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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아시아에서의 그리스도인 양성과 평신도 선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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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9-11 ㅣ No.141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아시아에서의 그리스도인 양성과 평신도 선교 활동

 

요셉 딘 덕 다오 신부(Rev. Joseph Dinh Duc Dao, 베트남)

 

 

도입

 

이 글의 제목은 2가지 상이한 문제들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은 동일한 현실의 2가지 다소 상관적인 측면들 또는 단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 양성의 좋은 방식은 평신도의  생각과 마음을 선교에로 열어 주어야 합니다. (AG 2, AG 36 참조). 선교적인 헌신은 그리스도인 양성의 오랜 과정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이 글을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앞부분에서 아시아에서의 평신도 양성과 평신도들의 선교적인 노력들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제시하고자 합니다.뒷부분에서는 양성 프로그램이 선교적인 관점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숙고해 보도록 하고자 합니다.

 

 

I. 아시아에서의 그리스도인 양성과 평신도들의 선교적인 노력들


1. 평신도 양성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

 

이제 우리가 고찰해 보고자 하는 평신도 양성이란 여러 성사 생활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단계와 결혼 준비 단계 등에서 필요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평신도들에 대한 다소 높은 수준의 양성을 뜻합니다.

 

아시아에서는 교회 내에서 평신도들의 역할 및 평신도 양성의 문제가 여러 지역 교회들에서 제기된 바 있고 특별히 1982년 FABC(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가 평신도 사무국(OL)을 설립하기로 결정하면서 이 문제가 보다 명확해졌습니다.

 

그런데 평신도에 대한 고찰에 큰 힘을 실어 주었던 계기는 1987년 열린 평신도에 대한 주교 시노드 였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이 주교 시노드가 <아시아 교회와 사회에서의 평신도들의 성소와 선교>라는 주제로 1986년 열린 제4차 FABC(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총회와 더불어 준비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개별 주교들의 선언과 주교회의의 선언, 심지어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의 선언을 통해서도 평신도들의 중요성과 그들의 양성의 중요성에 대해 무수히 확인해 주는 수많은 발언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 아시아 교회들은 평신도 양성을 위한 여러 주도적인 활동들로 매우 능동적이고 활발한데, 이 양성 과정은 교구, 주교회의, 또는 주교회의 위원회, 평신도협회 또는 운동 단체들, 여러 수도회들 등 상이한 수준에서, 또 다양한 역동성 속에 진행되곤 한다. 이 같은 양성 프로그램들은 너무 많아서 그 프로그램들을 전반적으로 다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현존하는 평신도 양성의 모든 주도적인 활동들에 대해 나열만 하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이다.

 

텍스트 자료에서, 저는 여러 교회의 여러 수준들에서 행해지고 있는 주도적인 양성 활동들의 사례들로서 여길 만한 일부 프로그램들을 소개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FABC(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내 평신도 및 가정 사무국 (OLF) ? 이 사무국은 아시아 대륙 차원의 조직입니다 ? , 필리핀 링가옌-다구판 대교구의 평신도 양성 센터 (LFC), 아시아 폰다시오 양성 연구소 (IFFAsia), 한국 수원의 평신도 지도자 양성 과정, 성서 사도직 과정들 등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저는 이 모든 양성 프로그램들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생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인 고찰을 하시도록 해 드리기 위해 곧바로 종합해 보고자 합니다.

 

 

2. 평신도들의 선교 노력들

 

선교적인 노력에 관련해서, 아시아의 평신도들은 매우 능동적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케이스로 한국 교회를 들 수 있는데 한국의 평신도들은 이 나라의 교회의 뿌리 자체에서부터 현존하면서 늘 능동적이었습니다.

