월 25일 평양에서 강영섭 목사를 만났을 때, 남한의 기독교가 조선 그리스도교 련맹을 통해서 약 600만 달러 정도의 식량, 약품 등의 인도적인 지원을 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2) 

 

 

2. 정상 회담은 민족 대단결의 계기 

 

6월 13일 남북 정상 회담은 한반도의 역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분단 이래 남과 북은 전쟁 상태의 연속 속에서 살고 있다. 지난해 서해 교전은 꽃게를 많이 잡아서 수출함으로써 수입을 올려야 하는 북한 경제의 심각한 투쟁의 일환이었고, 남한 어부들의 생계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동시에 서해에 배치되어 있는 중국의 핵 잠수함들과 북한의 영변 등을 포함한 주요 지역을 공격하도록 배치된 미국 핵 잠수함들의 보이지 않는 충돌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94년 6월 17일 미국은 서해를 통해서 북한 영변의 핵 시설을 폭격하려고 했다. 1999년에도 윌리엄 페리의 마지막 보고서는 북을 섬멸하는 계획을 검토하고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남과 북은 더 이상의 소모전을 해서는 안 된다. 시간도 없다. 북한에 부족한 에너지는 북한 경제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남한의 전기 생산 시설 용량의 10-15%가 남고 있는데, 이 능력으로 북에 송전탑을 세우고 전기를 보내 주어야 북의 기근이 그치고, 식량 부족에 따르는 인권 유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3월 25일에서 28일까지 평양을 방문하면서, 평화통일부장 최성익과 정상 회담의 긴급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폭넓고 깊은 논의를 했다.

 

북한의 전기 사정에서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가'(북한식 표현) 하는 것을 매일매일 볼 수 있었다. 고려 호텔 상점들은 불을 끄고 있다가 손님들이 들어서면 전기를 켜고, 나오면 다시 전기를 끄는 것을 보았다. 호텔 복도는 대부분 전기를 끄고 있었다. 수력 발전을 자제해야 농사지을 물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생산을 줄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해도 농사지을 물이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흑연 핵 발전소는 공사를 1994년 합의에 따라 중단했고, 경수로 공사는 계속해서 지연이 되어 2003년 완공 예정이 2007년으로 미뤄지고 있으며, 더 늦춰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미국이 해마다 중유 50만 톤씩 공급하기로 약속했으나, 이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어서, 화력 발전 역시 지지부진하고 있다. 전기가 부족한 상태에서 공장이 안 돌아가고, 수출할 수가 없고, 식량을 사올 돈이 없으니 기근을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남한의 전기를 북에 보내는 것이 가장 적은 비용을 투자해서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는 길이다. 북의 송전 시설이 낡아서 50% 정도가 손실될 것이라고 하지만, 아주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정상 회담 이후 우선 이러한 쉬운 문제를 푸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한 정부는 최근 북의 전기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옛 동독 지역의 발전소 전문가들을 찾아가서 조사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북한의 발전소를 구동독의 시설로 건설한 까닭이다. 그러나 동독의 낡은 시설들을 도입해서 수리하는 것보다는 남한 기술과 시설 공급으로 수리하는 남북의 공조 구조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또 다시 북한이 독일 기술과 경제에 구조적으로 종속당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새로 수리하는 과정에 남한의 기업이 직접 참여해서 이익을 나누도록 하는 것이 남북의 경제를 상생 관계로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주에 2000만 평 공단 조성을 위해서 남한의 전기를 개성으로 직송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핵 합의 이후 신포 핵 발전소 건설이 지연됨으로 해서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고 미국에 요구하고 있는데, 만약 보상을 못하면, 흑연 감속로 방식의 핵 발전소를 다시 건설해서 전기 문제를 충당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다.3) 만약 북한이 다시 흑연 감속로 발전소를 건설할 경우 미국은 공습으로 이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으며, 또 다시 전면전의 위험이 도래할 것이다. 미국은 약 13년 이상(1994년부터 2007년 신포 핵 발전소 공사 완료 추정 시기까지) 북이 전력 공급의 차질로 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고 있는 데 대한 적절한 경제적 대안을 제공해야 북의 이런 요구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중소 기업이나 대기업의 투자는 총 300억 달러(미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남과 북의 상호 호혜의 경제 구조, 공생의 경제 구조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공생 관계가 형성되면, 전쟁을 일으키는 견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경의선 20km를 복원하는 공사에 북은 인민군을 투입하겠다고 하고 있어, 남한과 함께 협력해서, 북은 연 4억 달러, 남은 연 약 16억 달러의 물류 비용과 기타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판단된다. 남한은 러시아 유럽까지 기차로 값싸게 수출을 하고, 관광 및 문화 교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은 경제 협력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협동 공동체를 만들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미사일 등의 군사 무기 체계도 협력 사업을 해 나가야 한다.

