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선교ㅣ복음화

교회의 사회 참여와 선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55

교회의 사회 참여와 선교

 

 

1. 아직 끝나지 않은 선교

 

현재 남한 인구의 75%는 비그리스도인(이웃 종교 포함)이고, 47%는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무종교인이다.1) 게다가 국토의 절반은 반세기 이상 무신론적인 사회주의 체제 아래 살고 있다. 여전히 선교가 우리의 사명이자 존재 이유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최근 십 년 내에, 오십 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큰 폭의 성장세가 현저하게 떨어지고, 내부의 비활동 인구도 큰 폭의 증가율을 보이면서 교회 전체의 활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2) 최근 선교열이 불붙고 있지만, 이러한 하락과 약화의 추세는 위기 의식마저 느끼게 한다. 과연 이러한 현상은 왜 나타나는가?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징후들은 교회의 사회 참여 노력의 감소와 상관 관계가 있는가? 중요한 성찰의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본고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찌감치 선교 3세기에 돌입하였고, 현재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는 천주교회가 앞으로 선교 방향3)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사회 복음화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나름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 교세 성장의 견인차 - 사회 참여

 

해방 이후 우리 교회는 개신교, 불교와 더불어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해방 당시의 교세를 기준으로 할 때 이 세 종교 모두 지난 오십 년 동안 다섯 배 이상 성장하였다.4) 어느 한 종교만의 성장이었다면 그 종교의 노력을 칭찬하였을 것이나, 세 종교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었기에 종교 외적인 요인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종교 인구는 팽창하지 않고,5) 세 종교의 신자 수만 급팽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정치적 불안정에서 비롯한 심리적 불안감,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에서 비롯한 전통적인 공동체의 해체와 여기서 요구된 준거 집단(reference group)의 필요성,6) 분단 후 형성된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좌편향의 종교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3대 종교에 도전할 가능성이 희박하였던 점 등이다.7) 대체로 이와 같은 외부적 요인들이 대내적 요소보다 더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외적인 요인만으로 종교의 성장을 설명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3대 종교의 대내적 수용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면 종교 인구의 성장이라는 열매는 대부분 신흥 종교와 사이비 종교의 몫이 되었을 것이기에 말이다. 대내 여건 가운데 가장 기여도가 큰 요소들을 거론하자면 개신교의 경우 강한 선교열과 사회 복지 교육을, 천주교는 사회 복지, 예언직 수행, 조직적 통일성을,8) 불교의 경우 전통과 민중적 정서에 부합하려는 노력을 들 수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 공히 한국전쟁 후에 해외 교회의 직접 원조 또는 국제 사회의 원조 통로로 기능한 점과 국가 권력과 갈등 시기에 세계적인 네트워크로부터 도덕적, 경제적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점은 불교나 한국에 뿌리를 둔 다른 군소 종교보다 유리하였던 요소로 지적된다.9)

 

불교가 사회적 역할이 적었던 경우를 제외하면 같은 그리스도교 전통인 개신교와 천주교는 높은 사회적 위신과 선교의 유인 요인으로 사회 참여가 큰 작용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굳이 두 종교간의 우열을 가리자면 천주교의 사회적 역할이 더 큰 평가를 받았고, 종교 인구 성장에 더 큰 기여를 하였다.10) 개신교 내부의 연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개신교의 성장은 초월적이고 구복적인 성령 운동,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갖는 무한 경쟁 원리에 기초한 개교회주의와 이에 따른 지나칠 정도의 선교열, 간편한 입교 절차 등이 대사회적 역할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11) 이에 비하여 천주교회는 한국 종교 가운데 가장 높은 사회적 위신을 쌓은 사회 복지와 비교적 긴 기간 동안 불의한 국가 권력에 대하여 상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예언직을 수행한 점, 높은 대내적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사이비 신심과 분열적인 요소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점, 성직자 수도자들의 높은 도덕성 등과 같이 긍정적인 사회적 위신을 형성할 수 있는 요소들이 개신교보다 월등히 많았다.12) 대내적 요인들로만 보면 3대 종교 가운데 천주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다. 다른 어느 종교보다 천주교가 선교에서 사회 참여의 덕을 가장 많이 본 것이다. 따라서 사회 참여가 선교의 본질적 차원은 아닐지라도 중요한 구성적 요소라고 말할 수는 있다.13)

 

 