 

많은 지역교회들에서, 특히 종교적 또는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지닌 나라들에서, 선교활동들은 평신도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또는 소그룹으로 수행되곤 합니다. 다른 지역교회들에서는 평신도 선교 활동들이 사목자들에 의해 잘 조직되곤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교회 협회들이나 운동 단체들이 달성하곤 하는 선교 활동들도 있습니다. 특히 일반 수도회나 선교 수도회와 연결된 평신도 선교 그룹들의 수가 매우 많은데 이 그룹들은 해당 수도회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창설되어서, 그 수도회의 지원과 인도를 받곤 합니다. 그들은 항상 그들의 뿌리가 되는 수도회의 보조 선교 그룹들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때때로, 한 그룹이 발전해서 독립적인 평신도 선교 그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그룹들 중에서 우리는 이 같은 종류의 평신 선교 그룹 2곳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데, 필리핀 가톨릭 평신도 미션 (PCLM), 일본 평신도 선교 운동(PLMM)이 그것들입니다.

 

이 선교 그룹들의 세부 사항들에 대한 소개는 역시 생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텍스트 자료를 나중에 읽으실 수 있겠습니다.

 

 

3. 몇몇 논평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평신도 프로그램들과 평신도들의 선교 노력들에 대해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아시아 평신도들의 양성 프로그램들과 선교 노력들은 매우 다양하고 지역 교회들의 활력을 보여 주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양성 프로그램들에 대한 선교적인 관점, 더 나아가 평신도들의 ‘선교적인’ 노력들에 대한 것입니다.

 

다양한 단체들이 제공하는 양성 프로그램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면 주로 다음 2가지 문제들에 초점이 맞추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들을 심화하고 실행하기

 

2) ‘공동체들의 나눔’으로서의 교회라는 비전에 따라, 특히 아시아적 통합 사목 접근 방법론(AsIPA)을 적용하면서 교회의 삶에서 평신도, 특히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보다 능동적이 되도록 유도하기. 이것은 다른 단체들의 양성 프로그램에서도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똑같은 비전.

 

이 같은 의미에서, 선교 양성 프로그램들은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n)’에서 전달하고자 하는(RMi 33-34),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을 향한 만민 선교(missio ad gentes)의 의미에서의, 선교적인 관점에 명확하게 열려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또 그들 한 가운데에서 행하는 교회의 사도직 행위로서, 이는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며,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복음으로 빛을 받고 변화되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낯선 현실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교적인 관점 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을 향한 만민 선교(missio ad gentes)’는 교회 바깥의 세상을 향하는 교회 외적 선교(ad extra) 행위입니다. 반면에 양성 프로그램들은 교회 내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부 선교 활동들에서조차 선교적인 차원이 결여돼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아시아에서의 선교 정신은 살아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사례를 상기할 수 있는데, 서울대교구의 대주교인 정진석 추기경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신자 수는 ‘지난 10년간(1996-2006)’ 3백만 명에 못 미치던 수준에서 5백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 서울에는 인구의 14퍼센트가 가톨릭 신자들이고 우리는 2020년까지 20퍼센트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하에 <복음화 2020운동>이라고 하는 운동을 개시했습니다.”

 

양성 프로그램들 중에서 우선적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은 그 당시 교회가 필요로 했던 것들과 교회의 현실들에 의해 요구되었던 프로그램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양성 프로그램들이 단연코 선교적인 차원에로 열려 있어야만 하는 때가 왔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과 함께 있는 기쁨을 모든 이들과 나누기 위해서,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의 스토리’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같은 선교적인 비전은 특히 아시아에서 필요한 것인데, 아시아에서는 세상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거나 기껏해야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에게는 무의미한 존재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II. 평신도들을 위한 양성 프로그램에서의 선교적인 측면들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 종교, 정권, 사회 시스템, 생활 기준, 역사, 인종, 언어, 특히 사고방식과 사회의 변화와 변동의 리듬 등의 현실을 고려하면서, 저는 평신도의 양성 프로그램이라면 어떤 프로그램에든 포함되어야 하는 세 가지 측면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우정,  그리고 세속적인 현실에서 누룩이 되는 것, 끝으로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에 유순하게 따르기.