 

미국이 북한을 적대 국가로 규정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하고, 정상적인 국제 관계를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북한이 미국을 정복할 수도 없고, 미국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수도 없다. 북을 과대하게 위험시하면서 북한을 폭격하자는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더구나 클린턴 행정부가 만약 고어를 당선시키지 못하고 공화당의 부시가 대통령이 될 경우에는 북에 대한 군사 제제와 견제가 강화되면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남과 북이 평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평화 체제는 결국 경제로 풀어야 한다. 남이 북에 300억 달러(30조 원) 정도의 경협 구조를 만들면, 북이 남을 공격할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고, 남이 북을 칠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공존 공영 공리의 구조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이 북을 무력으로 공격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결국 한반도는 통일 이전의 일정한 중간 단계에 잠정적으로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서로 잘사는 공동 운명을 살게 될 것이다.4) 통일은 3만 개 정도의 계단으로 자세한 분야별 구분을 하면서 추진하되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하는 것이 속도를 빠르게 진척시키는 전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앞날에 선택의 여지가 많은 것이 아니다. 시간도 없다. 서해 교전이 다시 일어나면 수습 방안이 없다. 우리 대통령은 전시 작전권이 없다. 평시 작전권만 있다. 미군은 신속히 OPlan 5027로 평양을 공습하여 60일 폭격으로 항복을 받아 내려고 할 것이고 남한에는 상당한 사상자가 동시에 발생할 것이다. W88 같은 핵 폭격과 DU(우라늄 폭탄)들이 한반도를 방사능 쓰레기 처리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 눈에 선하다. 걸프와 코소보는 바로 공습과 우라늄 폭격으로 미국에게 승리를 준 전쟁이었고, 군수업자와 결탁한 집단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려서, 또 하나의 전쟁을 한반도에서 하자는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간도 선택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남과 북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운명 공동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정상이 자주 만나서, 평화를 정착시키도록 적극적으로 밀어야 한다. 북의 경제가 살아나야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남의 경제는 북을 통해서 번영의 길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3. 냉전 구조 해체와 나눔 

 

냉전 논리를 이제는 해체시켜야 한다. 정상 회담 결과를 붕괴시키지 아니하도록 도와야 한다.

 

야당이 이 기회에 냉전 논리를 해체하는 것은 차기 집권에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국가의 존립을 위한 국방은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러나 거짓 음모들에 의한 전쟁 도발을 방치하게 되면, 이익은 국제 무기상, 군산 복합체들이 가지고 갈 것이 분명하고, 피해는 한반도에 사는 민중이 당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을 패전시킨 후에 말하기를 "미래의 가장 위험한 평화의 적은 바로 군산 복합체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 기회에 북이 남과 단결하여 북한에 대한 대결적인 지역 감정을 초극하고, 지역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민족 공영의 길로 나가도록 하는 큰 정치를 구현하는 패러다임 변혁을 이루어 내야 한다. 

 

 

4. 정상 회담 이후의 발전과 나눔 

 

김윤규 현대 건설 겸 (주) 현대 아산 사장은 7월 3일 방북 결과 보고회에 참석하여 "올 연말까지 적어도 50억 달러에서 최대 100억 달러 규모의 각종 사업이 북쪽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현대에 이 같은 사업들을 현대가 주도적으로 맡아 달라는 부탁을 공식적으로 했다."라고 주장했다. 또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해외로부터 북한의 투자 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투자 여건을 갖춰 주겠다고 얘기했다."라고 설명했다. 북측에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면 우리 정부의 남북 경협 자금과 제3국 경협 자금 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5) 서해안 공단, 금강산 특별 경제 구역, 남북한 철도 연결과 발전소 건설 등 사회 간접 자본 건설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장영식은 현상태에서 남북 연계 시설을 이용한다면 수풍 수력에 맞먹는 70만kw짜리 발전소에서 발전하는 전기를 하루 평균 4시간(연 5,110시간)씩 심야 및 공휴일에 공급할 수 있다. 이 총 원가는 2,800억 원이지만 심야 전기는 360억 원 정도가 된다. 의정부 변전소에서 개성으로 보내고 Back to Back Converter를 사용하면 한쪽의 사고가 상대방에게 미치지 못해서 차단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6) 대가로는 만주 석탄을 남한으로 수송하도록 하면, 연계 구조로서 해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

1) 노정선, The Third War,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년에 부록의 형식으로 합의문 전문이 있음.

2) 강영섭 목사는 60만 달러라고 말했으나, 600만 달러라고 본다. 예장 통합이 약 21억을 지원했는데 이는 약 200만 달러 정도이다(2000년 3월 25일 평양 조선 그리스도교 련맹 사무실에서의 대화 중에서).

3) [동아일보], 2000.7.3.

4) 필자는 통일의 프로그램은 3만 단계 정도로 분화를 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나가는 전략이 좋다고 본다.

5) [조선일보], 2000.7.4.

6) [조선일보], 2000.6.26. 10판, 6면.

 

[사목, 2000년 8월호, 노정선(연세대학교 교수, 기독교 사회윤리학)]



48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