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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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예수 그리스도, 아시아를 위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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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9-11 ㅣ No.139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예수 그리스도, 아시아를 위한 선물

- 현대 복음화의 요구, 임무 그리고 도전들

 

텔레스포어 프라시두스 토포 추기경(Card.Telesphore Placidus Toppo)

란치(인도, 자르칸드 주의 주도)의 대주교

 

 

1969년 스위스에서 사제서품을 받았고, 1978년 주교로 수품되었으며, 1985년 란치의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2003년 9월 추기경에 서품되었다. 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힌디 그리고, 산탈어와 사드리어, 쿠르크어 등 총 8개어를 구사한다. 토르파의 리벤스 성소 센터와 둠카의 사회개발센터, 란치의 가톨릭 사회봉사 센터를 설립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스폰서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등 사회사업과 종교활동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아시아 주교회의와 교황청 여러 위원회의 멤버로 활약했으며, 복음화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강연 외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개최된 심포지엄과 대회에서 강연했으며, 매우 친근하고 다른 이들을 경청하는, 포용력이 있으며 위엄있는 추기경으로 알려져 있다.

 

저에게는 다 함께 모여 명백하게 오늘 아시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에 오로지 관심을 기울이는, 이 성대한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 대회에 참여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이렇게 멋진 이니시어티브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스타니슬라오 릴코 추기경님께, 또 조직위원회 모든 분들과 서울대교구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 따뜻한 감사와 아울러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진짜 일어난 일로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몇 년 전에 저의 교구에 살던 어느 식품점 주인인 힌두인 한 분이, 자기 가게에 자주 들르던 한 선교사에게 읽을 만한 책을 좀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신부님이 가진 거라고는 힌두어로 된 신약성경뿐 이어서, 그걸 주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 힌두인은 들떠서 신부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이 정말입니까? 신부님,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말하는데, 그분이 진짜로 죽음에서 되살아 나셨습니까?” 신부님은 대답했습니다. “예, 정말입니다. 그분은 오늘 살아계시고 저의 삶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조국을 떠나 이곳 인도에까지 왔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왜 이제껏 그런 말씀을 우리에게 안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 계시다는 것은 멋진 소식입니다. 이건 알려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것은 아시아의 위대한 백성들이 여전히 듣기를 기다리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시아를 위한 선물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권에 대한 우리 신앙을 나누고, 또 증거 함으로써 말과 행실로 그것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부르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권이며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생활 방식에 요구를 가져오며, 하느님의 영이 지니신 권능으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여러 도전들과 마주치게 만듭니다.

 

복음화의 이런 요구와 임무, 그리고 도전들 중의 일부를 설명하기 위해, 저는 먼저 인도, 초타낙푸르의 커다란 소수부족민 교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종(가경자)인 예수회, 콘스탄트 례벤스 신부는 초타낙푸르 소수부족민의 사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분은 벨기에의 어느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성모 마리아의 개입으로, 인도 중부 소수부족민지역에서 가난하고 억압받던, 부족 간의 분쟁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깊은 연민을 느끼며, 그분은 125년 전 우리들을 돕고, 사랑하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말을 배우고, 우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우리가 해방되고 변모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강해지도록 만들기 위해 함께 일했습니다.

 

우리 소수부족민은 문다스, 호스, 오라온스, 카리아스 등이며 모두 가난한 농민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생존의 희망은 거의 없었습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려고 그들은 우리 주에서 아쌈 차밭으로, 안다만 정글로, 갠지스 강변에 있는 벽돌공장으로 가거나, 콜카타의 막노동꾼들(coolies)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문맹자였고, 지주들(zamindars)에게 예속되어, 사유재산을 갖지 못하고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은 사채업자들에게 얽매여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거의 잃어버린 채, 그들에게서 평화를 앗아가는 악령들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례벤스 신부님이 도달한 것은 1885년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도록 그분에게 맡겨진 지역에는 겨우 56명의 가톨릭신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7년 만에, 피로와 폐결핵 때문에 거의 만신창이가 된 그분께는 약 8만 명의 세례 받은 가톨릭신자들이 생겼습니다!