3. 변화된 종교의 위상 - 다원주의 사회 안의 종교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 참여에서 얻게 된 긍정적 사회적 위신은 이후 급격한 하락세로 돌아섰다. 대부분의 종교 관련 사회 조사에서 세 종교 모두 사회적 위신이 낮아지고 있고, 사회적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의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상대적으로 개신교와 불교의 하락세가 두드러진다.14)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대내적인 역할에 머물러 사회적 역할을 소홀히 한 점, 개신교의 경우 교파 분열과 끊이지 않는 각종 종교 내부의 비리, 성령 운동의 부작용,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의 배타성, 불교의 경우 빈발한 종단 분규 사태 등이다. 천주교는 뚜렷한 원인을 찾기 어려우나 일부 연구자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신자 구성층의 계층 변화와 이에 따른 중산층화와 예언직 수행의 감소를 지적한다. 그럼에도 개신교, 불교에서 나타나는 위신 하락에 비하면 천주교는 가장 안정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15)

 

물론 이러한 위신 하락의 원인은 내부에만 있지 않다. 우선 시민 사회의 성장으로 종교의 사회적 역할 범위가 줄어든 것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일례로 1980년대 초반까지 거의 독자적인 역할 범위를 가졌던 종교는 이제 공적인 영역에서 여러 역할자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16) 급속한 세속화도 하락의 원인이다. 세속화는 종교 영역의 상대적 축소를 가져와 이제는 개인의 내적 영역의 문제(privatization)가 되었다.17) 세 번째로 종교 다원주의의 확장이다. 어느 종교도 인구의 과반수를 점하지 못하고 있고, 종교 인구 내에서도 과반수를 넘지 못하는 상황은 특정 종교를 우대할 수 없는 조건을 형성한다. 따라서 종교의 특권적 지위는 상실되고, 종교 외적인 가치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와 같은 객관적 조건의 변화는 종교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을 좁히는 역할을 해 왔다.

 

 

4. 1980년대 중반 이후 천주교회의 대사회적 역할 감소

 

사회 복지와 예언직 실천, 교육과 같은 제도적 수준에서의 참여와 신자 개인들이 사회 내에서 수행하는 개인적 역할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사회 참여는 선교의 본질적 구성 요소이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천주교의 사회 참여는 교세 성장에서 3대 종교 가운데 가장 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사회 참여의 사회적 영향력과 대내적 기여도에 비할 때 이에 대한 평가는 매우 낮았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입교자들이 입교의 동기를 천주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한 신뢰라고 대답하고 있을 때18)도 사회 참여의 가치는 절하되었고, 심지어 최근 다시 일고 있는 선교 운동의 시기에도 사회 참여의 역할은 거의 간과되고 있다. 진지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교회가 갖는 강점은 교회의 일부 영역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라고 하는 전체의 긍정적 이미지이다. 긍정적 이미지는 수십 년에 걸친 바람직한 사회적 역할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한 요소들은 수십 가지에 이른다. 그러나 쌓기보다 허물기가 더 쉬운 법, 긍정적 이미지의 형성은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지나, 허물어지는 것은 매우 급속하게 일어나게 마련이다.

 

제한적인 분석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그동안 연구자들이 주장해 온 바를 요약하면, 교회의 공적인 대사회 메시지의 현저한 감소, 교회 내 계층 구성이 중간층으로 편제되면서 나타나는 정치적 보수화, 이에 따른 교회의 예언직 활동의 협소화와 비정당화, 국가와의 긍정적 제휴 관계로 빚어지는 비판적 기능의 약화 등이 원인이다.19) 또한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 능력 감소에 따른 의제 설정 기능 약화도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여기에다 신자들의 신앙 경향이 대내적이고 구복적인 성격을 더 강하게 띠어 가는 점, 대사회적 역할보다는 개인의 안심입명을 더 강조하는 점 등도 교회의 사회 참여를 약화시키는 원인이다.20) 상황이 이러한 까닭에 교회가 이제야 선교의 차원에서 사회 참여를 거론하는 것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5. 사회 참여의 선교 기여도 감소

 

최근의 직접적이고 공세적인 선교 방식이 성공을 거두면서 간접적인 방식 이른바 긍정적 이미지 형성을 통한 선교 방식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직접적이고 공세적인 선교 방식이 현재 성공을 거두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 까닭은 일차적으로 그동안 천주교회 전체가 쌓아 온 긍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현재 무종교인 가운데 천주교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여전히 이백오십만 명 이상21)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이제껏 형성해 온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 긍정적인 이미지가 전적으로 사회 참여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최근 입교 동기는 1980년대 중반까지 나타났던 상황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제는 천주교가 정치적 행동주의를 떠나 기존의 관념에 비추어볼 때 종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성직자 수도자들이 청렴하며(재정 투명성과 연결되어), 대사회적 역할에서 가장 투명한 이미지를 보이는 것이 주된 이유인 듯하다.22) 다소 부정적인 평가로는 천주교가 개신교와 함께 지위 집단화되어 중간층 이상의 사람들에게 더 호감을 준다는 점, 실제 입교자들 대부분이 중간층 출신으로 추정되고 그럴수록 천주교는 중하층에 속하는 이들과 멀어지게 되는 점, 신앙이 점차 개인화되어 신자나 교회나 공적인 역할에 무관심해지는 점 등이다.23) 그야말로 천주교가 공적인 영역에서 후퇴하여 개인의 사적인 관심사로 축소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시기와 천주교의 예언직 수행이 감소하는 시기가 맞물려 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추세가 반전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달리 말하면 사회 참여가 과거와 같이 선교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바야흐로 교회의 공적인 영역에서의 후퇴와 함께 신앙이 내적이고, 신자 개인의 관심사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사회 참여 노력을 지나칠 수는 없다.

