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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생명을 위한 선택, 탈GMO: 생명의 밥상을 차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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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돋보기 - 생명을 위한 선택, 탈GMO] 생명의 밥상을 차리자
바벨탑의 벽돌과 역청
수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기술과 과학이 발전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기묘하고 창의적인 생각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은 새로움이 우리가 걸려 넘어지게도 하며, 우리 주변의 많은 것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아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거나 스스로 뛰어나다고 자만한 이유는 벽돌과 역청을 다루는 기술 때문이었습니다(창세 11,1-4 참조). 지난날의 한 파편처럼 볼 수 있지만, 인간의 역사는 이를 반복해 왔습니다. 스스로의 기술로 생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거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만은 유전자 조작을 통한 농산물, 곧 ‘유전자 변형 식품’(GMO)을 만들어 내는 데서도 깊이 드러납니다.
교회는 인간이 과학적 기술을 사용하는 데 다른 생명체에 대한 존중과 함께 세심한 배려와 스스로의 한계를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417항; 「사회적 관심」 28항 참조).
우리가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소유이자 종임을 자처하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전자 변형 농산물을 만들어 내는 시도는 생명에 대한 권리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생명을 마구 약탈할 권리도 지녔다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기술로 말미암은 생명의 죽음을 목격한 뒤에 많은 과학자들이 뒤늦게 했던 말이 ‘당시의 기술로는 그것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백하기에는, 다시 말해 이미 많은 것이 지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깨달음은 너무 늦어 버린 것입니다. 더욱 세밀하고도 생태적인 시각으로 성찰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 그리고 우리 인간을 만드신 이유를 곰곰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찾지 않으면, 우리가 갈 곳을 잃은 채 파국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신 이유는 세상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보시니 좋은’(창세 1장 참조)세상이 제대로 지켜지며 보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거기에 달려 있고, 우리 인생의 목적도 거기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 만물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창세 1,22.28 참조)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물은 저마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며,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만물은 필요하고, 또한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생태적 통공
교회는 그 시작부터 인간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단순히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것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알고 있던 형제자매의 한계를 넘어 더 넓은 형제자매의 관계로 확장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통공’(通功)은 모든 공이 서로 통한다는 뜻입니다. 곧, 모든 공로와 선행을 서로 나누고 공유함을 뜻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러한 통공의 결과이며, 우리는 또 다른 통공의 존재가 되려고 투신하겠다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 만물의 생명을 통해 생명의 통공을 주고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따라서 하루를 시작하면서 먼저 이 땅의 만물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통공의 결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통공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거나 묻지 않는 가운데 하나의 효용만을 보게 됩니다.
유전자를 조작하는 이들은 각각의 생명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또한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다양한지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바라볼 뿐입니다. 생태적 통공은 우리 생명의 본질을 성찰하게 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의 먹거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있어야
많은 대중 매체에 요리와 음식은 넘쳐 나지만 농민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의 시작을 묻지 않습니다. 유전자 변형 농산물을 통한 농업에는 결국 거대한 자본과 기술만 남게 마련입니다. 이제껏 해 왔던 농업은 무너지고, 농토는 소수의 사람이 독점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복잡한 생태계의 연결을 망가뜨리고, 효용성 있는 작물만 재배하는 나머지 다양성을 감소시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의존성을 증가시켜 농민들은 그저 농산물을 만들어 내는 노동을 착취당할 뿐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소수의 자본을 소유한 인간이 중심이 됩니다.
생명이 아닌 그저 하나의 상품만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우리에게 제공되는 많은 것이 얼마나 싸고 맛있으며 양이 많은지에만 관심을 돌립니다. 우리의 먹거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빠진 채 우리가 먹고자 하는 목적에만 맞추며 다른 생명을 바라봅니다.
인간 중심적인 선택주의는 인간들마저도 나에게 쓸모없는 존재는 대상화되어 결국 소비되는 물건이 될 뿐입니다. 또한 소용을 상실한 존재는 버려지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인간 중심주의가 결국 인간을 버리는 꼴이 됩니다. 하지만 세상 만물은 어떤 기능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좋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고, 그저 머물다 떠날 이방인일 따름입니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유전자 변형 농산물을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줄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또 굶주리는 많은 이를 구제할 것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나누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버려지는 음식을 보며, 수많은 사람의 고통에 우리가 동조자로 서 있고, 유전자 변형 농산물에 이용될 따름이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결국 유전자 변형 농산물로 만든 식품은 소비 시대가 낳은 괴물일 뿐입니다.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 기술과 시장 만능주의에 편승해 자연과 생명체를 조작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이며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누구인지가 어찌 보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생태적 통공에 이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당부하신 ‘생태적 회개’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합니다. 곧, 유전자 조작에 대한 생태적인 성찰을 통해 그것이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고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깊이 반성하고 살펴보는 것입니다.