 

무엇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그분은 어떻게 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었을까요? 지역 경찰서장이었으며, 친구였던 한 슬기로운 경관이 례벤스 신부님께 그 사람들의 진짜 현실의 뿌리와, 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례벤스 신부님은 그 후 먼 시골마을에서 무리를 지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비참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 기꺼이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분은 그 사람들의 언어로 소통했으며, 하루에 몇 시간씩이고 함께 지내며, 필기를 하고 조언을 했습니다. 때로는 초대를 받아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말을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분은 기존의 토지 관련법을 연구했고, 지역 언어를 모르고, 지주들(zamindars)에게 악영향을 받던 재판관들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사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재판에서 패소하였기 때문에, 절망적인 분위기가 사람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지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착한 신들”이 “디쿠스(외국) 신들”보다 훨씬 더 약하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자신들의 버렸다고 느꼈던 것이지요. 그러나 례벤스 신부님은 사람들에게 진실 되고 정직하게, 사실 증거들을 참작하여 소송을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고, 믿을만한 변호인들과 접촉하게 만들었으며,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납득시켰습니다. 신부님의 지도와 격려에 따르자, 사람들은 승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 권리와, 하느님에 대해 신뢰를 회복했습니다.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 례벤스 신부님과 그분 같은 사람들은 타지인들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디쿠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례벤스 신부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분은 점차, 물과 성령으로 주어지는 세례를 통해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변모시키며, 강하게 만드시는 유일한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초타낙푸르의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짓밟혔으며, 살려는 의지는 흙먼지처럼 으스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자, 세례 속에서 그분과 함께 부활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느님 백성이며, 목소리를 지닌 백성, 자긍심과 신뢰심을 지닌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일어설 수 있습니다. 가톨릭 공동체로써 그들은 계속 자라나고 커졌습니다. 그들은 “빛의 자녀”로서, 태양아래 자신들의 자리를 든든히 세웠습니다. 저는 원주민/토착민 가톨릭 신자 어린이들이 “ham krusvir kissi se kam nahim" - 우리는 성체성사의 백성이며, 그 누구보다 못하지 않다! - 라고 노래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은 조국을 위해 봉사하며, 전쟁과 평화 안에서 자신들을 위한 이름 하나를 얻습니다. 자신들의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됨으로써 사회와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외에도, 어떤 이들은 교사와 교리교사가 되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해 살면서 그렇게 합니다. 그들의 단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봉사를 보면서 우리는 초타낙푸르의 교회가 평신도 교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소수부족민 소년들 가운데서 사제성소를 계발해야 하겠다는 영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1902년 사도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콜카타의 예수회 출신 대주교님은 교황청에 요청하여 1914년 란치에, 성 알베르토 신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저 역시 이 신학교에서 배출이 되었는데, 이 신학교와 이 소수부족민 교회는 백 년이 채 되기 전에 수천 명의 사제들과 수천 명의 수녀들을 배출했으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사들과 신학생들을 세상의 여러 곳으로 보냈습니다. 54년의 세월 동안(1873-1927) 전무했던 가톨릭 신자들의 숫자는 269,724명이 되었습니다. 1927년 란치가 교구가 되었을 때의 숫자입니다. 83년이 지난 지금, 더는 숫자를 셀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방인 주교를 지닌 교구가 12개이며, 다른 12개의 교구에서도 많은 숫자가 있고, 이웃한 인도의 다섯 주에서 여러 교구가 란치와 연결된 소수부족민 출신의 주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케이스 스터디를 보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라는 지혜가 아시아의 복음화에 있어서 효과적인 부분이라는 것에 대해 누가 과연 의문을 품겠습니까? 회칙 아시아 교회 33항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발전의 주요 요인들과 목적은 인간 존재이지 결코 부나 기술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교회가 추진하는 발전이란 경제와 기술의 문제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적 품위와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 끝날 때부터 주어진 인간 인격의 완전성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습니다.”

