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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박종구 신부가 쓰는 다시보는 천주실의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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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31 ㅣ No.390

[다시보는 천주실의] (1) 그리스도교 신학과 중국 유학과의 만남

 

 

올해는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 신부의 선종 400주년(5월 11일) 을 맞는 해입니다. 가톨릭신문은 리치 신부의 삶과 영성을 재조명한다는 취지에서 그의 저서 「천주실의」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풀어 쓴 ‘박종구 신부의 다시 보는 「천주실의」’를 연재합니다. 집필을 맡은 박종구 신부는 예수회 소속 사제이자, 현재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예수회 후배 사제가 예수회 400년 선배 사제의 여정을 따라갈 이번 기획에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필자가 마태오 리치(Mateo Ricci, s.j., 1552~1610)의 이름을 동양(중국)의 선교사로 처음 대면한 때는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은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지만, 수련생활을 갓 시작했을 무렵 수련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거인들의 세대」(George Dunne, Generation of Giants, Univ. of Notre Dame Press, Indiana, 1962)에서 리치의 이름을 발견했다. 이제 갓 시작한 젊은 수련자에게 이 책에 등장한 인물들은 온갖 흥미와 경탄을 자아내며 수도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기억나는 리치 신부는 신학자요 과학자였으며, 중국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그리스도교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써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중국문화 안에 소개하고자 했던 인문학적 시도를 했던 선교사였다. 여기에 소개할 「천주실의」는 인문학적 독서의 기반이 넓고 두터웠던 중국사회에서 가능했던 대화의 통로였다. 

 

「천주실의」는 현대와 유럽의 중세라는 시대적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400여년이 지난 21세기 초반에 이 작품이 현대의 그리스도 신앙에 어떻게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천주실의」는 서구가 그리스도교 문명의 핵심을 동아시아에 소개하는 사건이고,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새로운 사상을 소개받는 자리였다. 이 관점에서 「천주실의」를 읽는다면, 20세기 중반 이후 그리스도교의 토착화가 화두가 된 시대에 리치의 저서는 좋은 연구 자료가 된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문명과 문명의 만남이란 관점이 「천주실의」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천주실의」는 마태오 리치가 중국 도착 십여 년 후인 1595년부터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해 우여곡절 끝에 1603년에 출간한 한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본래 유학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소개하려는 의도로 집필한 저서였지만, 중국에 파견되는 유럽의 선교사들에게 중국의 정신을 소개하는 교과서적인 입문서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입문서 이상으로 교리적인 성격이 농후한 이유는 그리스도교를 유학자들에게 소개하고 그들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별히 유학자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당시 사회의 주류층이 유학자들이었기 때문이었고, 리치는 자신을 ‘서양에서 온 선비’(서사, 西士)로 소개했다. 명말(明末)의 문인 서광계(徐光啓, 1562~1633)는 「천주실의」를 읽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천주실의」를 통해 소개된 그리스도교가 중국의 유학자에게 ‘새로운’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종교였음을 말해 준다. 이 작은 입교사건은 리치의 신학이 중국의 유학을 만난 전형적인 예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오래 전 수련자의 눈으로 발견했던 열정에 덧붙여 「천주실의」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읽어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한 때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23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 천주(天主), 만물의 주재자

 

 

「천주실의(天主實義)」는 한자(漢字)의 뜻만 새긴다면 ‘천주의 참된 의미’ 정도로 옮길 수 있을 듯하다. 리치가 이 책을 저술할 때 하느님 존재의 의미를 소개하는 것이 그만큼 일차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리치는 어떤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했을까? 라틴어를 신학언어로 사용했던 세계에서, 전혀 다른 표의문자를 지닌 사유세계로 들어왔을 때 용어의 사용법은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리치가 데우스(Deus)를 지칭하기 위해 선택한 ‘천주(天主)’는 과연 의심 없이 받아들일만한 표현이었을까?