 

 

1.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우정

 

제1회 아시아 선교 대회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생생한 말들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삶이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다가오십니다. 그분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토마,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 메시지는 단순히 선교적인 방법론만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를 선교의 뿌리와 엑기스 (진수)에로 데려가 주는 마음이며 정신으로서, 그 뿌리와 엑기스는 역사의 바로 시초에 성부께서 약속하셨던 구세주,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과 친밀한 우정인 것입니다. 선교사에 대해 정의한다면 선교사란 그리스도께 정복당한 사람,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조건 없이, 끝없이 사랑 받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과 그리스도 없는 삶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선교는 믿음의 문제로서, 그리스도와 우리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믿는 우리 믿음의 정확한 지표가 된다(교회의 선교 사명 11항)”라고 말하는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선언한 바의 의미입니다.

 

선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가는 것’, ‘봉사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 ‘설교하는 것’, ‘문화들’, ‘종교들’ 등의 용어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즉 봉사 받아야 할 사람들, 해야 될 일들, 해결해야 할 문제 등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런 것들은 선교에서 중요한 것들이고 필요한 이슈들이지만 진정한 문제는 그 같은 모든 활동들에 ‘선교적인’ 자질들을 부여하는 토대와 이유입니다.

 

선교의 가장 깊은 이유는 세상의 문제들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신”(요한 3,16) 하느님의 원의(바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파견돼어 선포해야 하는 궁극적인 새로움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저 메신저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몸소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그저 인간의 형태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셨습니다. 모든 이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시려고(요한 10,10) 모든 이가 그분과의 나눔의 삶에 들어오도록 초대하시고자, 모든 이의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함께 나누시면서 인간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류에 대한 그분의 엄청나고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 사랑은 세상과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습니다.

 

이 같은 비전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 평신도 양성 프로그램은 단순히 신학적인 교육이나 사목적인 기술 습득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평신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에로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필수적인 것입니다. 비록 아시아 신자들이 가톨릭 신앙을 실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까지도 당연히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성사 생활과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과 정신은 그리스도로부터 매우 멀어져 있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또 착한 목자에 대한 시편을 암송할 수 있는 사람일지라도 착한 목자 자체는 모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느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 따르면 오늘날 세상에서 ‘그리스도교를 단순히 인간적인 지혜, 웰빙(well?being)의 가짜 과학으로 축소시키려는’ 유혹이 있는 이유입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 11항) 아시아에는 아직도 또 다른 유혹이 있는데, 교회가 직면해야 하는 많은 어려움들과 반대로 인해, 그리스도라는 분을 숨기면서, 선교를 단순히 평화, 정의, 대화, 인간의 존엄성 등 하늘나라의 가치들에만 제한하려고 하는 유혹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가치들은 필요한 것들이고 평신도들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초대하는 가치들이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없이 하늘나라의 가치들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우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교회가 세상에 파견되어, 세상에 선포해야 할 절대적으로 새로운 소식이라는 것은 어떤 가치 체계나 철학이 아니라 바로 한 사람, 그리스도이시니,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인간이 되신 그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사도적 권고 <아시아 교회 Ecclesia in Asia)>를 통해서도 다음과 같이 명확히 확인됩니다. “아시아 대륙의 민족들에 대한 교회의 유일한 기여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민족들을 위한, 한 분이신 구세주, 유일하신 구세주, 그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

 

교회는 교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새 생명을 아시아의 모든 민족들에게 내어주고 싶어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이 같은 믿음은 아시아에서 종종 어려운 환경, 심지어 위험한 여건 하에 수행되는 교회의 복음화 작업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아시아 교회 10항)

 

따라서 평신도들을 위한 양성 프로그램은 이들 평신도들을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우정에로 이끌어 주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나는 그분을 만났다.”,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2티모테오 1,12 참조) 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이 같은 지식은 애정 어린 지식으로서, 평신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때문에 소수 그룹에 속하게 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고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러면, 이들 평신도들은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평신도들처럼, 그리스도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 정말로 밖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당시 예루살렘에 교회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사도들 말고는 모두 인근 지방으로 흩어졌다고 나옵니다. … 그래서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고 나옵니다 (사도행전 8,1.4).