 

저는 우리의 역사와, 또 짧은 시간 안에 인구의 10%가 이미 가톨릭신자가 된, 이곳 한국에서처럼, 아시아의 다른 유사한 역사적 체험들이 회칙 아시아 교회가 복음화를 가리켜 오늘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라고 선언한 것의 백그라운드를 형성한다고 믿습니다. 이 “오늘날”이라는 말 뒤에는, 예수께서 아시아 자체 안에 교회를 세우신 이후 2천 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난 뒤에도 아시아의 전체적 퍼센티지가 이렇게 낮은 것은 물론 슬픈 일입니다. 그럼에도 회칙 아시아 교회는 환호와, 찬양과, 감사의 영으로 시작됩니다. 그 첫 장에서, 복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제삼천년기에 아시아에서 신앙의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재확인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아시아가 가난한 이들의 대륙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그저 불쌍히 여기시며, 도움을 주러 오실 것입니다. 회칙 아시아 교회 4항은 “아시아 민족의 대다수가 겪고 있는 고통, 폭력, 인종 차별, 가난 등이 제기하는 수많은 고통스런 문제를 겪고 있다.”(같은 곳)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자각은 우리 모두를 “선교에 새롭게 투신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교황님께서는 “아시아가 다가오는 천년기에 분명히 풍부한 수확을 산출하는 땅이 될 것임을 영적인 열의와 정열을 가지고 증언하는 교회의 특성”(같은 곳)에 대해 예언적 확신을 표현하셨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지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더 염두에 두고 봉사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콜카타의 복되신 마더 데레사가 특별한 증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분은 인도와, 아시아와 온 세상이 예수님께 관심을 지니는 데 초점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가난한 사람 속에 숨어 계신 그분을 우리는 직접 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종, 콘스탄트 례벤스 신부님의 정신이기도 했습니다. 초타낙푸르의 사도이신 그분은 토착민/소수부족민을 위한 교회의 봉사의 이콘으로 남아 계십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어느 그룹보다도 더 복음에 잘 응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회칙 아시아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인 교회로 이끌리게 되는 사람들임을 느끼며....거기에는 사회 참여의 증진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 분야에 관한 무한한 활동의 장이 있습니다. 가톨릭 공동체는 본토인과 원주민들의 관심사와 그들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의의 문제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들에 대한 사목 활동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전통적 종교와 그 가치들에 대한 깊은 존중의 태도가 전제됩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들의 처지 개선을 위하여 일하고, 자신들의 문화와 사회를 복음화 할 수 있도록 그들 자신을 돕는 데에 보탬이 될 필요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회칙 아시아 교회 36)

 

이런 생각들은 그저 미래지향적인 유토피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진위여부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일 속에 있습니다. (그런 나라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평신도 대회이므로, 여러 나라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한 사람들이 모두 평신도였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예수회의 례벤스 신부님이 초타낙푸르의 소수부족들에게 선교 봉사를 시작했을 때, 고작 서 너 명의 신부님이 있었을 뿐, 그분들과 함께 일할 수녀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분에게 멋진 파트너인 남녀 평신도들을 데려 오셨습니다. 그들은 교리교사가 되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협조자들이 되었습니다. 현재 커다란 소수부족민 교회의 성공사례는 례벤스 신부님의 선구자적인 활동 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온 마음으로 투신했던 소수부족 평신도들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북 인도의 7개 주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하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루나할 그라데쉬에서) 평신도들의 영웅적이고 존경할 만한 활동 덕분에 인도의 그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셨습니다. 이번 평신도 대회가 모든 아시아의 나라들에서 그런 평신도들을 위한 촉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회칙 아시아 교회 20항은 정확히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은 교회가 아시아의 백성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봉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찾는 절대자에 대한 심오한 탐구에 응답해 주며, 그들이 염원하는 인간의 전체적 발전을 보증하는 진리들과 가치들을 일깨워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할당된 시간 (30분)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 저는 앞으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복음화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선교사로서 “나가는” 차원입니다. (“가서 말하여라,”차원) 둘째, 복음을 “삶으로 증거 하는” 차원입니다.(“와서 보아라.”차원) “복음이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정말로 작용한다는 것, 우리의 삶에서 작용하고, 우리를 변모시켰음을 와서 보십시오.”