 

공자(孔子)시대만 하더라도 인본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유가의 전통은 귀신이나 천(天)을 해설하기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중요시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성인군자(聖人君子)의 도(道)를 잇는 전통이 생겼고, 이 전통은 도통사상으로 불렸다.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는 하늘-천(天) 사상은 원시유가에 나타나는 일종의 방외적 주제였다. 그래도 인격적인 의미나 형이상학적 의미를 나타내는 천(天) 혹은 천명(天命)사상이 고대세계에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자는 자신의 자전적 고백문에서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다(五十有五而志于學… 五十而知天命)(爲政)’고 했다. 또 중용(中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이 명한 바를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부른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天)을 주제로 하는 표현들은 헤아릴 수 없지만, 현대의 종교인들처럼 천(天)을 기도의 대상으로 명확하게 지시하는 차원은 아니다. 

 

공자 이전의 고대세계에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천(天)은 인격적 의미보다는 실체적 의미가 강하게 암시된다. 이 전통은 공자 이후 진한시대를 거쳐 송명유학에 와서는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리치가 도착했던 시대가 16세기말이니 천(天)의 관념은 종교에서 의미하는 인격(人格) 개념과는 멀다고 하겠다. 따라서 리치의 천주(天主)는 자연스럽게 천(天)의 실체적 개념 위에, 주(主)를 덧붙임으로써 천(天)의 주재자(主宰者)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천(天)은 형이상학적이며 동시에 자연천의 개념이며, 천주(天主)는 지상의 존재에 대비되는 천상적 존재로서 인격적 개념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하느님은 창조(創造)와 주재(主宰)의 양가적 의미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이런 의미를 염두에 둘 때 천주는 의미상 만물의 주재자라는 성격은 드러내지만, 창조의 존재라는 관념은 희박함을 알 수 있다. 

 

일반 교리서가 처음부터 창조주 하느님을 천명하면서 시작하는 것처럼 「천주실의(天主實義)」 상권의 첫 장에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제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서의 하느님을 천주(天主)로 부르지만, 천주는 창조주이며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인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30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3) 천지만물을 ‘처음’ 창제하고 주재하는 분

 

 

그리스도인은 사도신경 첫머리에서 ‘나는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로 고백한다. 말하자면 창조주 개념은 신앙의 언어에 속한다. 신앙을 전제로 할 때 창조 개념이 의미를 지닌다. 창조사상은 근본적으로 신앙에 근거한 신조이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우주만물이 모두 하느님의 작품이며, 어느 생명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존재이자 생명인 것이다. 

 

자칭 서양선비(西士)인 리치는 「천주실의」를 통해 하느님을 ‘천지만물을 처음 창제하시고 때때로 주재하시는 존재(始制作天地萬物而時主宰者)’라고 정의한다. 이에 앞서 중국선비(中士)의 입을 통해서는 ‘처음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을 지으시고 주재하고 기르시는 존재(其始制乾坤人物而主宰安養之者)’라고 표현했다. 천지(天地)와 건곤(乾坤)을 창조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창세기의 하느님이시다.

 

성경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실 때’가 이 ‘처음(始)’이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 시작할 때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창세기가 천지창조를 묘사할 때 ‘태초에’(Bereshit)라고 표현한 바로 그 단어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에 신앙이 아니면 수긍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이 믿지 않으면 존재를 말할 수 없는 하느님, 이런 의미에서 리치는 ‘천하에 이 사실보다 더 자명한 것은 없다(天下莫著明乎是也)’고 선언한다.

 

리치는 이에 덧붙여 창조를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하나는 ‘제작천지만물(制作天地萬物)’ 혹은 ‘제건곤(制乾坤)’이다. 제작(制作)이나 제(制)는 서구적 의미에서 기하학적 이성(理性)을 전제한다. 또 하나 주의할 표현은 ‘하느님께서 천지를 개벽하고 사람과 만물을 강생시키신 때부터(自天主開闢天地降生萬物)’에서 보듯, 개벽(開闢)과 강생(降生)이다. 개벽(開闢)은 고대 중국신화에서 반고씨(盤古氏)가 천지를 창조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며,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열린 우주의 시초를 이르는 말이다. 강생(降生)은 태어남을 일컫는 단어이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위에서 아래로’ 태어난다는 의미를 지닌다. 창조의 의미가 유일신론(唯一神論)에 익숙한 서양 신학에서 ‘무(無)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로 이해됐다면, 한자문명권은 분명 창조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존재와 같은 자명한 사실은 그대로 유효한가? 자명한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리치는 세 가지 예를 들어 증명할 근거를 마련한다. 첫째는 양능(良能)이요, 둘째는 만물은 하느님에 의해 위치나 운동이 정해지는 것이고, 셋째는 모든 존재는 위계적 질서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더 높은 존재가 있다는 주장이다. 첫째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능력(不待學之能爲)’을 말함이요, 둘째는 하느님이 모든 운동의 최종 원인이며, 셋째는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최종 근거임을 뜻한다. 이제 하느님의 존재가 비유적으로 충분히 설명되었는가?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6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4) 창조계 질서와 신 존재 증명