 

 

2. 세속적인 현실에서 누룩이 되기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평신도들의 복음화 활동의 영역은 정치, 사회, 경제학, 문화, 과학, 예술, 국제 구조, 매스 미디어 등의 광대하고 복잡한 세계라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세계는 또한 인간적인 사랑, 가정, 자녀 교육, 청소년들, 전문 직업의 일들 등의 현실들도 포함합니다. 많고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이로 인해 그토록 많은 혼돈 상황이 초래되고 있는 오늘날 평신도들의 복음화 행위는 이 같은 세속적인 현실들의 영역에서,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남녀 평신도들은 여러 어려움들과 위험들 때문에 이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한편 다른 평신도들은 유혹들로 인해 길을 잃고 있습니다.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에 따르면, 두 가지 유혹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교회 봉사와 업무에만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갖는 유혹으로서, 그러다가 몇몇 사람들은 전문 직업 분야와 사회 생활, 정치 문화계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의무에는 능동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유혹은 신앙과 삶을 부당하게 분리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유혹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다양한 상황에서 복음을 실제로 생활화하는 것을 복음의 수용과는 별개의 것처럼 분리시키려는 유혹입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2항)

 

보편 교회의 맥락에서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제시한 유혹들은 아시아에서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첫 번째 유혹은 평신도로 하여금 사회에서 능동적인 모습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 공동체들은 분명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봉사뿐만 아니라 많은 평신도들의 봉사도 필요로 합니다. 이 같은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평신도들 또는 평신도들의 대다수가 봉사라는 것을 교회 공동체의 맥락에서만 생각하고 교회 공동체의 경계선 밖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을 생각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사회라는 광활한 들판은 다른 모든 세력들에게는 열려 있으면서도, 평신도들의 부재(不在)로 인해, 복음에는 닫혀 있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혹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무의미하고 하찮은 존재가 되게 만듭니다. 이 경우 평신도들은 세속적인 현실들에 현존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면서,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어 주기는커녕, 자신들의 행동, 선택 그리고 생활양식에 있어서 환경에 뒤처집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현존은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따라서 양성 프로그램들이 평신도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현실들 가운데 그들의 특정 분야에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그들의 책임에 대해 인식하도록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평신도들은 세속적인 현실들 속에서 선교적인 헌신을 하면서 개인적인 것과는 관계없는 삶의 측면들만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평신도들은 그와 같은 세속적인 현실들을 다루고 있는 사람들과 대면해야 하고, 종종 세속적인 마음과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 대면해야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평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에 의해 변화되는 열린 생각과 애정 어린 마음을 갖도록 요구하는데, 이는 이 현실들에 빛을 비추어 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평신도들은 사회에서 빛과 소금, 누룩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종교적, 정치적 맥락에서 보면, 세속적인 현실들 속에서 복음의 이름으로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여러 위기와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또 세속적인 현실들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능동적인 모습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관점에서 양성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조차, 여러 위기와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끈기 있게 책임을 다하고 복음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용기의 표시와 신중한 감각, 그리고 특히 성령의 힘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3.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에 유순하게 따르기

 

이 같은 고찰에 대한 모든 교회 문헌들, 예를 들어 <평신도 그리스도인>, <교회의 선교 사명>, <아시아 교회> 등의 문헌들은 모두, 교회의 삶과 선교에서의 성령의 현존과 활동하심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보다 단순화하기 위해, 저는 <아시아 교회>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짧은 내용을 그저 상기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물’(요한 4,10-15 참조)에 대한 목마름이 아시아 사람들과 문화들, 종교들 안에 깊이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상기시켜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바에 순명할 때 비로소 자신의 선교 사명을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아시아 교회 18항)

 

흔히 아시아 교회는 3중의 도전들에 직면해야 한다는 말들을 하곤 합니다. 즉 문화들의 도전, 종교들의 도전, 가난한 사람들의 도전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들과의 대화를 배워야 합니다. 방금 언급한 도전들의 중요성을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저는 아시아에서 교회가 응답해야 하는 최고의 도전은 성령의 도전이라고 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날 아시아에서 눈에 띄게, 또 강력하게 현존하고 계시며 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에 성령께서 그렇게 현존하셨던 것과도 같습니다.