 

 

6. 새로운 사회 참여 방식 개발과 선교

 

1980년대 중반까지 가능하였던 교회의 예언직의 수행은 시민 사회의 성장과 함께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감소되어, 이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교회의 사회 참여는 사회 복지 인력과 재원에 대한 투자의 확대, 시민 사회에 대한 재정 지원, 신자들의 대사회 자원 봉사 확대, 해외 원조 재단의 설립과 운영, 공익, 문화 사업 지원, 신자들로 구성된 예언직 수행 단체들의 공적 인정과 지원, 국가 중대사에 사회 교리에 입각한 입장 표명, 재정의 투명성 유지 등이다.24) 교회 쇄신으로 교회 안팎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자 개개인이 현세 질서의 성화 임무와 가정 공동체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교회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계층 구성이 중간층 중심으로 되어 있는 현실을 부정하기보다 이 현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찾는 일이 현명하다. 중간층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을 때의 이로운 점을 생각하고, 이 장점에 입각하여 선교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다.

 

중간층 중심의 교회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물질적 자원 동원이 쉽다는 점이다. 동기 부여 여하에 따라 자원 동원의 규모는 교회의 사명 수행에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때 적절한 동기 부여 기제는 사회 복지, 해외 원조와 북한 지원 등에 대한 당위성 강조이다. 이것은 기존의 교회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신자들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에 자원 동원이 원활하면 신자들이 가진 지적 자산과 시간을 이용한 본당, 지구, 교구 또는 전국 단위의 자원 할당을 확대할 수 있다. 더 능동적인 신자들은 교회의 경계를 넘어 시민 단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직접 활동이 어려우면 교회 내에서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단체들의 후원 회원이 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대도시 지역의 경제적 여력이 있는 본당들은 본당의 자원을 이용하여 지역 사회의 문화 센터 역할을 수행하거나 범위를 전국으로 넓혀 독자적인 복지 재단, 원조 재단 등을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국적인 단위(주교회의, 전국 사도직 단체)에서는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사회 교리에 입각한 메시지 발표, 국가 기관에 대한 비판적 조언 기능을 구상해 볼 수 있다. 정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견제와 비판 기능이 중심인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교회 안팎의 반발이 크지 않을 수 있다. 인권, 환경 분야, 교회의 사회 교리에 부합하는 시민 단체에 대한 재정 지원 등은 비교적 교회 내의 큰 반발 없이 이행할 수 있는 일이므로, 이 분야에 대한 공적인 지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각 교구별로는 기존의 사회 사목 단체로 분류되어 온 단체들의 기능을 강화하고, 이 분야에 대한 재정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다. 본당별로는 본당과 지역의 사회 복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방법이 가장 적절하다. 신자 각자는 지역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는 시민 단체들의 후원 회원이 되거나 자원 봉사자가 됨으로써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목한 가정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이웃에 모범이 되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 바깥에 관심이 적고, 폐쇄적인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이러한 폐쇄적인 이미지는 신자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기 때문에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사회 참여의 방식은 다양하고 그 범위도 매우 넓다. 그리고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사회 참여는 여전히 선교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신자 개인보다는 교회 전체가 형성하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선교를 좌우하는 것이라면, 전체의 긍정적 이미지는 사회 참여로써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와 같이 국가와 갈등을 일으키거나, 집단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듯 보이는 시도들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가 사회의 상식선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는 교회 쇄신을 통해 투명하고 건전한 이미지를 유지해 나갈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7. 제언

 

사회 참여는 한국 천주교회 성장의 견인차였다. 그러나 현재 그 중요성은 많이 약화된 편이고, 실제 선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낮아지고 있다. 교회의 계층 구성이 달라지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문제이면서도, 중장기적으로는 선교에 지장을 줄 수 있기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장차 통일 시대에 교회의 사회 참여 노력 정도가 북한 선교에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역할 축소는 우려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사회 참여의 필요성은 여전히 크다. 교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는 까닭이다. 비중이 줄기는 하였으되, 중요성은 전혀 약화되지 않았기에 교회의 건전한 사회 참여 노력은 선교 3세기의 최대 과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노력과 함께 새복음화와 재복음화에 주력한다면 한국 천주교회는 가장 사회적 위신이 높은 종교의 위치를 지속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개종 희망 종교 1순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

1) 한국 갤럽,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 의식], 1998년, 17-20면.