 

 

‘하느님은 창조주’란 정의는 신(神) 존재의 주도적 성격을 드러낸다. 창조는 신 존재를 제외한 모든 존재가 피조성(被造性)을 전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른 존재에 의거해 존재하기 시작하는 창조물은 자신의 근거를 밖에 둔다. 신 존재와 창조된 존재의 경계는 존재의 자존성 여부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피조물 존재의 의타성(依他性)과 달리 신은 스스로 처음부터 존재하는가?

 

신 존재의 증명에 관한 질문과 대답은 리치가 살았던 시기의 유럽 상황과 관련이 있다. 중세(中世)를 앞서는 고대(古代)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참 하느님과 참 인간), 하느님의 삼위(성부와 성자와 성령)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깊은 숙고와 논쟁을 거쳤다.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된 시점에서 유럽의 중세가 시작됐고, 중세 말 종교개혁과 근대시기를 맞았다. 리치가 교육 받은 신학은 중세의 정점에서 종교개혁을 맞은 시기의 신학사조와 맞물린다. 그가 살았던 시기에 지배적인 신학사조는 스콜라주의(대략 1200~1500년)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인문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근대 시기가 시작되기 전 중세는 학문의 발전을 지속시킬 ‘대학’이 유럽 전역에 생겨나면서 인문주의의 발흥을 준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리치에게 익숙한 당시의 신학사조는 어떠했을까? 신 존재 증명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여러 명의 신학자들을 거명할 수 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둔스 스코투스(1265~1308), 오캄의 윌리엄(1285~1347) 등 이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특히 중세 이후, 제한적인 의미에서 가톨릭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는 신학교과서로도 불리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첫 권 두 번째 질문(Q2)에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하려고 했을까.

 

무엇보다도 「천주실의」가 창조계의 질서를 하느님 존재의 증명을 위한 전제이며 배경으로 이해하듯, 이 전제에서 출발하는 토마스는 신 존재 증명을 ‘다섯 가지 방법 혹은 길’ (quinque viis)로 제시한다. 첫째는 운동과 변화의 증명으로, 둘째는 상이한 원인들의 관계, 즉 인과 개념으로, 셋째는 우연한 존재자들이 있음으로, 넷째는 상이한 존재들의 단계와 인간의 가치체계에서, 다섯째는 목적론적 증명 자체로 하느님 존재를 증명한다. 사실 이러한 증명은 자연계, 곧 창조계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체험을 생각하지 않으면 제시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창조계)의 최종 단계를 혹은 질서의 최종 근거를 하느님과 동일시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일상 체험에서 출발해 이성적 추리의 결론으로 마감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증명은 우리의 하느님 체험을 일상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13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5) 천주 존재, 만물의 최초 원인으로 제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 존재 증명의 길을 통해서 창조와 관련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적으로 가리킨다. 첫째는 창조된 존재들을 통해 체험적·간접적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둘째는 창조된 존재들의 ‘존재이유(所以然)’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체험적·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하느님은 무조건적으로 최종 실재인가? 토마스 신학의 전제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그분은 현존하시는 만물의 제1근거다. 동시에 만물의 최종근거로서 ‘그 자체로 필연적인 부동의 제1원리’(Primum principium immobile et per se necessarium)다. 이 신관(神觀)은 모든 변화, 곧 시간과 역사를 논리적으로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느님의 주도권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을 출발해 인류의 역사를 거쳐 하느님께로 귀환한다. 변화를 모르는 신 존재가 변화의 총체인 역사의 근거며 만물의 근거다. 그러므로 하느님 체험은 간접적으로만 주어진다. 하느님 존재는 특성상 인간 체험의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은 까닭이다. 