 

사도적 권고 <아시아 교회>에 따르면, “성조들과 예언자들의 시대에 아시아 땅 위를 감돌고 계시던 성령,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시대에는 훨씬 더 강력하게 아시아 땅 위를 감돌고 계시던 성령께서는 이제 아시아 대륙의 민족들과 문화들, 종교들 가운데에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증거를 보다 강화시키시면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움직이시고 계십니다.(아시아 교회 18항)

 

사도적 권고 <아시아 교회>에 나오는 가르침은 아시아 교회의 삶과 선교에 의해 확인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라면 충분할 것이고 저는 이 두 가지 사실들 가운데 한 사실에 대한 증인입니다.

 

여러 해 전에 저는 인디아의 란치(Ranchi) 대교구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주교 님은 텔레스포어 토포(Telesphore Topo) 추기경 님이십니다. 제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한 본당의 두 명의 사제와 한 명의 신학생이 살해되었습니다. 장례미사에는 그 신학생의 친척들을 포함해 본당 신자들, 그리고 그 신학생의 출신 마을의 모든 힌두교 신자 주민들로 성당이 온통 가득했습니다.

 

그 신학생은 힌두교에서 개종한 사람이었고 자기 집의 외아들이자, 유일한 개종자였던 것입니다. 힌두교 신자 마을 주민들 모두가 결속의 차원에서 거기 장례식에 왔고 장례미사 때 추기경 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힌두교 신자 마을 주민 전체가 추기경 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거기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정상적인 상황일 경우, 아무도, 대주교조차도, 힌두교 신자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 본당의 가톨릭 신자들은 무서워하거나 좌절하기는커녕, 광신적인 힌두교 살인자들의 계산과는 정반대로 신앙 안에서 훨씬 더 용감해지고, 더 한결같아졌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로마서 11,33)

 

두 번째 사실은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이고 한 베트남 주교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계속 베트남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언급할 가치가 있는 하나의 징표가 있다면 1988년 117명의 베트남 순교자들의 시성 이후 곧바로 이뤄진 수천명의 소수 종족들의 대량 회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신기한 것은 많은 이들이 필리핀 마닐라의 개신교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고 시인했지만 베트남에서 가톨릭 신자로 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개신교 신자들이 씨를 뿌리고 가톨릭 신자들은 추수를 하는 셈입니다. 멀리서부터 울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닿으면서, 모든 것이 궁핍한 상태로 미래도 없이 산골에 떨어져 살고 있던 이 사람들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선교에로 이끌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또는 <교회의 선교 사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처럼 “성령께서는 참으로 교회의 선교 전체의 주된 동인이십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 23항),  “성령께서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부여해 줍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 24항). 3중의 도전들의 맥락에서는, 아시아 교회로 하여금 3중의 도전들과 다른 모든 도전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감지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그 도전들에 응답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라고 우리는 유추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확언은 평신도 양성 프로그램을 위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평신도 양성 프로그램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활동하심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분의 움직이심에 유순하게 따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영감과 활동하심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프로그램이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한 식별 능력은 세속적인 현실들의 애매모호함 속에서 활동해야 하는 평신도들에게는 특별히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

 

아직 해야 할 말들이 많습니다만, 결론으로서 저는 제1차 아시아 선교 총회 메시지의 몇 구절들을 다시 울려 퍼지게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분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 토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고 하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십니다. 그들은 그분을 알고 봅니다. 그분께서는 평화와 화해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믿지 않던 제자들이 변화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들 제자들의 믿음의 차원을 확장시켜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더 나아가 그들의 진실성을 시험하시고자 하십니다. 바로 그들을 선교 사명에로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15),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마태오 28,19),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 4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의 스토리를 이야기하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그들은 가깝고 먼, 이곳 저곳으로 갑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으로, 베드로와 바오로는 로마로, 토마스는 인도로.

 

부활하신 분과 맞닥뜨리는 것은 참으로 선교 사명에로 파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시아의 모든 평신도들이 예수님의 이 신비스런 부르심을 들을 수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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