2) 가톨릭 신문사, [가톨릭 신자의 종교 의식과 신앙 생활], 2000년, 67-106면.

3) 오경환 신부는 선교를 새복음화, 재복음화, 사회 복음화 세 차원으로 나눈다. 새복음화는 새 입교자를 교회에 초대하는 활동(기존의 선교의 의미), 재복음화는 입교한 신자들의 쇄신 노력, 사회 복음화는 구조의 변화와 관련된 활동 등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구분법에 따르면 현재 교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선교 운동은 새복음화에 해당하고, 본고의 주제인 사회 참여는 사회 복음화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 세 차원은 불가 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어느 한 차원만을 강조할 수 없다(1999년).

4) 윤승용, [현대 한국 종교 문화의 이해], 한울 아카데미, 1997년.

5) 종교 인구가 팽창하지 않았다는 것은 종교 인구의 비율(종교 인구/총인구×100)이 늘지 않았다는 것이지, 절대 수가 증가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6) 김병서, [한국 사회와 개신교], 한울 아카데미, 1995년; 이원규, [한국 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감리교 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임성빈, [한국 교회와 사회적 책임],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년; 한국 기독교 문화 연구소 편, [한국 교회 성장 둔화 분석과 대책], 숭실대학교 출판부, 1998년 참조.

7) 강인철, [한국 기독교와 국가·시민 사회],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소, 1996년.

8) 강인철, "미래가 불투명한 한국 천주교", [경향잡지]`1517호(1994.8.) 참조.

9) 강인철, 앞의 책 참조.

10) 가톨릭 정의평화 연구소 편, [한국 가톨릭 교회와 소외층, 그리고 소외 운동], 빛고을 출판사, 1990년; 박문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천주교회",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년 참조.

11) 한국 기독교 문화 연구소 편, [한국 교회 성장 둔화 분석과 대책], 숭실대학교 출판부, 1998년.

12) 박문수, 앞의 글 참조.

13) 교회의 사회 참여 노력이 결과적으로 선교에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선교의 본질적 구성 요소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교 영성의 수평적 차원이 사회 참여를 전제로 하는 까닭이다. 하느님 사랑의 전제 조건이 이웃(인간) 사랑이고, 이 두 차원 가운데서도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전제 조건이기에 그리스도교 선교에서 이 수평적 차원은 본질적이다. 사회 참여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수평적 차원을 실현하는 한 방편이다. 또한 우리 시대의 여러 반복음적 징후(표)들이 사회 참여의 선교적 차원의 중요성을 보증한다. 인간 존엄성 수호의 원리와 연대성의 원리가 그리스도교 영성의 수평적 차원에서 도출되는 것이고, 이는 다시 선교의 본질적 구성 요소가 되는 바, 사회 참여는 마땅히 선교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거론하는 사회 참여는 교회가 정치 집단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세적인 권력의 추구가 교회가 사회 참여를 하는 목적이 아닌 까닭이다.

14) 한미준-한국 갤럽,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 활동과 신앙 의식], 두란노, 1999년; 한국 갤럽,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 의식], 한국 갤럽, 1998년 참조.

15) 오경환 신부 화갑 기념 논문집 간행 위원회, [교회와 국가],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년 참조.

16) 최근의 시민 운동과 종교, 사회 운동과 종교를 연결시키는 논의들은 대부분 종교 영역의 상대적 축소 또는 후퇴를 논하고 있다.

17) 가톨릭 신문사, 앞의 책, 23면 참조.

18) 노길명·오경환, [가톨릭 신자의 종교 의식과 신앙 생활], 가톨릭 신문사, 1998년 참조.

19) 김녕은 오경환 신부 화갑 기념 논문집에서 6공화국 이후의 시기를 분석하면서 이러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20) 박문수, 앞의 글 참조.

21) 이 수치는 한미준-한국 갤럽 보고서(1999년) 43-45면에서 무종교인의 개종 의향 종교 가운데, 천주교를 선택한 비율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먼저 무종교인 가운데 개종 의향자 비율을 계산하고, 두 번째로 개종 의향자 가운데 천주교를 선택한 사람의 비율을 계산하면 대체로 이 수치에 가깝다.

22) 가톨릭 신문사, 앞의 책, 23면 참조.

23) 박문수, 앞의 글 참조.

24) 박문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색",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3], 한국사목연구소 역사신학위원회 심포지엄 자료집, 2001년 참조.

 

[사목, 2001년 10월호, 박문수(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1,03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