 

일종의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 혹은 Via negativa)이 토마스의 뇌리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느님은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 인식과 체험의 직접적 대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토마스의 하느님은 창조와 실제적 관계가 아닌 ‘근거의 관계’(Relatio rationis)만 가진다. 이 관계에서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존재근거로 사물에 절대적으로 내재(內在)한다. 따라서 창조된 만물은 존재자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실체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것의 원인이며, 창조물에게 창조물 자신보다 더 내밀한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이 인간과 세계 안에 내재하심은 하느님 존재의 직접성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하느님 존재가 간접적으로만 주어진다. 따라서 창조물은 인간 체험의 직접적 대상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하는 중재의 역할을 한다.

 

리치는 사물의 존재이유를 두고 네 가지로 요약했다(試論物之所以然有四焉). 운동인(作者), 형상인(模者), 질료인(質者), 목적인(爲者)이 그것이다. 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운동인(The efficieint cause)은 ‘사물을 만들어 사물이 되게끔 하는 것(造其物而施之爲)’이다. 형상인(The formal cause)은 ‘사물의 모습을 드러내 본래의 범주에 자리 잡게 만들어 다른 부류와 구별되게 하는 것(狀其物置之於本倫, 別之於他類也)’이고, 질료인(The material cause)은 ‘사물 본래의 물질적 재료로써 형상인을 수용하고 있는 것(物之本來體質, 所以受模者也)’이다. 그리고 목적인(The final cause)은 ‘사물이 지향하고 소용되는 바를 정해 주는 것(定物之所向所用也)’이다. 형상인과 질료인은 본래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니, 운동인과 목적인만 사물 외적인 것으로 천주가 사물의 원인이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기반에서 리치는 천주의 존재를 ‘만물의 원인(物之原)’이요 천지만물의 ‘원인 중의 최초원인(所以然之初所以然)’으로 제시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20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6) 삶의 영역에서 하느님 체험의 의미

 

 

간단하게나마 사물의 존재 이유를 토대로 삶의 영역에서 하느님 체험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 토마스에 따르면, 간접적 하느님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계는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중재 역할을 한다. 인간은 독창적으로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현실에서 주어진 사건에 부딪쳐 의미와 무의미를 식별하고 희망과 절망을 경험한다. 의미와 무의미를 구별하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의 체험까지 확장되지만, 인간은 중재된 사물과 이웃의 만남 속에서 현재적으로 삶의 의미를 결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근거한 토마스의 말대로 신(神)이 모든 변화와 운동의 최종 원인으로 이해된다면, 신은 변화를 거스르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최종적 원인으로 인식되는 신은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은 늘 사물과 인간의 만남을 중재로 간접적 인식만을 허용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신은 (창조의) 대상과 엄격하게 분리돼 있으므로 창조의 결과로 더 얻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창조계 안에서 초월적 체험은 직접적으로 하느님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인간 존재와 관계없이 존재하며, 인간에게 하느님 인식과 체험은 어쩔 수 없이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토마스 신학은 부정신학(否定神學)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정신학은 신적(神的)이 아닌 것을 하나씩 걷어냄으로써 신적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토마스의 하느님 존재는 이렇게 모순(矛盾)처럼 보일 수 있다. 역사에 개입해 오시는 하느님이 역사를 거스르는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마스적 하느님 이해를 넘어서 역사적 실존의 하느님을 더 분명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토마스는 하느님의 내재성(內在性)과 초월성(超越性)의 양면성을 주장하면서 역설적 진술을 감행한다. 하느님은 인간보다 더 내재적이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초월적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창조계에 내재하면서 창조계를 초월(超越)한다. 하느님이 만물에 내재하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유사성을 언급할 수 있다면, 만물을 초월해 존재하는 까닭에 그 차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하다. 교회는 토마스 출생 이전에 이미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더 큰 비유사성이 고수되지 않고서는 이 양자 사이의 유사성은 확인될 수 없다(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년)’고 선언했다.