 

복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우리에게 상기시키셨습니다. “선교의 시작이며 다시없는 형태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 사명을 이어가는 그리스도께서는 탁월한 ‘증인’이시고, 모든 그리스도교 증인의 모범이십니다. 증언의 첫째 형태는 선교사와 그리스도인 가정,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삶 자체로써, 이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모든 인간적 한계와 약점에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단순한 삶을 사는 선교사는 하느님과 초자연적 실재의 표징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신 스승을 본받고자 노력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증언을 할 수 있고 또 하여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증언이야말로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42)

 

아시아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서 복음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선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만, 아시아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생활양식과 가치관, 행동의 변화를 통해 증언함으로써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교나 사제들 뿐 아니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에게도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음 세 분야의 증거는 특별히 중요성을 가집니다.

 

첫째, “세상에서 강한 호소력을 지니 복음적 증거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가난한 사람, 약한 삶,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42) 첫 번째 분야는 애덕입니다. 사랑의 이니시어티브를 지니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비 그리스도교 국가인 인도에서 국장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의 천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는, 정치적 경제적 세력의 부패에 대하여 용감한 예언자적 입장에 서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 43)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종교적 활동을 하도록 불림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라고 불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

 

이것과 연결된 셋째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마음 깊이 건드리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단순한 삶을 본받음”입니다.(구세주의 사명 43) 이것은 진복팔단의 첫 구절이 그리스도인의 모토가 되는 넓은 분야로써,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루카 6,20) 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마태 5,3)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돈과 세상의 물질에 대한 극단적으로 새로운 태도를 요구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깜짝 놀라게 하는 무엇인가가 영에 존재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식구들을 위해, 곧 궁핍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너그럽게 기꺼이 자신들의 것을 내어 놓았기 때문입니다.(참조 사도 2,44; 4,32) 그런 의미에서, 저는 로마 성직자성의 문헌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성직자들을 위한 증거의 몇 가지 분야에 대해, “값비싼 금시계를 차지 말고, 최신 유행의 차를 몰지 말고, 등”을 말합니다. 주교들과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과 젊은이들은 이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직접적인 복음화를 위한 성령의 힘과 간접적인 증거는 함께 갑니다. 마태오 복음 28장, 19-20절은 이런 그리스도의 명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르코(16,15. 20)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이 텍스트에서 공통되는 두 가지 요소는, 임무가 지닌 보편성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임무는 우리들만의 일이 아니라, 임무 수행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권능 속에서, 자신감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세상과 아시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중심성에 관해 말했던,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당신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빛과 힘을 주시어 인간이 자신의 드높은 소명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다고 믿는다. 또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은 하늘 아래에서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인류 역사 전체의 관건과 중심과 목적을 자신의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모든 변천 속에도 변하지 않는 많은 것이 들어 있으며, 그 불변의 것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 안에 궁극의 토대를 두고 있다고 확언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습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공의회는 인간의 신비를 밝히고 현대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협력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사목헌장, 10)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아시아의 모든 남녀에게 계속해서 말해야 합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니 열정의 정신을 보존하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할 때에도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을 간직합시다. 요한 세례자와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다른 사도들과 교회 역사상 수많은 훌륭한 복음 선포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이것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꺼뜨릴 수 없는 내적 열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봉헌된 우리 삶의 큰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불안 속에서, 때로는 희망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현대 세계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낙심하고 낙담하며 성급하고 불안해하는 선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을 먼저 받아들여 열성으로 빛나는 삶을 살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세상 가운데 교회를 세우고자 기꺼이 목숨마저 감수하려는 복음의 봉사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현대의 복음화, 80)

 

저는 수많은 우리 나라들의 모후이신 마리아의 특별한 전구로, 우리 모두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세상이 우리 하느님의 나라가 되고, 정의와 평화, 진리와 사랑, 아름다움과 행복의 나라가 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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