교회, 생명의 밥상을 차려야
대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밥상 차리는 법을 배워 오라고 방학숙제를 내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한 말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사제가 되고자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양식, 생명의 밥상을 차리는 사람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양식과 생명으로 차리는 밥상을 모른다면, 생명의 양식과 밥상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양식을 차릴 줄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생명의 밥상을 알 수 있다거나 차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짜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처음으로 하신 행위가 제자들에게 밥상을 차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얻은 이들은 생명의 밥상을 차릴 줄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생명의 미사를 봉헌하면서 생명의 밥상을 나누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사도 2,46).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효용성과 이익 때문에 이 밥상 공동체가 깨져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의 밥상을 다시 한번 들여다봅니다. 본당에서의 식사 나눔을 비롯해 사제관이나 수녀원, 신자들끼리의 밥상을 말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모신 뒤에 많은 이가 비용과 효용으로 밥상을 차립니다. 생명을 함께 나누지만 정작 자신이나 교회 공동체의 식탁은 생명의 밥상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양식을 먹는 이들입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식탁을 차립니다. 단순히 미사 전례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생명의 식탁을 차리고 나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삶과 신앙이 분리될 때 그 신앙은 허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 생명의 밥상을 차리고 나눕니다. 수많은 이의 정성과 통공이 모여 잔치를 이룹니다. 또한 파견된 우리는 각자 삶의 자리 안의 제대에서 생명의 밥상을 차리고 또한 나누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생명의 밥상을 차려 주시는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
첫 번째, 구체적인 식사 기도입니다. 먹는 것이 가장 일차적이며, 중요한 관계를 맺고 나누는 일입니다. 밥을 먹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의 통공입니다. 그래서 이 밥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 기도에 창조주 하느님과 세상 만물을 초대해야 합니다. 햇볕, 바람, 별빛, 그리고 농부와 수많은 사람의 정성을 말입니다. 그렇게 밥을 먹는 이는 홀로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과 수많은 생명과 밥상을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밥상이 소박하더라도 생명의 식탁이 될 수 있습니다. 밥상에 담긴 하나하나의 의미와 이것이 어디에서 시작해 자신에게로 오고 흘러가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그저 주린 배만을 채울 따름입니다.
두 번째, ‘우리농’ 이용입니다. ‘생명 농업’으로 키운 농산물을 이용해야 합니다. 나 자신과 생명을 살리는 데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신앙적인 소비와 거리가 있습니다. 교회의 운동인 우리농촌살리기운동과 가톨릭농민회의 생명 농산물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제철 음식 이용입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만물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때그때 필요한 먹을거리를 주십니다. 우리의 욕심으로 그것을 거스르며 먹거리를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네 번째, 스스로 길러 먹기입니다. 곧, 생명에 대한 묵상과 감수성을 키우고자 작은 것 하나라도 자신이 키워서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길러 먹을 때,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농부이신 하느님을 묵상하고, 밥상의 귀함도 알며, 죽음의 밥상이 아닌 생명의 밥상에 가까이 가는 가운데 창조주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 집밥 늘리기입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느라 밥을 먹을 때 그것이 어떻게 자신에게 오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안전하고 새길 수 있는 식사는 바로 자신의 집에서 나누는 식사입니다.
여섯 번째, 깨어 있기입니다. 소비주의와 세상의 수많은 변화 속에서 생명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애써 노력하고 찾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공부하며 깨어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반생명의 문화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길을 잃은 채 반생명의 길로 치닫는 오늘의 현실에 그리스도인들의 영성과 성찰과 시선이 필요합니다. 세상 만물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를 내신 하느님의 뜻과 생명의 이유를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 김인한 알베르토 - 부산교구 신부. 2002년에 사제품을 받고, 지금은 부산우리농살리기운동본부장과 생명환경사목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6월호, 김인한 알베르토] 0 1,211 0 |