 

그래서 창조계 안에서 신적이라 발설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신적 체험을 참으로 진술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오직 한 분 하느님의 존재는 창조계에서 비견될 어떤 비유로도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분은 유일하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표현하고 지지하는 간접적 개념으로만 가능하다. 리치는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을 ‘사물의 보편적 본래의 근원(物之公本主)’ 혹은 ‘만물의 모든 덕을 갖추고 있는(備有衆物德性)’ 존재, ‘보편적 지존하신 존재(公尊者)’로 묘사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27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7) 하느님의 존귀한 바를 다 캐낼 수 없다

 

 

우리가 체험하는 하느님은 참으로 초월적이며 내재적이다. 이 양면성을 근거로 하느님을 창조주로 부른 이유는 세상 창조를 언급하기 위한 것이며, 세상 창조는 중세적 의미에서 존재의 최종 원인을 주장하기 위한 서술이었다. 사실 하느님의 유일성은 존재의 궁극적 원인으로 해설되기도 하지만, 신 존재 증명의 길이기도 했다. 마침내 천주(天主)의 신명(神名)이 하느님 존재의 유일성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기술된다. ‘오직 한분 천주만이 태초에 하늘과 땅과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때에 맞추어 주재하시고 생존케 하시며 편안케 하신다(獨有一天主始制作天地人物 而時主宰存安之)’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만물의 처음이요 만물의 뿌리이다(天主則無始無終而爲萬物始焉 爲萬物根 焉). 그러므로 하느님이 없으면 만물은 존재할 수 없고(無天主則無物矣), 만물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생겨나지만 하느님은 (다른 무엇에서 비롯해) 생겨나지 않는다(物由天主生 天主無所由生也). 리치의 서술을 상기하면서 요한복음서의 말씀의 존재를 들어보라.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시작도 끝도 없는 한 분 하느님의 무한성이 다시 논의의 요소가 된다. 동서남북(東西南北)과 상하(上下)로 경계 지을 수 없는 무한한 존재는 창조계의 제한적 성격 안에서 그 위대함의 전모를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리치는 하느님의 무한성을 드러내기 위해 부정신학의 전개 이유를 제시한다. 하느님의 참 모습이나 특성을 드러내려면 ‘아니다’ 혹은 ‘없다’로써 말할 수밖에 없다. 창조계의 어떤 존재로도 신 존재의 성격을 궁극적으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창조주이신 신이 ‘(무엇)이다’라고 말한다거나, ‘(무엇을)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사실과 더욱 멀어지기 때문이다(苟以‘是’以‘有’, 則愈遠矣). 만약 신을 창조계의 무엇에 비유한다거나 소유를 나타낸다면 그것은 은유나 상징에 불과한 표현일 뿐이다. 인간은 신 존재의 신비를 암시적으로 드러낼 수는 있으나, 자기의 인식 안에 그 내용을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논의는 토마스의 「신학대전」 첫 권을 보는 것만으로 리치가 얼마나 토마스 신학을 가까이 따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토마스는 신 존재의 무한성을 논하기 위해 신의 속성(屬性)을 철학적 이해를 전제로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 유무를 출발점으로, 그분의 단순성, 완전성, 선성(善性), 무한성, 내재성, 영원성, 단일성 등을 차례로 논의한다. 사실상 토마스의 논의는 신 존재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신 존재의 무한성은 인간의 인식 차원을 초월하는 까닭에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리치는 이런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그저 ‘하느님의 존귀한 바를 다 캐낼 수 없다’(不能窮其所爲尊貴也)고 단순명쾌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존재의 궁극성을 말하기 위해 어떤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까? [가톨릭신문, 2010년 7월 4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8)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느님 존재의 무한성

 

 

하느님 존재의 궁극성을 말하기 위해 리치는 우주적 원리로써 존재의 최종근거를 나타내는 도(道)와, 이에 근거한 윤리적 개념으로써 덕(德)을 넘어서야 할 필요를 느꼈다. 리치는 ‘하느님은 도와 덕이라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도와 덕의 근원이다’(非所謂道德也, 而道德之源也)라고 말한다.

 

물론 리치의 이런 표현은 아직 도와 덕이 가리키는 개념적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어인 도(道)와 덕(德)을 뛰어넘는 존재를 하느님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서양과 동양이 서로 다른 사유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한 논의 없이 전개하는 호교적 수준의 주장은 다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런 주장을 충분히 검토했거나 다수가 수긍할 만큼 진전된 논의를 쉽게 들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부정신학의 관점에서 출발한 하느님의 무한성 이해를 동양의 사고에 적용하기 위해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있다.

 

리치는 동양의 경전에서 나타나는 개념들의 경계를 어떻게 넘어서야 했을까? 사실 이런 작업은 후대에 남겨진 지난(至難)한 일로써 동서양의 사유방식이 어떻게 만나는지, 어디에서 상호 이해의 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 오랜 숙고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면 동양의 세계에서 하늘과 땅은 창세기의 언급과 달리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크고, 일상의 영역을 넘어서는 무한대를 가리키는 은유 중의 은유이다.

 

그래서 리치는 서양의 사유 틀 안에서 하느님의 무한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발언을 한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지만 그 높고 밝고 넓고 두텁기로는 오히려 하늘과 땅보다 더 합니다’(非天也非地也 而其高明博厚 較天地猶甚也).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느님을 ‘수용하고 실을 만한 공간은 없다’(無處可以容載之). 리치는 은유적 의미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하느님 존재의 무한성을 제시하기 위해 동양적 공간 개념을 일방적으로 깨뜨린 것이다. 

 

또 공간적 크기만 하느님의 무한성을 나타내는 요소는 아니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운동의 최초의 원인이 되는’(不動而爲諸動之宗) 하느님은 시간적으로도 무한한 존재이다. 그분은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無往無來), 시작도 없고(無始) 마침도 없다(無終). 그분의 지혜는 만세 이전의 과거나 만세 이후의 일일지라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과 같다(其知也…而往之萬世以前, 未來之萬世以後…如對目也).

 

시공간적으로 하느님의 무한성은 창조계의 모든 개별 존재자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하느님의 속성이다. 동시에 만물과 함께 만물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은 창조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는 분도 아니다. 그렇다. 리치의 하느님은 창조계의 모든 피조물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는다. 하느님은 창조계의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의 완성을 이룰 수 있도록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극히 제한적인 인간 인식의 차원에서 보면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하느님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존재로 인간에게 오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이 미물의 존재자들과 관계하시는가? [가톨릭신문, 2010년 7월 11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9)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 하느님을 고백하는 신앙에 이미 예고돼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신의 모습과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다.(창세 1,27) 피조의 존재는 단순히 창조한 뒤 무가치하게 버려질 존재는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4,16)란 명제는 창조계를 위하시는 하느님 존재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이런 의미는 한자문화권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리치의 제시는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변화를 겪으면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중국문화의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닦는 배움’(修己之學)을 통해 ‘공을 이룬다’(修己功成)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불러 성현군자(聖賢君子)라고 일컬어 왔다. ‘덕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행복’(成德乃眞福祿)이며 인생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가 한자문화권에서는 인간의 완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는 길은 목표가 있고, 비로소 목표에 도달해서야 멈추게 된다. 우리들이 자신을 닦아 나가는 길은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吾修己之道 將奚所至歟).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먼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같은 실존적인 질문에 대해 리치는 서사(西士)와 중사(中士)의 문답을 통해 그 답의 일부를 은연중에 내비친다.

 

인간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고,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다. ‘안으로는 정신적 영혼을 받고 태어났고, 밖으로는 사물의 이치를 볼 수 있다’(內稟神靈 外覩物理). 일이 나타난 단서를 보고 미루어 그 근원을 알 수 있고, 결과를 보고 그 원인을 추리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바른 도리를 받아서 사물을 궁구하기 때문에’(人稟義理以窮事物) 이치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군자는 이치를 가장 주요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치의 체(體)와 용(用)은 너무나 넓어서 성현이라도 다 알 수 없다(理之體用廣甚 雖聖賢亦有所不知焉).

 

우리는 중국선비의 말을 통해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없고, 밖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체용(體用)의 논리를 듣는다. 인간의 지와 무지가 도(道)의 체용 앞에서 멈추고 만다. 만약 도(道)가 인간이 추구하는 최후의 존재와 현상의 근거라면, 그리고 이런 가정이 성립된다면, 서양선비의 말을 통해 이런 추구가 단번에 흔들리게 됨을 알게 된다. 데우스(Deus, 하느님의 라틴어 표기), 곧 천주(天主)의 존재는 이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 없다고 서양선비는 주장하는 것이다. 중국선비의 논리가 아래에서 또는 밑에서 출발해 꼭대기에 도달하는 논리라면, 리치의 논리는 위에서 아래로 또는 높은 곳에서 밑으로 치닫는 것이다.

 

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창조계의 피조물들은 창조의 목적과 질서에 따라서, 그리고 창조자의 섬세하고 신비한 배려에 근거해 존재한다. 창조주는 피조물들이 자기 목적을 실현하도록 하는 힘이며 근거이다. 리치가 하느님이 유일하신 분이며 창조주이심을 논증하는 과정은 곧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해설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창조 후에 창조계와 무관한 관계를 유지하신 분(理神論·Deism)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의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각 개별 존재의 삶에 참여하는 존재인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7월 18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10) 한자문화권의 인간관과 그리스도교적 인간관

 

 

인간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한자문화권에서 인간의 완성은 무엇보다도 성현군자(聖賢君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도덕적·윤리적 완성은 인간의 미래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완성을 현실에서 추구하려는 수덕지향적(修德指向的) 의지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현실의 인간은 누구나 성현군자의 길을 이상(理想)으로 걸어갈 수 있으며, 이상을 현실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지극한 현실지향의 목표를 갖는다. 

 

리치는 ‘아래’에서 출발하는 이상주의적 인간관을 부정하지 않지만, ‘위’에서 출발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언급하며 신적(神的) 지혜의 속성을 말한다. 하느님은 성인의 지혜를 훨씬 초월해 계신 존재로 인간의 이상적 인물인 성현군자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無往無來) 존재, 시작도 마침도 없는(無始無終) 하느님은 무엇으로도 다 채울 수 없는(無處可以容載之) 분이시나, 오히려 모든 곳을 다 채워주는(無所不盈充也) 존재이다. 그분의 능력은 망가짐도 쇠함도 없으며 없는 것을 있게 할 수 있는(其能也無毁無衰, 而可以無之有者) 존재이다. 하느님의 지능은 몽매함도 없고 오류도 없어 만세 이전이나 만세 이후의 미래일지라도 그분의 앎에서 벗어날 수 없고, 마치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과 같다(其知也無昧無謬, 而已往之萬歲以前, 未來之萬歲以後 無事可逃其知 如對目也). 과연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존재를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애써 도달해야 할 덕목(德目)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개개의 창조물에게 베푸시는 은덕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은덕은 광대해 제한도 없고 막힘도 없으며 그 어떤 부류에도 편견 없이 미치지 않음이 없다(其恩惠廣大 無壅無塞 無私無類 無所不及). 하늘과 땅 안에 있는 착한 본성과 착한 행동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게 없다(夫乾坤之內 善性善行 無不從天主稟之). 그러나 이 모든 은덕도 하느님 존재를 생각하면, 물방울 하나를 바다에 비교하는 것에도 미치지 못한다(雖然 比之于本原 一水滴於滄海不如也). 하느님의 복덕은 온누리에 꽉 차서 보탬도 덜어냄도 가능하지 않다. 강이나 바닷물은 다 길어낼 수 있고, 바닷가의 모래도 다 헤아릴 수 있을지언정 하느님은 온전히 밝힐 수 없는 존재(天主不可全明)인 것이다. 

 

인생의 이상을 자신의 노력에 근거한 인간의 완성에 목표를 두고 있는 인문주의에서, 신의 존재는 사실상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공자 이후 일방적인 유교적 인문주의화(人文主義化)의 과정을 밟아온 유교문명권에서 유교적 이상을 초월하는 인격주의에 근거한 신 존재의 소개는 새로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치가 만난 당시의 중국문명은 유교·불교·도가 사상이 병존하며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 없이 그리스도교를 소개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리치는 그리스도교를 소개하면서 유불도(儒佛道)의 삼교사상(三敎思想)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가톨릭신문, 2010년 7월 25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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